6. 바라만 보던 당신
아빠와 은경이는 감정의 표현이 사라진 나를 건너 방에 눕
혀 놓고, 동생들이 귀찮게 못하도록 내 근처에 얼씬도 하지 못하
게 했다.
몇 달 전에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어렴프시 기억을 더듬어
정리해 가며 이제는 다시금 일어날 때라고 마음을 다져 나갈 때
였지만 한 귀퉁이 스텐 오강 외에는 아무 것도 있질 않았다.
"내가 미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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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억수 같이 쏟아지던 6월 어느 날 자정이 훨씬 지난 시간에
편지 한 장을 손에 쥔 젊은 여자가 정릉천변에 쓰러져 있던 것을
순찰 중이던 경찰아저씨가 병원으로 데려간 일이 있었다.
"사는 것이 죽는 것보다 힘든 것입니다. 민영 엄마! 힘내세요.
시간이 흐르면 상처는 아무는 것입니다."의식을 차린 나에게 나
이 지긋하던 경찰아저씨는 다림질로 잘 다려진 편지 한 장을 머
리 곁에 놓아주며 눈인사를 했고, 나는 빼앗듯 화급하게 그 편
지를 소중히 가슴에 안았었다.
민영이 보아라
내 딸 민영이라고 불러도 되는 걸까?
탄생의 순간부터 축복받는 삶을 네게 주었어야 했지만
엄마 나이 23살에 겪어야 하는 아픔만큼이나 큰 고통
이, 갓 태어난 네게 운명처럼 짐 지워졌고 너와의 이별
이 이제 절망으로 와 닿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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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하는 것이 우리 모녀에게 최선이라고 생각하면
서도 너를 지켜 주지 못 한 못난 어미의 두 눈은, 찢기
듯한 심정으로 민영이 너를 찾아 헤매면서 현실 속에
무능했던 엄마자신이 이렇게 원망스러웠던 적은 없었다.
나에게 너를 거둘 수 있는 조그마한 공간이 없음은 네
가 떠난 이 순간 의미 없는 변명이란 생각으로 멈춰
버리고 자식을 버린 어미의 통한에, 정녕 민영이 네
앞에 고개 숙여 용서를 빌며 너를 그리다가 이제는 말
라 버린 눈물과 멈출 것 같은 심장으로 언제일지 모를
질문에 이렇게 답을 남겨 놓고 엄마는 삶을 끝내려 한
다.
너의 아빠 존함은 "성자 민자 우자"이시다.
남을 배려하실 줄 아는 선한 모습으로 176cm의 훤칠
한 키에 정말 다정하고 멋진 분이셨고, 무엇보다도 엄
마를 무척 사랑하셨다.
그러나 그 사랑을 시기라도 하듯 아빠가 사랑을 고백
하고 엄마가 사랑을 받아 드리려는 순간 아빠는 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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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서 더 이상의 치료방법을 찾을 수 없는 병을 치료
하시려고 미국으로 이민을 떠나야만 하셨다.
그런 사실을 까마득히 모른 채 그 때까지 아빠의 사랑
을 애써 피하며 살던 엄마는 아빠가 미국으로 유학을
떠난다고 유언처럼 말하던 두 사람의 마지막 만남이
되던 날, 깊은 산속 야영지에서 아빠를 사랑하고 있
음을 감추고 싶지 않았고, 그 날 서로에게 모든 것을
허락하면서 결코 후회하지 않겠다는 맹세를 했었다.
그 날 이후 아빠의 연락을 기다리던 엄마는 보름이
지나서야 아빠가 병이 악화되어 들것에 실려 미국으
로 떠난 것을 알게 되었고, 아빠가 남긴 편지와 보석
함을 받아 볼 수 있었다.
그렇게 떠나야 했던 아빠를 원망 했었지만 그것보다도
더 큰 일은 엄마의 뱃속에 네가 자라나고 있었던 것을
알고 나서부터였고, 그 사실을 아빠에게 편지로 전하
였지만 그 해 늦은 겨울, 아빠가 입원해 있던 병원으
로부터 치료 중 돌아가셨다는 짤막한 답신을 받게 되
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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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 편지를 받아 든 엄마는 충격에 싸여 거리로 뛰
쳐 나가게 되었고 달려오던 버스에 부딪치는 사고를
당하게 되면서 제왕절개로 임신 8개월이 조금 안된
너를 조기분만 하게 되었다.
네가 누워서 2달을 넘게 살았던 인큐베이터는 극히 제
한된 시설이었기에 솔직히 말해서 가난했던 엄마는
경비를 감당하기 어려웠고, 그렇다고 어려운 살림살이
를 빙자해서 미숙아였던 너를 병원에서 데리고 나가면
살릴 수 있다는 보장도 없었기에 최선의 길이라고 생각
하며 너의 입양을 결정하게 되었다.
한가지 더 솔직히 말하면 너의 아빠가 돌아가신 것을
확인한 상태에서 엄마는 처녀의 신분이라는 현실적인
문제를 피하기가 어려운 것도 그 결정을 내리는데 큰
의미를 가졌었단다.
마지막으로 너의 이름 "민영"은 아빠의 민우에서 한 자
를, 엄마의 은영에서 한 자를 가져다가 엄마 혼자 짓고
혼자서 부르던 이름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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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영"이란 이름을 지어주던 날 유리 벽 안의 너를 바
라 보며 또 한 번 세상에 태어날 수 있다면 훌륭한 가
정에서 축복 받고 태어나 행복한 모습으로 살아 주기
를 바란다고 간절히 빌었단다.
민영아! 부디 아빠와 엄마를 용서해 다오.
너를 떠나보내며 얼마나 많은 시간을 후회와 죄책감
으로 얼마나 울었는지 모르지만 이제 더 이상 괴로워
하는 것을 잊고 싶다는 생각에 아빠 곁으로 가려 한다.
이 편지는 엄마 방 선반 위에 있는 아빠의 유일한 유
품인 보석함에 넣어 두겠으니 어른이 되어 혹시라도
네가 아빠, 엄마를 찾게 된다면 이렇게라도 한 번 더
속죄하고 싶은 마음에서 이 글을 남긴다.
민영아! 잘 살아다오.
1979년 6월 어느 날
사랑하는 민영에게 엄마가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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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원한지 3일째 되던 날 행방불명 신고를 했던 가족들이 병
원에 입원 중이던 나를 찾아냈다. 치료를 담당했던 의사 선생님
은 정신과적 치료가 필요하다며 나를 중곡동 한 병원으로 이송
시켰는데, 절망 앞에 서 있던 나는 저항을 잊은 채 차라리 나를
감싸고 있는 모든 것으로부터 달아나고만 싶었다.
아빠와 은희, 은경이와 노빈을 뒤로 하고 육중한 쇠창살문이 닫
이는 소리에 깜짝깜짝 놀라며 하얗게 바른 회 벽 사이를 두 사람
에게 겨드랑이가 끼인 채 끌려 들어갔다. 창문마다 쇠창살로 막
혀 있었고, 두 손목과 발이 묶여 있는 침대에서 내가 누워 바라
보는 천장에는 온 천지가 거미줄로 그득한 채 금새라도 붉은 피
를 칠한 커다란 거미가 나타나 덮쳐 누를 것 같았다.
낮게 들리는 신음소리는 환청인지, 살아 있는 신음인지, 고통에
일그러진 비명, 괜한 힘없는 의미 없는 외침 그런 외마디들을
귓가에 담아 가면서 서서히 죽어가는 아무런 생각 없는 내가 너
무 좋았다.
석 달이 지났다고 했다.
나는 그 곳에서 고개로만 "예, 아니오" 라고 답 했을 뿐 아무런
말을 하고 싶지 않았고, 그저 눈앞에 어른거리는 것은 그 어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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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이 지금쯤 살아 있을까? 하는 생각뿐이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안정을 되찾아 가기 시작 했고, 내가 돌보아야 할 동생들과 아빠
의 모습이 마음 한 곁에 사로잡기 시작하는 것을 느꼈다.
100일만인 토요일 오후 늦게 아빠와 은경이 손을 잡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은경이가 분위기를 밝게 하려고 재롱을 떨며 수다를
폈지만 나는 차장가에 시선을 고정한 채 낙엽이 지기 시작한 가
을의 거리에서 좀처럼 눈을 뗄 수 없었다.
"들어가서 쉬고, 어서 기운을 차리거라."
아빠를 바라보았지만 아빠는 나를 보고 있지 않았다.
은경이의 부축을 받으며 건너방으로 들면서
"은경아 나 괜찮은데......"
"알아. 언니! 나에게도 우리 가족 모두에게도 조금만 시간을 줘."
어려서부터 나를 잘 따르던 은경이가 애써 슬픔을 웃음으로 감추
다가 갑자기 울음을 참지 못하며 내게 안겨 왔다.
"언니 뭐가 잘못 된 거야. 이건 너무 불공평해. 언니! 언니~"
나는 은경이의 마음을 잘 알고 있었지만 은경이를 가슴에 담고
머리를 쓸어 주면서도 북 받치는 감정과는 달리 눈물이 나질 않
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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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를 마치고 하나 둘씩 집으로 돌아 온 동생들은 교통사고로
병원에서 치료를 끝내고 돌아 온 것으로 되어 있는 나에게 비명
을 지르며 달려들었다. 동생들을 넉 달만에 대하며 그 새 훌쩍
커 버린 동생들의 모습이었지만 내 도움이 필요한 어린 동생들이
란 생각이 들자 내가 없던 동안 동생들이 받아야 했던 외로움과
고통이 가슴에 와 닿는 듯 싶었다.
나 아닌 다른 사람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다는 것이 새로운 힘
을 솟게 했다. 1주일 동안 집에서 요양을 마치고 그 동안 낮에
는 아빠가, 저녁시간에는 은경이가 맡아 온 가게를 다시 나가기
로 하면서 집안 살림은 16살의 은애와 15살의 은미가 맡기로 했다.
우리 집은 안정을 되찾아 갔지만 예전에 밝던 모습은 아니었고
가끔 노빈이 집에 들러 동생들과 삼겹살도 구워 먹는 것 같았지
만 그와는 중곡동 병원에 입원하던 날 이후 의도적으로 만나려
하지 않았다..
그리 즐거운 일도 없었지만 거울 속의 내 미소는 진실을 잃어 보
였고, 말을 먼저 건네는 일도 드물었으며 언제나 단답형으로 말
수가 적어만 갔다. 다행이 동생들은 큰 탈 없이 학교생활을 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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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 주었고 어려서부터 엄마와의 이별을 경험해서인지 정신적으로
또래에 비해 성숙하고 건강하게 자라 주었다.
