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서글픈 운명
그렇게 22살의 봄을 맞으며 나는 지하철역 출입구 근처에
가게를 얻어 장사를 시작했다. 벌써 졸업반이 된 민우나 방근 ,
수아를 보며 대학을 늦게나마 다니고 싶었지만 동생들의 학비와
아직 정리 되지 않은 빚이 있었