내가 가게를 나가게 되면서 아빠는 새로운 일을 찾으셨다면서 아
침이면 동생들과 함께 도시락을 들고 어디론가 출근을 하시기 시
작하셨는데 올해 54세의 아빠가 직장을 구하신 곳은 멀지 않은
청량중학교의 정문 수위 자리셨다. 엄마의 병간호에 퇴직금과 사
채를 쏟아 부운 결과이기도 했지만 아빠는 언제나 웃는 낯으로
학교로 출근하는 젊은 선생님들께 거수경례를 하며 하루를 시작
하셨다.
바쁘게 자신을 몰아가던 나도 서서히 상처가 치유 되어감을 느끼
게 되었고, 그 새 은경이는 21살의 발랄한 은행원으로 성장해 있
었으며, 그 해는 은수가 드디어 국민학교에 입학을 하던 해였다.
형제들 중 제일 키가 작고 왜소하여 여리게만 보이던 은애가 교
육대학에 합격을 하기도 하던 그 해 금실이 좋던 부부 은희네가
둘째 아이를 낳았다.
다행이 제부가 되는 곽방근씨가 자기 부인이라면 벌벌 떨고 산다
니 그런 고마운 데가 또 어디 있나 싶었고, 미술선생님이기도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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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희는 아이를 시어머니께 맡기고 맞벌이를 계속하고 있었다.
두 사람 다 무던한 사람들이었기에 다투었다는 소리를 들어보지
못했는데, 그런 은희가 둘째를 낳고는 산후조리를 친정집으로 오
겠다는 연락에 우리 집도 흔쾌히 산후조리를 떠맡기로 했다.
남아 있는 이모가 자그만치 5명에 삼촌이 1명 그리고 외할아버지.
...우선 방을 다시 정하기로 하고 안방은 은희네 부부, 건너방은
나와 은미, 은정이가, 문칸방는 은경이와 은애, 그리고 작은방은
아빠와 은수가 쓰기로 했다.
제부는 아빠가 쓰시던 안방을 차지하기가 쑥스러워서인지 한사코
마다 하다가 마침내 안방을 차지하고 짐을 풀었다.
"영호야! 잘 있었니?"
"네. 왕이모."
영호는 나를 왕이모라고 부르면 어려서부터 잘 따랐지만 영호를
대하는 나는 언제나 동갑내기인 민영이의 모습이 눈에 밟혀 돌아
서 눈물을 흘리는 경우가 많았다. 몸조리차 은희 부부가 집에 와
있으면서 오전시간에는 다들 학교와 직장으로 집을 나서고, 은희
와 영호, 경희 그리고 나만이 빈 공간을 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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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지근하게 목욕물을 데우고 영호의 질투를 달래며 은희와 함께
아이를 씻기던 첫 날, 조산을 해서 유독이 온 몸에 주름이 많았
던 민영이의 가냘픈 숨소리와 초라한 몸짓이 눈에 어른거려 마음
을 진정할 수가 없었다.
민영이는 태어나서 거의 한 달 반 정도를 잠만 자고 있었고 어쩌
다 하품이라도 하면 입을 크게 벌리는 것 조차 힘들어 보였는데
그러다 보니 자연히 나는 민영이 목욕조차도 시켜 본 적이 없었
고 언제나 인큐베이터 안에 가늘게 숨을 쉬고 있는 아이만을 바
라 보았을 뿐 한 번도 제대로 눈을 맞춰 보지 못한 채 아이를 떠
나 보내야 했었다.
"주르르륵" 숨겨 흘리던 눈물이 방울져 욕조 안으로 흘러 내렸다.
부지런히 은희와 영호의 점심을 차려 주고 12시경 가게에 나오면
서 갑자기 민우 그 사람이 그립다고 생각했다.
내가 어렵고 힘들었을 때 항상 내 곁에서 나를 지켜 주었던 사람
이었는데.....가게에 도착한 나는 신문지에 겹겹이 싸서 둔 그가
남겨 준 보석함을 조심스럽게 꺼내 뚜껑을 열고 그의 편지를 두
손에 받쳐 들었다. "세상에 다시 태어나도 당신만을 사랑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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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 성민우 그 사람! 테엽을 감아 에델바이스 멜로디가 흐르도록
하고 외다시피 한 편지의 한 문장을 읽어 내려갔다.
그날밤 사랑을 결코 후회하지 않겠다고 맹세 했던 나와 시간과
두려움에 휩싸여 있으면서도 나를 사랑한다고 외치던 성민우!
몇 번이고 보석함의 태엽을 감아 그와 민영이를 찾아 나서 보고
픈 그리움에 눈물지으며 25살의 많지 않은 나이에 지난 8년 동
안의 삶이 꿈이었으면 생각해 보았지만 이내 부질없음을 깨닫고
고개를 떨구며 나를 잊고자 노력했다.
민우씨 보세요
더 이상은 당신이 그립다고 생각지 않겠어요.
운명처럼 다가온 당신을 그리다가 헤진 눈과 외로움
만이 서글픔으로 나를 휘감아 오고, 보일 듯한 당신
은 언제나 내게 미소만으로 답할 뿐 남아 있는 것이
라고는 파렴치한 나의 육신과 가슴 아픈 기억들인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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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당신의 아이를 낳았어요.
우리 두 사람의 이름에서 "민영"이라는 예쁜 이름을
지어주었지요. 너무 어려 어미의 버림을 받았지만 당
신을 닮아 멋지고 훌륭하게 자라리라고 소원하며 민
영이와 이별을 하던 그 날부터 당신을 따라 나서는
연습을 해 보면서도 모질지 못함인지 오늘에 내가
되어 있네요.
민우씨!
결코 당신을 원망하지 않겠어요.
당신이 죽음과 사투를 벌이고 있던 시간, 나는 당신의
답장을 기다리며 대답 없는 당신께 절망 했었답니다.
아이의 발길질을 느끼며 당신의 소식만이 나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리라 믿으면서 너무도 그리워했던
시절도 있었습니다.
어떠세요. 그렇게 지켜보니 행복하신가요?
볼 수도 느끼지도 고통 받지도 않는 보이지 않는 당신
의 공간이 너무 부러워 현실의 삶을 도리질 치며 당신
과 민영이에게 이 글을 보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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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1년 11월 13일
당신을 그리워하는 은영
사연 담은 편지지들이 비행기와 학으로 접혀져 허공을 향해 힘껏
날려지며 어둠이 내리기 시작한 광나루 다리에는 오랜만에 소리
쳐 웃고 있는 내가 있었고, 그것들이 강물을 따라 편안하게 흐르
기까지 난간에서 목과 몸을 길게 빼고 그들을 소리쳐 부르던 내
가 있었다.
"은영아!"
다급하게 외치는 소리....그와의 격렬한 몸부림....그리고 뺨을 가
르는 통증 후엔 버려지듯 구겨져 다리 난간에 쳐 박힌 채 증오에
가득찬 시선으로 침묵하다가 미처 접지 못한 편지들이 바람에 허
공으로 날리면서 그것들을 잡으려 게걸스럽게 다가서는 내가 있
었고, 그것들이 누군가의 손에 다리 밑으로 하얗게 뿌려지는 허
공을 향해 함께 가려는 나의 뺨에 또 다시 심한 충격을 느끼며
갸냘프게 주저앉았다.
"난 이런 네가 싫어. 이제는 더 이상 너를 바라보기도 싫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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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바보야. 더 이상 시간이 필요하니?"그렇게 소리 지르던 그는
아무 말 없이 곁에 주저앉으며 나의 머리를 오래도록 끌어안아
주었다.
그 일이 있고 나서 나는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하루를 보낼
수 있었다. 민우나 민영이의 그림자에서 벗어나려는 자아를 느
낄 수 있었으며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무엇엔가 몰두해야 한다는
생각에 무슨 일이든지 가리지 않고 하면서, 오래 전 아빠와 함께
했던 포장마차 경험을 살려 12월초 책방 한 귀퉁이에 샌드위치
와 떡볶이, 오뎅장사를 함께 시작 하면서 새벽 4시반이면 나
서서 저녁 11시반까지 일에 매달렸다.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면서 생각보다 매상도 좋아지기 시작했다.
가게 앞에 천막을 달아 저녁때면 비닐을 둘러치고 낮에는 의자
를 놓아 자리를 확장하면서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아 책방보다는
분식의 매출이 더 좋아지기 시작 했다.
아빠와 상의 끝에 책방을 그만 두기로 하고 아빠와 함께 실내포
장마차를 하는 것으로 결론을 내고 서둘러 책방을 정리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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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리를 해서 가게를 두 배로 확장하고 메뉴로는 "아빠-딸 샌드위
치와 신설동 떡볶이, 오뎅국과 순대 그리고 라면과 튀김, 김밥을
만들어 팔았지만 술은 팔지 않았다.
마침 주변에는 포장마차가 없었고, 지하철 출입구에 있던 우리
가게는 분컥繭遮?시대의 유행을 타고 사람들이 넘쳐 나기 시작
하면서 너무 바쁜 나머지 자연히 은경이와 은애까지도 저녁 피크
시간에는 나와서 함께 도와주어야 했다.
개업을 한지 보름정도 지난 어느 날 은경이와 함께 운동하던 친
구들이 가게를 찾아와 식사를 하고 있을 때 대여섯 명의 동네불량
배들이 가게로 밀려들어오면서 세금을 내라며 손님들을 내몰던
일이 있었다.
경기장에서 안면이 있던 은경이 선배였던 오창훈과 몇몇이 그 들
을 데리고 나가면서 싱겁게 일이 끝내고 돌아 왔는데 "선배! 그
자식들 어떻게 했어? 아주 묵사발을 만드는 건데..." 은경이가 팔
을 걷어 붙였지만 오창훈은 은경이 팔을 붙잡으며 싱긋 웃기만
할 뿐 그 일로 더 이상의 시끄러움은 없었다.
문제는 다음날부터였는데 시도 때도 없이 동네 불량배들이 떼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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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어 우리 가게로 들이 닥치면서 은경이도 없는 가게에서 아빠와
나는 그들의 우악스러움에 기가 죽어 그들이 요구하는 음식을 만
들 수 밖에 없었고, 돈을 받을 엄두가 나질 않았다.
"아저씨 여기 얼마요?"
"예. 오천 팔백원이요."
"그런데 아저씨! 어제 그 선수들 이 집하고 어떤 관계예요?"
돈을 받은 아빠가 시선을 피한 채 잔돈을 준비하고 있었고 대답
은 내가 해야 할 차례인 것 같았다.
"예. 동생친구들이에요. 왜 아는 사람이던가요?"
"그러세요. 알고 보니 우리 형님 친구분이던데, 잘 먹었습니다."
그 중 우두머리 같은 자가 모자를 벗어 인사를 하며 음식 값을
치룬 후 한 무리의 사람들이 우리 가게를 빠져 나갔다.
그 날 이후로 그 들은 우리 집 단골손님이 되었고 시키지도 않
은 호객꾼을 한 달 가까이 가게 앞에 세워 준 덕인지 우리 가게
는 입소문이 나면서 손님들로 넘쳐 나기 시작했다.
너무 고마워 어쩌다가 음식값을 받지 않으려 해도 "당치 않은 말
씀"이라며 꼬박 꼬박 값을 지불하는 그 들은 어느 순간부터 "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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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하며 어리광을 부리기 시작 했지만 절대로 서툰 짓을 하거나
돈을 내지 않는 그런 일은 없었다.
"은경아!"
"네 언니?"
은경이는 얼마 전부터 내게 꼬박꼬박 존댓말을 쓰고 있었다.
"네가 22살이지?"
"언니 무슨 생각하는 거에요?"
"아니. 그냥 오창훈씨를 바라보는 눈이 하도 그윽 하길래....."
"언니!"
발작하듯 은경이가 고함을 질렀다.
"아! 그래그래 그만 하자. 그냥 좋은 사람 같아서 그랬어. 몇 살
이나 되었니? 또 무얼하고?"
"언니! 소개시켜줄까요?"
"기집애! 언니 가지고 놀아라."
"나이 25살, 현재 미들급 태권도 국가대표, 4남매중 맏이, 부모님
은 두분 다 계시고, 아버지 직업은 공무원, 생활수준 중급..."
"얘! 그만해라. 너 아무래도 오창훈씨에게 시집가려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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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
무서운 기세로 달려드는 은경이의 사정권에서 도망 나와 튀김 튀
기는 곳으로 달려갔다. 왜냐하면 은경이는 기름 튀는 것을 너무
무서워했기 때문이었다.
실내포장마차를 하면서 우리 집은 2년 동안 이 곳에서 많은
돈을 모을 수 있었다. 아빠와 나는 이 곳에 온 정성을 집중하고
있었고, 은경이는 23살의 꽃다운 처녀로, 은애는 선생님의 꿈을
키워 가는 20살의 어엿한 학생으로 기숙사 생활을 하고 있었고,
19살의 은미는 고교 졸업 후 집안의 대소사를 모두 챙겨 나가는
살림꾼이 되어 있었다. 그 아래로 16살의 은정이가 있었고, 막내
은수의 나이가 그 새 10살이 되었다.
그 동안 모아 두었던 돈으로 이제까지의 빚을 가리고도 상당한
돈이 남아 융자를 얻어 주변의 아파트를 구입해 이사를 할 수 있
었는데 미도파 백화점 뒷 편의 미주 아파트 38평형으로 이사를
하면서 단독주택처럼 연탄불 가는 일 없는 것과 더운 물을 아무
때나 쓸 수 있다는 것, 그리고 부담 없이 문을 잠그고 외출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집에서 할 일이 없는 것 같았으며, 다들
자기 앞가림을 할 수 있는 나이로 아침 식사만 해결하면 점심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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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은 각자가 알아서 하든 아니면 길 건너 있던 가게에 와서 해
결 했다.
일이 너무 많다는 것은 행복한 일이다. 하루를 시작하면 어느 새
날이 저물고 문을 닫아야 하는 시간이 되고 돈 주머니에 가득한
돈을 세면서 아무런 불평이나 고민이 있을 수 없었으며 정말 이
런 행복이 우리 가족에게 찾아오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우선 은희가 조금씩 보내 주던 돈을 중단 시켰다.
그 동안 동생들을 위해 생활비를 보내 주던 고마운 자매들에게
경동시장에서 시댁 어른들 몫까지 푸짐하게 인삼을 사다가 소포
로 보내 주었고, 가끔씩 가게에 들려주던 하노빈에게도 그 동안
여러가지 고맙다는 뜻으로 오리털 파카를 선물하던 날 노빈은 자
신의 여자 친구라며 근사한 아가씨를 데리고 가게에 나타났다.
"은영아! 내 여자친구 유혜림씨야. 혜림아! 오빠가 말했지? 오빠
의 첫사랑 조은영씨야."
바보처럼 가슴이 철렁 주저앉음을 느끼면서 마침 바쁘지 않은
시간이어서 그들과 합석하여 음식을 함께 들었다.
"은미야! 오빠 왔다. 오빠 좋아하는 것으로 많이 가져올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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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았어. 언니!"
"노빈아! 한 번 입어 봐라. 사이즈를 몰라 눈대중으로 샀는데...."
"뭐 이런 걸 다 사다 주면서 사람을 감동 시키냐?"
노빈이 투덜거리며 베이지 색 파카를 몸에 걸쳤다.
예상대로 길이는 길었지만 어깨넓이며 팔 길이들은 아주 잘 맞았
고 색상도 잘 어울리는 것 같았지만 혜림은 우리 두 사람을 번갈
아 보며 경계의 눈빛으로 편해 보이지 않았다.
"혜림씨! 어디 불편하세요.?"
"아닙니다. 별 말씀을요. 오빠와 저는 곧 약혼을 하게 되요.
그 전에 은영언니에 대해 너무 궁금한 것이 많아 오늘 찾아 뵙
게 되었어요. 오빠와 격이 없는 언니의 모습을 보니까 괜한 질
투심이 생기네요."
그녀는 160cm가 안되 보이는 자그마한 키에 대학 3학년 그러
니까 22살의 싱싱하고 발랄한 여대생으로 기름때 묻은 돈 주머니
를 차고 머리를 뒤로 묶어 걷어 올린 아줌마 같은 27살의 나에
비하면 아주 지성적인 모습을 하고 있었다.
한 눈에 자존심이 강하고, 좋은 가정에서 남부럽지 않게 자란 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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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라는 것을 느끼게 하는 당당함과 오만함.......저 정도 여자라면
하노빈의 짝으로 괜찮겠다 싶은 생각을 했다.
"야 하노빈! 축하 한다. 내가 보기엔 혜림씨가 아까운데......
자! 나는 장사를 해야 하니까 맛있게 많이 드세요."하며 자리를
일어나 부엌으로 향했다.
"노빈이라면 저런 여자와 잘 어울리는 남자야. 참 잘된 일이야."
하지만 허전한 마음은 그가 자리를 뜨고도 오래도록 계속되었고
마음속에 나는 또 다른 나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은영아! 넌 노빈을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소유하려 해서는 안돼!
노빈은 네 친구이며 민우의 친구이기도 하고 가까이서 나를 가
장 많이 알고 있는 사람이기도 해. "
혜림이 다정히 팔짱을 끼고 가게를 나서며 말했다.
"은영언니 반가웠어요. 우리 약혼식 때 와 주실꺼지요?"
"아무렴이요. 꼭 가도록 하겠습니다."
밝지 않은 얼굴의 노빈과 자신에 찬 혜림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흔들어 주며 마음속으로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노빈! 당신은 내게 소중한 친구랍니다. 2년째 내 곁에 맴도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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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숨어 있는 눈길을 느끼면서도 나는 애써 당신을 보지 않
으려 했었는데, 이제는 그러지 말아요. 나는 당신을 사랑하지 않
아요.
오늘 당신의 혜림이를 보게 되었군요. 두 사람 모두 너무 깨끗
하게 보여 감히 어울릴 수가 없어요. 나의 친구 노빈! 그녀와
이룰 수 있는 사랑으로 행복을 찾아가세요." 나도 모르게 흐르는
눈물을 돌아서며 닦았다.
27살의 나이가 저물어 가면서 내게도 꽤 많은 중매가 들어
왔다. 170cm의 작지 않은 키에 장사를 하며 다져진 근육과 몸놀
림, 학벌이야 고교졸업장이 다지만 속내를 모르는 주변사람들은
정말 좋은 신부감이라며 선을 보자고 채근을 해댔지만 결혼 할
생각이 없었던 나는 "생각이 아직 없다."며 순간의 위기를 넘겨
가고 있었다.
그래도 집안 어른들과 주변 사람들의 성화에 못 이겨 선을 몇
번 보았는데 내가 일하는 곳에서 선을 보는 조건으로 그 중에는
학교 선생님도 있었고, 회사원들도 있었지만 그 해 10월의 직업
군인이었던 김경백대위의 구애는 정말 끈질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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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위는 태릉에 있는 교육사단에서 중대장으로 근무 중이었는데
의례 퇴근을 하면 우리 가게로 달려오던, 짧은 곱슬머리에 쌍거
풀 진 동그랗고 큰 눈을 가졌었고, 웃을 때 목젖이 다 보일 정도
로 호탕하게 웃는 180cm 정도의 키다리 군인이었다.
집안 어른의 중매로 첫 번째 만남 속에서 솔직하고 순수하다는
면에서 참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했지만 그 때까지만 해도 내게
결혼이라는 단어는 영원히 없을 것 같았다.
우선 가게 안으로 들어서는 꺼부정한 모습의 김대위가 나타나면
"어서 오세요"를 끝까지 못하고 은미와 나는 웃음을 참기가 바빴
고 남이야 웃거나 말거나 인사라야 희죽 웃는 웃음뿐이던 그는
엽차 한 잔을 받아 들고 덩치에 걸맞게 음식을 계속해서 시켜 먹
으며 선을 본 다음 날부터 1주일 동안 가게 문을 닫을 때까지 한
자리를 지키는 끈기를 보이더니 드디어 그 날은 굳게 닫았던 말
문을 열었다.
"은영씨! 사람이 오나 가나 그렇게 관심이 없어서야 되겠어요?
딱히 애인도 없는 것 같은 데 어떻습니까? 이 김경백이 하고
연애 한 번 해 보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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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음을 참으며 은미가 집에 다녀오겠다면 자리를 피해 주었다.
"김대위님! 전에 말씀 드렸지요. 제게는 아직 돌봐야 할 동생들과
아빠가 계시고 정말 어떤 사람에게 구속당한다는 것이 싫어 결
혼은 안 하겠다고요."
"아! 그 말이라면 문제가 되질 않습니다. 우선 저는 막내아들이
니 은영씨 집에 들어가 함께 살면 되는 것이고, 구속이라구요?
저는 은영씨에게 구속당하며 살고 싶으니 그것 또한 문제가 없
을 듯 합니다.
오늘이 7일째인데 그 나이에 남자친구 하나 찾는 사람 없으니
솔직히 은영씨를 구제 할 수 있는 사람은 이 김경백이 밖에 없
다는 사실을 정확히 아셔야 합니다. 어떠세요? 내일이라도 우
리 결혼을 하는 것이....?"
정말 코메디 같은 그의 말을 듣고 있노라면 웃음도 가당치 않아
피식 거렸고 너무 당당한 그의 태도에 은근히 화까지 났었다.
"이보세요 김대위님! 김대위님은 정말 저의 이상형이 아니에요.
그리고 무엇보다도 결혼 할 생각이 전혀 없는 사람을 혼자 생각
대로 몰아가지 마시고 내일부턴 이 곳에 제발 오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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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주일째 주문만을 할 뿐 말이 없던 김대위는 기분이 상했는지 휴
지로 입가를 "썩" 하고 문지르고는 "은영씨! 처음엔 다 그래요.
키 크면 싱겁다고 하지만 꼭 싱거워서 이 집에서 신부감을 찾는
것은 아니랍니다. 내일부터 정성껏 당신의 사랑을 받아 내도록
열심히 노력 하겠습니다."하며 계산을 치룬 그가 말도 없이 휭 하
니 가게 문을 박차고 나갔다.
"언니 그 아저씨 갔어? 키도 크고 괜찮던데......"
은미가 빈 그릇을 치우며 은근히 김대위와 사귀길 바라는 눈치였
지만 내게는 그럴 마음이 전혀 없었다. 비가 오기 시작한 10시반
쯤 가게 문을 닫던 우리는 가게 앞 처마에 비를 맞고 서 있는 김
대위를 볼 수 있었다.
"언니 저기 김대위님 아니야?"
키가 180cm이니 한 눈에 그 임을 알았지만 은미를 채근해 가게
문을 닫는데, 싱거운 그 사람은 말없이 다가와 내 손에 들려 있
던 함석으로 만들어진 문짝들을 나꿔 챘다.
"뭐 하시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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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면 모릅니까? 문 닫아 주려고 이제까지 기다리고 있었는데 나
더러 그냥 가라고 하실 수 있습니까?"
곁에 있던 은미가 잽싸게 그에게 우산을 씌워 주었다.
"동생 반 만 닮아 보십시오. 얼마나 인정 많아 보입니까?"
가게 문을 닫고 내게서 열쇠를 빼앗아 자물통을 채웠다.
"어서 가시죠. 집까지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너무 일방적인 그에게 뭐라고 한 들 이야기가 통하지 않을 것이
라는 생각을 하며 우산을 쓴 은미와 내 곁에서 비를 맞는 직업을
가진 사람 마냥 졸졸 따라오다가 아파트 정문 앞에서 김대위는
거수경례를 하며 빗속으로 사라졌다.
그런 그를 바라보며 오랜만에 내가 여자인 것을 느끼면서 보호받
고 싶어 하는 본능이 나를 한동안 빗속에 세워 놓고 있었다.
"언니! 그만 가자."
아파트 생활은 편한 곳에서 정돈된 삶을 사는 것 같아 좋은 점도
있었지만 앞마당에 앉아 삼겹살 굽던 재미가 사라졌고 밤하늘 맑
고 찬 공기가 그리울 때가 있는 것으로 보아 나는 아파트보다는
단독주택에 어울리는 사람인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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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 먼저 씻어."
더운물을 받아 목욕을 준비하며 양치질을 신경질적으로 하다가
거울 속에 아줌마를 보며 입을 벌려 치약거품이 가득한 입 안을
들여다보았다. 이리저리 인상도 써보고 그럴 때마다 눈가에 잡
히는 주름에 신경을 쓰다가 배꼽아래` 가로로 길게 난 칼자국에
시선이 멈추자 나도 모르게 칫솔을 떨군 채 잊으려 애쓰던 상처
가 더 크고 단단한 아픔으로 밀려오는 것을 느꼈다.
"이제는 더 이상 나를 버려서는 안 돼."
욕조로 향하며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몸을 웅크리고 더운물과 증
기속에 몸을 숨긴 채 두 눈을 질끈 감으며 땀이 볼을 타고 흐르
기 시작할 때쯤 긴장되었던 신체의 구석구석이 씻기어져 나가는
것을 느꼈다.
김 대위는 다음 날부터 퇴근을 하면서 아예 우리 가게로 출근을
하기 시작 했는데 달라진 점이라고는 군복 대신 사복으로 갈아
입고 짧은 머리에 팔을 걷어붙인 채 첫 날은 물 컵을 나르고 빈
그릇을 주방으로 나르더니 다음 날부터는 주문을 받기 시작하면
서 자기가 가게 주인인양 큰 소리로 주문을 넣기도 하고 그것도
모자라 음식을 나르나 싶더니 테이블에 행주질까지 해 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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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저런 넉살 좋은 남자가 있나?"
황당한 모습을 지켜보며 어떨 때는 민망스러움도 있었지만 그는
남들이 갖지 않은 적극성 이외에도 또 다른 무엇이 있는 듯 싶었
다.
내가 처음 포장마차를 시작 할 때가 생각이 났다.
"어서 오세요. 뭘 드릴까요? 잠깐 기다리세요. 맛있게 드세요.
얼마입니다. 감사합니다. 또 오세요."
이 몇 마디의 말을 자연스럽게 하는데 한 달은 꼬박 걸린 것 같
았는데 그는 얼굴빛 하나 변하지 않고 그런 말들을 첫 날부터 아
주 시원스럽고 자연스럽게 하고 있었다.
"언니! 저 아저씨 진짜 웃긴다. 그지?"
은미가 내게 눈치를 주며 하던 말이 생각난다.
"오빠! 어서 오세요. 왜 이리 뜸 하셨어요. 단골손님 떨어진 줄
알았잖아요."
금요일 저녁 노빈이 가게로 찾아왔다. 거리가 보이는 창가로 자
리 잡은 그는 며칠째 세수도 않은 사람처럼 초췌해 보였다.
"혜림이는 어떻게 하고 너 혼자 방황하니? 뭐 좀 줄까?"
오래 전부터 그랬지만 노빈은 나와 만나면 거의 말을 하지 않고
물음에는 "쓴 미소" 한 번 그것으로 대답하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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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미야! 오빠 술이 좀 된 것 같다. 뭐 좀 마실 것을 드려라."
"은영아! 가게는 은미에게 맡기고 오랜만에 술이나 한 잔 하자."
창 밖에 시선을 고정 한 채 자기가 할 말은 다 해 버린 양 내 이
야기는 아예 들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웬일이니? 너 혜림이 하고 싸웠니?"
한 무리의 손님들이 들이 닥치면서 대답 없는 그를 남겨 두고 장
사를 해야 했지만 노빈의 그런 모습은 근래에 드문 일이어서 걱
정스러웠다.
"은미야 혼자서 할 수 있겠니?"
"응 언니 다녀와."
"은영씨 친구분이세요?"
"네"
"무슨 고민이 많은 사람 같으니 함께 나가시도록 하고 이 곳은
은미씨와 내가 마무리를 짓겠습니다. 소개나 시켜 주시지요."
남자다운 것인지 무모한 사내인지 모를 김대위를 이상한 눈으로
한참 쳐다보며 마치 남편이라도 된 듯한 그의 모습에 어이가 없
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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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빈아! 인사해. 이 분은 김경백대위님이셔."
"김대위님 이 친구는 국민학교 동기동창인 하노빈씨 입니다."
"반갑습니다. 은영씨에게 가까이 하는 친구가 한 사람도 없어 성
격적으로 문제가 있나 싶었는데 하형을 만나서 반갑습니다."
"하노빈 입니다."
하노빈이 악수를 나누는가 싶더니 어색한 모습으로 나를 향하며
"은영아! 천둥과 번개로 와라. 먼저가 있을께."라며 자리에서 일
어 나려 했다.
"아 아 하형! 잠시 만이요. 은영씨 서두세요. 늦은 밤에 혼자가시
면 내가 불안해져요."
싱겁게 큰 키에 수선을 피우며 나의 옷깃을 잡아끌어 가게 밖으
로 끌어내고는 아주 심각한 얼굴로 이야기를 했다.
"은영씨 주말은 제가 가야 할 곳이 있어 오지 못합니다. 다음주
월요일부터 찾아뵙도록 하죠."라며 섭섭해 하는 김대위를 뒤로
하고 오랜만에 노빈과 신설동 음악다방을 향해 걸었다.
긴 침묵 끝에 그가 먼저 말을 꺼냈다.
"은영아! 네가 행복해 보여 다행이다."
나는 가던 걸음을 멈추고 이 친구가... 나를 너무도 잘 아는 이
친구가... 내게 이런 말을 할 수 있을까 한참을 생각했다.
"그렇게 보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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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긴 침묵이 흘렀다.
"나, 오늘 혜림이 하고 끝내 버렸어."
"아주 괜찮은 여자 같던데 사랑싸움 했구나? 쫀쫀하게 굴지 말
고 사랑 한다고 좀 해주지 그랬어."
음악다방으로 가던 발걸음을 멈추고 포장마차에 들러 닭똥집과
소주를 앞에 놓고도 그는 좀처럼 입을 열려 하지 않았다.
"노빈아! 무슨 일이 진짜 있는 거야? 너무 심각하니까 겁난다."
그를 따라 한잔씩 들이키는 소주가 온 몸에 피를 솟구치게 하는
것 같았다.
"아까 그 친구 뭐하는 사람이야?"
"말했잖아. 군인이라고..... "
"어떤 관계냐고?"
"어떤 관계? 그런 것 없어. 얼마 전에 선을 보았는데 무작정 자기
의 진실을 정성으로 보여 준다며 결혼하자고 저러는데 정말 재
미 있는 사람이야."
"잘 되었네. 너와 결혼하자는 사람도 생기고......"
"너 심통이 많이 났구나. 빈정대는 것을 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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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거푸 술잔을 비우며 둘이서 마신 소주병이 벌써 세 병이나 되
었지만 그의 광기 어린 눈을 훔쳐보며 나는 괜히 오금이 저려 옴
을 느꼈다.
"아줌마! 여기 얼마에요?"
그런 분위기가 너무 싫어서 나 혼자만이라도 벗어나고 싶다는 생
각이 들어 술에 취해서인지 고개를 떨군 말 없는 그를 남겨 두고
11시가 조금 넘어 거리로 나섰다.
집까지는 걸어서 15분 거리이고 큰길가이니 안심된다 싶어 노빈
의 존재를 애써 지운 채 집으로 향했다. 사실 노빈은 민우가 떠
난 후 내가 고통에 몸 져 누웠을 때 내 곁을 지켜 주던 유일한
친구였지만 오래 전에 사랑한다는 감정은 이미 정리 된 상태였고,
그를 친구 이상으로 생각해 본적이 없었다. 더욱이 그의 장래를
생각해서라도 좋은 신부감을 만나 결혼해 주었으면 하고 바라던
터였다.
"내일 혜림이를 만나 봐야지."
내가 노빈을 도와 줄 수 있는 길은 그것 밖에 없는 듯 싶었다.
눈길 한 번 주지 않던 포장마차에서의 노빈이 자꾸 눈에 밟혀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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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가고 싶었지만 나이가 27살이니 알아서 하겠지 생각하면서
도 지난 2년 동안 내 주변을 맴돌던 그의 슬픈 얼굴이 지워지지
않았다.
주말은 대체로 그랬지만 오전 10쯤이면 손님들로 가게가 붐비기
시작했고 요즈음 들어 비빔밥과 우동, 만두국을 추가하면서 "명
문 실내포장마차" 간판을 내리고, 시대의 흐름에 맞추어 "세종분
식"이라는 간판을 내 달면서 장사는 날로 번창하는 듯 싶었다.
아빠가 새벽에 장을 보아 주시고 주방은 나와 은미가 꾸려 나갔
는데 주말이면 은경이와 가끔은 오창훈씨가 합세를 해주었다.
오창훈은 넉살도 좋아 가게를 들어서면서부터 대뜸 "누님! 은미
씨! 인간 오창훈이 왔습니다. 심부름 할 것이 있으면 언제든지 말
씀 하십시오."하고 큰소리쳤지만 정작 그는 한쪽 귀퉁이에 앉아
은경이만 뚫어져라 바라 볼뿐 손도 까딱 하지 않았다.
"창훈씨! 은경이 보러 왔나요?"
"어이구 어찌 그런 섭섭한 말씀을.... 저는 누님 뵈러 왔습니다.
우선 매상을 좀 올려야 하니, 은경아! 오라버니 주문 받아라."
은경이를 마음에 두고 있는 듯 싶었는데 꼭 주말에만 은경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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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게에 올 만한 시간에 맞춰 함께 운동하는 친구들과 우르르 몰
려 들어서는 질펀하게 저녁을 해결하며 매상을 올려 주던 그였기
에 그가 나타나면 나와 은미는 무척 바쁜 시간을 보내야 했다.
하긴 은경이 나이가 23세을 꽉 채운 때였으니 여자나이로 적은
나이는 아니었지만 정작 그 당시 은경이는 오창훈보다 함께 은행
에 다니는 김우철씨를 좋아하고 있었는데 언젠가 함께 가게로 온
김우철씨는 한눈에 보아도 정말 괜찮아 보이는 사람으로 은경이
를 무척 아끼는 모습이 믿음직스러워 보인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연히 창훈에 대한 은경이의 태도가 쌀쌀맞아지기 시작 했고,
그의 가게 출입이 더 잦아지는가 싶더니 운동선수답게 창훈의
끈질긴 구애가 시작되면서 은경이는 적지 않은 혼란을 겪고 있는
것 같았다.
"언니! 시집 안 걸꺼유?"
느닷없이 은경이가 내게 물어 온 질문이었다.
"너 생각하고 있는 사람이 있구나?"
"아니 언니가 아직인데 내가 무슨 ..... 그냥 해 본 말이에요."
"은희도 시집을 가서 잘 살고 있고, 나는 결혼 할 생각이 없는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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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이니 당연히 네가 가는 것이 마땅한 일인데, 그러지 말고 언
니에게 속 시원하게 털어놓고 이야기 해 보렴."
망설이는 듯한 은경이가 시원스런 성격답게 자기의 생각을 털어
놓기 시작 했다.
"언니! 두 남자 모두 놓치고 싶질 않으니 어쩌면 좋아요? 우철씨
는 언니가 보아서 알겠지만 귀족 같은 사람이에요. 집안도 좋고
장래도 안정되어 있는 그 사람이 어제 청혼을 해 왔어요.
점심시간에 친구들과 직장동료들을 음식점으로 초대해서는 내게
한마디 언질도 없이 아주 정중하게 '저는 조은경양에게 오늘 청
혼을 하려 합니다. 선후배님들께서 제가 원하는 일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지켜 봐주시고 후원해 주시기 바랍니다.' 하는 거예요.
순간 나는 당황하여 자리를 피하고 싶었지만 선후배 직장 동료
들과 친구들 앞에서 그렇게 하면 실례이다 싶어 답례의 말을 하
라는 동료들의 성화에 얼떨결에 자리에서 일어나게 되었어요.
"저 조은경은 김우철님을 선배로써 존경합니다.
오늘 처음 아무런 예고 없이 이런 말을 듣게 되어 너무도 뜻밖
입니다. 좀 더 시간을 가지고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그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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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사람의 감정이 묘한 것인지 그 날 이후로 김우철씨가 갑자
기 보기 싫어졌어요. 내가 너무 일방적으로 당했다는 생각이 들
어서 인지 그 런 일을 독단적으로 처리하는 우철씨에게 서운함
이 지나쳐 말도 하기 싫더라구요."
"그래서 우철씨 하고는 그 이후로 만나지 않는 거니?"
"아니.... "
"너! 은경이 창훈씨를 사랑하는구나?"
머뭇거리던 은경이는 자신의 속마음을 들킨 양 흠칫 놀라는 표정
을 지었다.
"말해봐. 언니가 네 이야기를 들어줄께."
"사실 이제까지 창훈선배는 그냥 운동을 같이 한 선배라는 감정
이외에는 내게 특별한 감정이 없다고 생각했어요. 말이 선배이
지 그냥 친구같이 오빠 같이 지내는 편한 상대였기에 가끔 만나
면 우철씨와의 일들을 상의도 하고 우철씨가 청혼을 했다는 이
야기도 했어요.
그리고 나서 3일 후인가 갑자기 창훈선배가 은행에 나타나서는
점심을 하러 가는 나와 직장동료 일행을 막아서며 마치 납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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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는 사람 마냥 팔을 낚아채려 하였고, 직장 동료들이 그를 막
아 섰지만 언니도 알다시피 상대가 되질 안 되잖아요.
뒤 늦게 쫓아 온 우철씨와 함께 북창동에 있는 '그리그리'라는
카페로 갔어요."
"오 선배 너무 하신 것 아니에요? 도대체 왜 이러는 거에요?"
"당신이 김우철씨 입니까?"
"그렇습니다만 은경씨와는 어떻게 되는 사이시지요?"
"아! 이야기는 간단합니다. 나는 오창훈이라는 사람이고 조은경
과는 함께 운동을 한 사람입니다. 오늘 은경이에게 할 말이 있
었는데 마침 김우철씨도 함께 만났으니 차라리 잘된 듯 싶습니
다."
그 때 직원들의 신고를 받고 달려 온 경찰이 다가 왔다.
"이 사람입니까?"
"큰 문제가 없습니다. 그냥들 돌아가시지요."
김우철씨의 말을 들은 경찰이 내게도 물었어요.
"괜찮습니까? 아가씨?"
"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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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답도 크게 나오지 않더라구요.
"그래 하고픈 말씀이 어떤 것 입니까?"
"얼마 전 김형이 은경이에게 청혼을 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이제까지 모르고 살았지만 내가 은경이를 얼마나 사랑했는지를
알게 해주는 중요한 사건이었지요. 그것을 깨닫고 더 이상 지체
할 수 없어 이리로 달려 왔고 '은경아! 진정으로 너를 사랑한다.'
라고 청혼하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넋을 빼고 앉아 있는 두 사람을 아랑곳 않고 그 넓
은 카페가 떠나 갈 듯이 벌떡 일어나 두 팔 뻗어 하늘을 향해
벌리고는 "나! 오창훈은 조은경을 죽도록 사랑한다." 하며 만세
삼창을 하는 그에게 우철씨나 나나 아주 질려 버렸어요.
그리고는 우철씨에게 "김우철씨 나와 남자답게 신사답게 조은경
을 향해 도전해 봅시다. 두 사람의 청혼에 오직 은경이만이 대
답 할 수 있는 것일 테니 우리 함께 경쟁해 봅시다.'"
그렇게 된거예요. 언니!"
"그래 내가 아는 은경이는 결혼 조건 같은 것은 그리 중요하다고
여기지 않을 것 같은데 네 생각이 제일 중요한 것 아니겠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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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아직 결혼을 생각해 보지 않았어요. 단지 우철씨로부터 석 달
안에 결혼하자는 폭탄선언을 들었고, 창훈선배로부터는 언제든
지 내 일이라도 결혼하자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새삼 결혼을 하
기는 해야 하는 것인가? 누구를 택해야 하지? 하는 고민에 빠졌
어요.
우철씨는 여유있는 안정된 생활을 내게 줄 수 있는 데 반하여
창훈선배는 이번 대회가 끝나면 와싱톤으로 가서 태권도장을 개
척하겠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고생문이 훤 할 것 같고, 만에 하
나 창훈선배를 택한다면 나도 도복을 입고 태권도 도장 사범을
해야 하니 언니 생각만 해도 끔찍해요.
또 우철씨는 아파트와 자동차 그리고 모든 것을 준비할 테니 몸
만 자기에게 오면 된다고 하며 지난 토요일은 나를 테우고 성북
동 집을 구경시켜 주었어요.
언니! 솔직히 부담스럽더라구요.
그 큰 집에서 공주 같이 산다는 것을 생각해보고 그런 분위기에
내가 과연 어울리는 사람일까? 하는 불안감이 들었지만 그래도
정말 영화에서나 봄직한 훌륭한 매너의 그를 보면 마음이 이끌
림을 어쩔 수가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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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직장 동료나 선후배들이 나 더러 호박이 덩쿨채 굴러 왔다면
서 여간 부러워하지 않는 것도 우철씨를 생각하는 후한 마음으
로 작용하구요."
"은경이는 어려서부터 곧게 자라주더니 언니가 듣기만 해도 샘이
나는 사랑을 받고 있구나. 언니는 네가 참 자랑스럽다. 생각해
보면 오늘의 우리 집이 있기까지 은경이 너의 말 없는 노력이
나와 동생들, 아빠를 지켜 준 것을 언니는 늘 고맙게 생각한다."
은경이가 눈물을 뚝뚝 흘리며 내 품에 안겨 들었다.
"언니~ "
"은경아! 아무 말 하지 마라. 네 생애에서 가장 중요한 선택을 해
야 할 때인 같구나. 우리 집은 언니가 알아서 할 테니 아무 걱정
말고 후회하지 않을 선택을 하거라."
"언니 미안해."
당시 은경이는 나름대로 한 사람을 선택한 것처럼 느껴졌다.
단지 나에 대한 미안함과 걱정스러움으로 괴로워했던 것 같았다.
김포국제공항에 또 다른 이별이 기다리고 있었다. 28살의
나, 두 아이의 엄마인 은희와 제부 곽방근 그리고 4명의 동생들
이 아빠를 중심으로 은경이를 감싸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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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경아! 후회 없이 살아야 한다. 제부만 믿고 따라 나서는 아이
에요. 사랑해주시고 지켜 주세요."
"처형! 이 목숨 다하도록 사랑하겠다고 약속합니다. 저희가 성공
하고 돌아오는 모습을 꼭 지켜 봐 주세요."
다들 감정을 자제 할 나이가 되어선지 은주 언니가 떠날 때처럼
소란스럽지는 않았다.
제부 오창훈과 조은경은 조금 떨어진 곳 의자에 앉아 계시던 아
빠께로 가서 운동선수 부부답게 주위의 부러움을 살 큰 절을 하
였다.
"잘 부탁 하네."
요즈음 당료에 시달리는 초췌한 아빠의 모습에 은경은 울고 있었
고 시댁어른들께 인사를 마친 두 사람을 양가 가족들의 환송을
받으며 출국장으로 사라졌다.
열 사람이던 우리 8남매는 어머니를 여의고, 은주 언니와 은희,
은경이가 출가를, 은애는 기숙사 생활을 하니 집에 남은 사람은
아빠와 나, 은미, 은정이 막내 은수까지 반으로 줄었다.
집에 도착해서 아빠가 누우시도록 자리를 봐 드리고 은미와 서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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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 가게로 가면서 은경이가 우리 곁에 없는 것이 너무 허전하여
하늘 높이 떠나간 은경이의 씩씩한 모습이 머리에서 떠나질 않았
다.
동생을 보낸 슬픔도 잠시 토요일 오후여서 손님들이 몰리기 시작
하면서 은미와 나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다행이 노빈이 가
게에 들렀다가 홀 써빙을 맡아 주면서 한 숨을 돌리고 저녁 8시
가 넘어가자 한시름을 놓는 듯 싶었다.
"언니 아까 김대위님 왔다 가는 것 같던데....."
"응 나도 봤어. 어떤 할머니와 함께 있었던 것 같은데 금새 간 모
양이더라. 그나저나 오늘은 피곤하니 우리 10시까지만 하고 집
에 가서 맥주라도 한 잔씩 하고 자자."
나중에 선을 보게 했던 친척의 말로는 그 할머니가 시골집의 노
모로 김대위는 그 집 6남매 중 막내였는데 그 날 며느리감인 은
영이를 보러 왔다가 28살 나이보다 더 들어 보이는 헌 색시 같
다며 뒤도 보지 않고 그냥 내려갔다는 것을 전해 듣고 김대위나
나를 위해서 정말 다행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김대위는 삼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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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서 술이 한 잔 된 얼굴로 가게를 찾아와서는 장미꽃다발을
내게 전해 주며 "은영씨 잠시나마 당신을 좋아 했었습니다. 좋은
짝을 만나 행복하시길 빕니다."라는 말을 남기고 김대위 사건은
일단락되었다.
보쌈집에 들러 포장을 하고 가게에서 시원한 맥주를 준비해서 집
에 들어섰지만 인기척이 없는 것이 썰렁한 느낌마저 들었다.
주무시는지 내다보시지도 않는 아빠가 궁금하여 노크를 하고 문
을 열자 담배연기 자욱한 안방에서 아빠는 TV볼륨을 한껏 높이
고 아무 생각이 없으셔 보였다.
"아빠 저 다녀왔어요."
"음 그래. 애 썼다. 어서 씻고 자거라."
조금은 멋쩍어 하며 마루로 나와 동생들의 방으로 향했다.
온 집안을 주무르던 호쾌한 은경이의 빈자리가 너무 컷던지 동생
들은 시종 말없이 방에서 꼼짝하려 들지 않았다.
"은정아! 거실에다가 신문지 깔고 이것들 좀 펴놔라."
은정이가 봉지를 받아 자리를 보는 사이 은미와 나는 더운 물 샤
워로 피로를 풀면서 언제나 우리 곁에서 웃음을 가져다 준 믿음
직스러운 은경이가 너무 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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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정아! 아빠 모시고 나오고, 은미는 막내를 데리고 나와라."
보쌈이 펼쳐진 거실에 맥주잔과 서먹한 가족들이 모여 앉았다.
"아빠! 우리 집 기둥이 빠져나가 서운 하시지요? 그래도 은경이
는 씩씩하니까 미국에 가서도 잘 살 거예요. 은경이를 위해 축
복을 빌어 주는 의미로 건배 하시지요."
그 날은 국민학교 5학년이던 막내까지 빠짐없이 맥주잔을 들고
부라보를 외쳤다.
"띵동 띵동"
"이 시간에 우리 집에 올 사람이 없는데...... 누구세요?"
생각지도 않은 노빈이 소주와 삼겹살을 사 들고 현관으로 들어서
며 기숙사에 있어야 할 은애가 그 곁에 함께 있었다.
"아빠! 언니! 이젠 제가 3번째 서열이라는 것이 마음에 걸려 은경
언니 자리를 오늘이라도 메우려고 집에 왔어요."
벌써 맥주 몇 잔이 돌았던 우리 가족은 기쁜 마음으로 은애의 기
특함에 박수를 쳐 주었다.
"은애만 사람이고 나는 왜 물어 보지도 않냐?"
노빈이 삐죽대며 아빠 곁으로 가서는"아버님! 벌써 딸을 셋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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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의셨네요. 제가 군에 갈 때 아버님이 따라 주시던 소주와 용돈
이 생각나서 오늘은 아버님께 제가 술을 한 잔 올리려고 이렇게
왔습니다."하고 너스레를 떨었다.
갑자기 온 집안이 꽉 찬 느낌이 들었다.
휴대용 가스렌지를 거실에 깐 신문지 바닥 위에 놓고 삼겹살을
굽기 시작 하면서 거실 창을 활짝 열어 제친 후 아빠와 노빈의
소주잔 부딛치는 것으로 파티가 시작되면서 예전 같지 않은 주량
에 과음을 하신다 싶은 아빠를 보며 그렇게라도 은경이와의 이별
에 슬픔을 달랠 수 있다면 행복이다 싶었다.
결국 그 날은 술자리가 자정을 훌쩍 넘기고 통행금지가 되 버린
탓에 노빈은 딸 부자집 아빠 방에서 하루를 묵었고 은정이가 콩
나물국으로 아침을 차려 놓고 학교에 간다며 모두를 깨워 놓는
통에 부시시한 얼굴로 거실에 모여 앉게 되었다.
아직도 소주 냄새가 나는 노빈이 충혈된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은영아! 너 진짜 화장 안 하는구나? 어제 본 얼굴과 아침 얼굴
이 똑 같으니 말이다."하며 이죽거렸다.
"왠 아침부터 화장 타령이냐? " 하려다가 미소로 답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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콩나물국에 고추가루를 조금씩 풀어 파를 조금씩 얹어 아침을 든
후 동생湧?학교로 출발을 하고 집에는 노빈과 은미 그리고 내
가 남아 커피를 마시며 한가한 아침을 맞고 있었다.
"노빈아! 혜림이는 어느 학교 다니니?"
"왜?"
"얼마 전에 혜림이하고 끝냈다며? 아직 다시 만나지 않았니?"
"그렇게 되었다. 너도 알다시피 헤어지는 것을 즐기는 내가 아니
니 다시 만나 사귀기도 어렵겠지."
"내가 보기에는 혜림이가 아깝더라. 야무져 보이고 좋은 집안에서
가정교육을 받은 것 같고, 아주 마음에 드는 것은 나름대로의
자신감이 돋보이는 보기 드문 여자 같던데..... 내가 오늘 혜림이
좀 만나자. 학교하고 과, 전화번호 좀 가르쳐 주라."
비릿한 눈으로 올려다보던 노빈이 빈정거리며 답했다.
"경희대 국문과 3학년...... 행여 내 이야길랑 말아라."
아침을 먹는 듯 마는 듯 노빈은 "나 간다."란 끝말을 남기고 사
라져 버렸다.
은미에게 가게를 보라고 하고 전화통화가 된 혜림이를 청량리 로
터리 다방에서 잠깐 만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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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림씨 노빈이 하고 싸웠어요?"
노빈에 대해서 화가 많이 났는지 혜림의 싸늘한 태도가 마음에
걸렸지만 내가 두 사람 사이에 문제가 되어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어 마련한 자리였다.
"두번째 만남이네요. 노빈씨에 대한 이야기라면 나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어요."
"글쎄 결국은 그 이야기겠지만 얼마 전 노빈이가 나를 찾아와 혜
림씨와 헤어졌다며 내게 술을 사 달라고 한 적이 있어요. 이 나
이까지 살면서 나는 그 친구에게 너무 많은 신세를 지고 살아서
인지 선뜻 거절 할 수 있는 입장도 아니었고 오랜 세월동안 친
구로써 지내 오던 터라 무심히 약혼단계까지 간 두 사람이 애정
싸움을 했겠거니 생각하며 헤어진 적이 있지요."
"무슨 말씀을 하고 싶으신 거죠? 그 사람 이야기라면 더 이상 할
이야기가 없는데...."
그녀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려 하였다.
"잠깐만 혜림씨! 뭔가 오해가 있는 듯 한데 잠깐만이요."
카운터로 향하던 그녀는 가던 길을 되돌아와 이런 말을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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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에게 화가 난 것이 아니에요. 또 질투를 자제 할 줄도 모르
는 교양 없는 사람은 더욱 아니구요. 그렇지만 약혼을 앞둔 자기
여자에게 자신이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이라고 한
다면 아무리 사랑 한다고, 아무리 눈이 멀어도 어떻게 그에게
내 인생을 맡길 수 있겠어요.
난 이미 하노빈이라는 사람을 잊기로 했어요. 마지막으로 그런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은 정말 행복하겠다는 부러움이 남아
요. 그럼 먼저 갈께요."
전혀 예상치 못한 혜림의 이야기를 듣고 당혹감에 붉어지는 얼굴
을 감출 수 없었지만 돌아서 걷는 그녀에게 외치듯 소리 쳤다.
"혜림씨! 나는 노빈을 절대로 사랑 할 자격이 없는 사람이예요.
또 나는 결코 그를 사랑하지 않아요."
멈칫거리던 혜림의 발걸음이 다시금 빨라지며 시야를 벗어났고
벌겋게 상기 된 바보스럽고 원망스러운 나 조은영만 썰렁한 아침
다방에 남아 있었다.
점심 장사를 시작 했지만 아침의 충격에서 벗어 날 수 없었다.
은미가 눈치를 살피며 함께 음식을 만들고 있었지만 그 날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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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딴 사람처럼 행동하고 있었고, 노빈이 가게에 나타나던 오
후에는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을 수가 없었다.
점심 피크 타임이 지나면서 한숨을 돌리고 물 잔을 마주 한 채
며칠째 고민 속에 살았는지, 철학과 졸업반이라선지, 꺼칠한 수
염과 지저분한 얼굴이 자신의 마음을 보여 주는 것 같은 노빈과
마주 앉았다.
"노빈아! 너답지 않게 나이 살 들어 방황하고 싶니? 아주 머리
깍고 산으로 들어가지 그랬어. "
"............."
"혜림이에게로 돌아가! 너에게 아주 잘 어울리는 짝이야."
작은 배낭을 둘러메며 그냥 뚫어질 듯 바라보던 퀭한 눈의 노빈
은 출입문 쪽으로 뒷걸음치면서 오른손을 뻗어 내저으며 뭐라고
말을 할 듯 하다가 그대로 달아나 버렸다.
그의 모습을 보며 당황 했다기 보다는 그의 슬픈 두 눈동자가 뇌
리에 박혀 가슴이 답답한 며칠을 보내며, 나는 절대로 그를 친구
이상으로 생각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면서 이제는 친구 입장에서
내가 그를 도와야 할 때인 것을 느꼈지만, 그렇게 떠난 그는 반
년이 지난 다음 해 봄이 되어도 소식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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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동안 혜림이 몇 차례 가게로 와서 그의 행방을 물은 적이 있
었지만 졸업반이던 그는 한마디 말도 없이 행적을 감추었고, 거
의 매일 가게에 들러 아들의 소식을 묻는 노빈의 엄마를 뵙는 것
도 하루의 일과처럼 되어 버렸다.
"은영아!"
"어머니 오셨어요? "
"노빈이 소식 없었니? "
"예. 어머니! 아직이요."
무슨 말을 하려다가 그의 어머니는 말문을 닫고 내 손을 꼭 잡고
"은영아! 노빈이 보거든 원하는 대로 다해 줄 테니 제발 집에 연
좀 하라고 해라."하시며 가게를 나가셨다.
그 동안 은애가 졸업반으로 교생실습을 나가면서 기숙사에
서 집으로 돌아 왔고, 미국으로 간 은경이는 제부와 함께 워싱톤
에 도장을 차리고 자신도 여사범이 되어 도장을 함께 운영하고
있으며, 처음이라 어려움이 있지만 성공 할 수 있다는 희망이 담
긴 편지를 보내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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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 12년차인 은주 언니는 샌프란시스코에서 잡화상을 열어 이
젠 제법 자리도 잡았고, 벌써 큰 애인 성재가 11살인데 처음에
살기가 어려워 애를 하나 밖에 낳지 않은 것이 후회스러워 둘째
를 보려고 준비한다는 이야기를 해 왔다.
한 달에 한 번씩은 꼭 친정나들이를 해서 아빠께 용돈을 드리고
가는 두 아이의 엄마인 은희는 미술선생님을 계속하고 있었고,
제부는 직장에 꾸준히 다니고 있으니 더 바랄 것이 없었다.
아빠만 당료로 고생하시는 일을 빼고는 모처럼 찾아 든 행복한
시절, 우리 집에 남아 있는 가족은 29살이 된 나와 22살의 은애,
21살의 은미, 18살의 은정이와 국민학교 6학년이 된 막내가 있
었다.
은애는 같은 교대에 다니는 동갑내기와 연애를 하는 것 같았고,
은미는 아직 크게 눈에 띄지는 않지만 전화통을 붙들고 이야기
하는 것을 들어보면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 것 같았다.
그런 우리 가족은 의식주 걱정에서 엄마가 돌아가신 후 8년만인
작년부터는 차츰 저축을 시작할 수 있었고 아버지 명의로 중고
차를 구입하여 아침시장을 보면서 사람이 다 그런 것인지는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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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일 밖에 모르던 우리 가족이 첫째와 셋째 주 일요일은 가게를
쉬기로 했다.
처음에는 너무 어색하여 집안에 틀어 박혀 잠을 자는 것으로 하
루를 보냈지만 차츰 시간이 지나면서 은미는 연애를 본격적으로
시작하였는지, 일요일 아침이면 영락없이 곱게 차려 입고 외출을
해서는 늦은 밤이 되어야 돌아왔다.
가게 일을 하면서 대충하고 살았던 살림을 부엌부터 정리하며 필
요 없는 묵은 살림을 하나 둘씩 쓰레기봉투에 담아 나갔다.
엄마의 손때가 묻은 그릇들이었지만 이제는 그만 잊고 살아야 한
다는 생각에 아빠의 동의도 없이 정리하면서 고등학교를 갓 졸업
하던 19살 내 모습에서 29살이 된 오늘을 조용히 되돌아보며
바람처럼 스쳐간 10년 세월이 운명처럼 느껴졌다. 부엌 정리를
끝나며 나온 버려야 할 물건들을 엄마 없이 자란 아이인 막내가
제법 사내 티를 내며 쓰레기장으로 운반했다.
가여운 동생 !
은수는 엄마의 얼굴을 사진으로만 보았지 어려서는 내 품에서,조
금 커서는 은경 품에서 엄마의 정을 모르고 자랐다는 생각에 미
치자 나도 모르게 굵은 눈물방울이 흘러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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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나! 왜 울어? 왜 그래? 누나!"
은수가 내 손을 잡으며 달래려 들자 그만 은수를 껴안으며 울음
보가 터져 버렸다.
"응 누나 안 울어.. 은수야! 누나 안 울어."
녀석은 엄마의 젖도 제대로 얻어먹지 못한 채 그저 먹은 것이라
고는 모자라는 우유를 대신해 밥을 끓여 으깨 먹인 것이 전부인
데, 그것도 우유 살 돈이 넉넉하지 못해 일찍 우유를 끊어야 했
고, 엄마가 가신 후 며칠 밤낮을 엄마를 찾으며 내 등에 업혀
울다가 잠들곤 했는데, 은수의 머리를 쓰다듬고 볼을 비비며 좀
더 잘해 주지 못한 것이 미안했지만 그래도 엄마 없이 누나들 손
에 자라면서 크게 아프지 않고, 말썽 한 번 없이 자라 준 착한
막내가 그 날따라 그렇게 대견스러울 수 없었다.
부엌 정리가 끝이 나자 안방의 낡은 장롱으로 자리를 옮겼다.
어려서부터 낯익은 옷가지며 살림들, 이제는 그 누구도 쓰지 않
을 내가 태어났을 즈음 물건들이 겹겹이 쌓여 있었다. 하기는
용두동 집에서 20년을 살았으니 고스라니 아빠 엄마의 신혼살림
이 이 집으로 이사 오면서 정리 되었을 텐데 아빠는 아직도 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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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함께 사시는지 엄마가 쓰시던 물건 하나라도 버리지 못하게
하셨다.
오늘은 마침 아빠가 옛 직장 동료들과 1박2일로 온천 나들이를
하시는 날로 부엌에 손을 댄 김에 아예 묵은 살림을 과감하게 정
리 해 버린다는 생각으로 나섰고, 아빠께 꾸중을 들어도 꼭 해야
겠다는 생각이 든 것은 38평의 우리 집에 들어서면 무슨 짐이 그
리 많고 지저분한지 가만히 있어도 짐에 눌려 숨이 막히는 것 같
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누나! 아빠가 엄마 물건 손대시면 싫어하셔."
은수가 걱정을 하고 나섰지만 기회가 자주 있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에 아빠 엄마의 낡은 옷부터 묵은 이불까지 과감하게 버리기
시작 했고, 은정이와 막내가 버리는 물건들을 쓰레기장으로 날랐
다.
아침부터 설치기 시작한 일은 버리는 물건들로 거실을 채워 갔고
덕분에 획堧?비롯한 건너방, 작은방이 한 결 단출해졌다.
마지막으로 우리 집 보물들이 숨어 있을 바랜다 창고로 가서 정
리를 시작하면서 꽤나 공부를 잘했던 내 국민학교 성적표며 상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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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이 나오더니만 아빠의 입사 사령장과 낡은 옛 날 구두, 엄마의
보따리, 제사를 지낼 때 쓰는 제기들, 그러다가 빨간색 비닐끈으
로 묶인 자그마한 박스 하나를 발견하게 되고 예견된 일처럼 조
심스럽게 두껑을 열어 보면서 숨이 멈추는 것 같은 아픔을 느꼈
다.
7년이란 세월을 가슴에 품고 살면서 잊고 싶어서, 숨고 싶어서,
애써 찾지 않았던 잊을 수 없는 물건이 내 눈앞에 나타나면서 오
늘의 일들이 마치 이것을 찾기 위한 나의 몸부림이 아니었나 싶
을 정도로 나는 전율하고 있었다.
태엽을 조심스럽게 감고 상자의 뚜껑을 열자 오래 전부터 익숙해
져 있던 "에델바이스"의 튕기는 듯한 쇳소리 리듬이 가슴에 파고
드는 듯 싶었고, 상자 속에 넣어 둔 빛 바랜 한 장의 편지를 꺼
내 들면서 "성민영"과 "성민우"의 모습이 함께 나를 향해 달려오
는 것만 같아 나만의 비밀인양 가슴에 품은 채 방으로 숨듯이 달
려 갔다.
"언니! 정리 다 끝난 거야?"
"남은 것은 네가 마무리를 지어라. 언니는 볼 일이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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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손으로 감싸 안은 상자를 가슴에 품고 몸을 앞뒤로 흔들며
슬픔보다는 그들을 드디어 찾았다는데 나는 행복해 하고 있었던
것 같다.
저녁때가 다 되었지만 오랜만에 화장품을 바르고 언제 샀을지 모
를 외출복으로 갈아입고서 현관을 나서 그를 처음 만났던 "천둥
과 번개"로 갔다. 세월이 흘러서인지 그 음악다방이 있던 자리엔
수도학원이 자리잡고 있었고 망설이며 주변을 서성이다가 아빠와
함께 포장마차를 하던 자리 뒷 편으로 제과점 가게가 보였다.
"여기 빵 천원어치와 우유 한잔 주세요."
거리에 비가 오는 듯 싶더니 금새 날이 어둠 속에 숨어들며 유
리창 밖에 빗물들이 소리내어 아우성 것들을 바라보며 우유 한
모금을 입에 물고 눈을 감으며 "민우" 그 사람이 몹시 그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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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민우씨!
오랜 시간이 지났지요?
철부지였던 시절이 지나며 사랑에 눈을 뜨게 했던 당신
이 지난 세월 동안 원망스러울 때도 있었지만 내게 남겨
준 민영이를 지켜 주지 못한 것이 나이가 들어가며 이렇
게 후회스럽고 죄스러울 수가 없답니다.
우리 아이는 엄마 잘못으로 세상을 너무 일찍 보아야
했고 그것도 모자라 엄마의 품에 한 번도 안겨 보지 못
하고 나도 모르는 낯 선 곳으로 떠나 버리고 말았어요.
당신의 곁으로 가야겠다고 모진 마음을 한두 번 먹은 것
도 아니었지만 또 다른 현실이 나를 붙들어, 이도 저도
선택의 여지가 없던 나는 정신병원에 신세를 지기도 했
고, 가능하면 의식적으로 자신을 잊고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기에 눈을 뜨고 있는 동안 만큼은 바쁘게 살아가
면서 당신과 민영이를 떠 올리지 않으려고 노력했지요.
그렇지만 이젠 걱정하지 말아요.
몇 년전 병원을 나서던 날, 아빠와 동생들은 나를 방에
가두고 요강만을 넣어 주며 위험한 사람 취급을 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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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나는 미안함과 죄스러움에 그저 살고 싶지 않았던
마음이었을 뿐 정말 미쳤었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민우씨! 미친 사람이 얼마나 편한 것인지 아세요?
더러운 옷에 씻지 않아 냄새가 나도 되고, 혼자서 통곡
을 하다가 갑자기 깔깔대고 웃어도 이상할 것이 없으며,
아무에게나 침을 뱉어도 사람들이 피해만 가지요.
그 때 생각이 나서 가끔은 길거리에 세상에서 제일 편
한 모습으로 자리를 잡고 정신병자가 되어 자유로워
지고 싶기도 하지만 이젠 그런 짓을 하기에는 나이가
너무 들어 버렸나 봐요.
맞아요!
민우씨를 만나던 때만 해도 길을 가던 사람들이 돌아
보는 여자였는데 거짓 같겠지만 나는 거울을 보고 화
장을 해 본 기억이 언제인지도 몰라요.
속 모르는 남들은 멋도 안 부리고 그저 일 밖에 모르
는 맏며느리 감이라고 하며 선을 보라고 귀찮게 하더
니만 이제는 퉁퉁한 아줌마 같아 보이는지 그런 일도
없어졌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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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자신을 꾸미는 것에서 탈피하면 얼마나 편안
한지 그것을 모르나 봐요. 또 거울을 보지 않으면 자
신의 모습에 대해서 관대해진다는 것을 모르나 봐요.
그런 면에서 나는 행복한 여자이기도 하구요.
찾지 말아야지 하던 당신의 보석상자와 편지 한 장을
오늘 이렇게 내 품에 안고 있어요. 아빠와 은경이가
곱게 싸서 바란다 창고 깊숙이 숨겨 놓았던 것인데
나는 상자를 보자마자 당신의 숨결을 느낄 수 있었고
받쳐 든 두 손은 벌 벌 떨고만 있었지요.
숨이 막혀 죽어 버릴 줄 알았는데, 눈물이 쏟아져 버릴
줄 알았는데 행복한 미소가 나를 기쁘게 하더라구요.
세월이 약이라고 하더니 나이를 먹어 가며 아픈 과거를
추억으로 새길 줄 아는 뻔뻔스러운 나이가 되었나 봐요.
음~~ 민영아! 이리로 와서 엄마에게 안겨 보렴!
아빠를 꼭 닮아 키도 크고 너무도 이쁘구나!
민영아! 어디 아픈 곳은 없니?
벌써 6살 숙녀구나.
엄마가 잘못했어! 가지마~
엄마야! 민영아! 엄마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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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줌마! 그만 문 닫을 시간인데요."
손수건을 꺼내 눈가를 훔치며 민영이가 아빠와 함께 가 버린 어
두운 거리에 눈을 떼지 못한 채 뿌연 유리창을 수건으로 닦으며
혹시나 하는 바람으로 그들을 찾고 있었다.
두 귀를 손으로 막고 있었지만 에델바이스는 마법의 소리인양 귓
가에 가득했고 오랜만에 나는 또 낯 선 사람이 되어 늦은 저녁
시간에 빗속에 거리가 훤히 보이는 빵집에 앉아 있었다.
"빵! 남은 것 싸주세요."
종업원은 손 하나 대지 않은 빵을 봉지에 담으며 나를 또 한 번
쳐다보았다.
"아! 빵을 좀 넉넉히 더 싸서 주세요."
집에 있는 아빠와 동생들에게 간식으로 사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우산 없이 나선 길이었지만 보석함과 빵 봉지를 가슴에 품고 집
을 향해 걸으며 오랜만에 나를 느낄 수 있는, 내 껍데기에 숨어
살았던 나 자신을 찾아내고 그것이 너무 서럽고 힘들어 빗물인지
눈물인지 모를 슬픔에 마구 흐느꼈다.
"그래 오늘만큼은 이렇게 하고 싶어. 내일 해 뜰 때까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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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설동에서 우리 집 까지는 걸어서 20분이면 족 했다. 10시
가 조금 넘은 거리는 인적이 뜸했고 빗속에 달리는 차들의 불빛
과 빗방울로 가득찬 빗속의 거리, 그냥 이대로 보고픈 사람들을
만나러 가고 싶다는 생각도 있었지만 그렇게 하기엔 이제까지 아
무의미 없이, 아니 우리가족을 지킨 것 외에는 이룬 것이 없는
내 인생이 가엾다는 생각도 들었다. ]
누군가 나에게 우산을 씌워 주는 것을 알았지만 "괜한 친절이다."
생각하며 "아직 내게 우산을 씌워 주는 사람이 다 있다." 싶으면
서도 고맙다던가, 어쨌든 뭐라고 말을 해야 했지만 그 날 나는
나 자신 이외는 느끼고 싶지 않았기에 그가 곁으로 다가와 어깨
를 가볍게 껴안을 때까지 거의 그를 무시 한 채 걷고 있었다.
어깨를 감싼 팔을 살며시 걷어 내리며 "너도 나만큼 제 정신이
아니구나."하고 싶었지만 가치 없는 일이라 여기며 빠른 걸음으로
빗속을 나아갔다.
집을 향해 마구 달렸지만 얼마 가지 못해 뒤쫓아 온 그자의 품에
허리가 휘도록 안기게 되면서, 옛 일들이 되살아나 나도 모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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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명과 함께 진저리를 치며 무어라고 소리치는 그자를 향해 거세
게 대항 했지만 두 손이 잡히면서, 도와 달라는 비명소리가 무색
하게 그 사내의 거친 포옹을 받아야 했다.
"그래. 난 원래 정숙한 여자는 아니었으니까."
그와 헤어 진 것은 아파트 정문에서였다. 둘이는 눈으로 인
사를 주고 받았지만 왜 이런 모습으로 오늘 다시 만나야만 하는
가를 생각하다가 생각 자체의 어리석음에 실없이 미소 지으며
집으로 돌아 왔다.
"언니! 이렇게 늦게까지 연락도 없으면 어떻게~해."
"늦었구나." 아빠가 한 말씀 거드셨다.
자정에서 15분이 모자랐으니 할 말도 없고 해서 화가 단단히 난
은정이에게 가방에 넣어 두었던 젖은 빵 봉지를 내밀고 바쁘게
목욕탕으로 들어서며 어색한 자리를 모면했다.
더운물에 몸을 담그며 이마에 굵은 땀방울이 맺히면서 천둥과 번
개, 빵집, 빗속에 우산을 씌워 준 사람, 그 사람과의 일들.....
어떻게 집으로 돌아 왔는지 기억하고 싶지 않았지만 그와의 짧은
만남을 조금은 남겨 두고 싶다는 생각에 두 다리를 벌리고 코 밑
까지 물 속에 숨긴 채 두 눈을 깊게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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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발이 유행하던 때이기도 했지만 그는 정말 무슨 도사인양 머리
를 산발하여 길렀고, 수염은 염소마냥 턱 쪽에만 기른 채 스님들
이 입는 회색장삼에 흰 고무신, 그런 모습으로 어깨를 껴안으려
들었으니 정말 나로써는 황당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의 품에서 벗어나 "사람 살려"를 외치며 빼앗은 우산대로 사정
없이 그자를 내리쳤다. 마치 분풀이라도 하듯 있는 힘을 다해 울
부 짖으며 가슴속 울분을 우산대에 담아 속이 후련하도록 휘두르
자 잠시 후 그자는 머리를 감싸 안고 길바닥에 주저앉았지만 울
고 있던 나는 우산대를 놓지 않았다.
"은영아! 그만 해."
어둠 속에 빗줄기는 더해가고 이미 젖어버린 그와 나는 차량만이
오가는 거리에 앉아 한 동안 서로 말이 없었다.
손수건으로 그의 머리에서 흐르는 피를 닥아 주었다.
"바보 같이~ 왜 진작에 말하지 그렇게 맞고만 있었어?"
빗속에 그는 웃고 있었지만 예전과 다른 너무 슬프고 초라한 모
습이었다.
가끔 지나가는 행인들이 우리를 곱지 않게 보는 시선을 느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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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젖어버린 온 몸에 우산을 받쳐 들고 눈을 감고도 함께 걸을
수 있는 용두동 길을 스스럼없는 친구와 함께 걸을 수 있어 좋
다고 생각했다.
"어디서 무엇하며 사는 거야? 꼭 산속에서 도를 닦는 도사 폼이
다. 노빈아! 무게 그만 잡고 말 좀 해 봐라."
크게 변화없는 얼굴빛을 살피며 낯설게 찾아 온 소꼽친구의 반
가움에 어둠 속으로만 다가서던 마음이 따뜻해져 옴을 느꼈다.
"노빈아! 우산 치워."
그에게 다가가 그의 볼을 잡아당기며 웃겨 보려는 내게 허무한
노빈의 미소가 슬픈 눈을 하고 내게 쏟아져 왔다.
"그런 눈으로 날 보지마. 보지 말라니깐!"
그의 눈빛을 벗어나 빗속으로 내달렸다.
"그래 그냥 이대로 아무 생각 없이 사는 거야. 이미 내겐 남들처
럼 평범한 사랑은 없는 것이고, 마지막 날까지 가슴에 담고 갈
민우와 민영이 그리고 홀로 남은 나 조은영만 있는 거야."
19살의 눈 오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한 정릉천변 다리에 다다라
나를 업고 달리는 노빈과 심술을 부리며 다리 난간에 담배를 피
워 문 채 비양 거리 던 민우가 함께 나의 발목을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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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보면 내게는 더없는 아름답고 귀한 시간이었는데....개천 바
닥엔 제법 많은 물이 흐르고 있었고, 이 개울이 흐르는 곳에서
열아홉 청춘에서부터 십 년 후의 내 모든 모습을 함께 했다는 생
각들을 떠올리며 민우가 장난스레 기대어 섰던 바로 그 자리에서
움직이기 싫었다.
"너무 늦었다. 그만 가자."
오늘 그를 만나 처음 그의 목소리를 듣는 듯 싶었다.
그가 이끄는 대로 끌려가며 나는 민우의 웃음이 가득한 다리난간
을 시선에서 놓치 않았다.
"이젠 잊을 만도 한데 아직 시간이 더 필요하니?"
서럽게 흐르던 모정과 애정의 눈물은 그나마 얼굴에 가득 붓는
빗방울이 있어 한결 자유로웠다.
"또 볼 수 있겠니?"
"네가 원하면 나는 언제나 네 곁에 있으니 또 만날 수 있겠지."
"니네 엄마가 찾아. 그리고 해 달라는 대로 다 해 주신데. 그만
속 태우고 전화라도 드려"
"나!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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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나를 홀로 남겨 두고 어둡고 칙칙한 거리로 사라져 갔다.
6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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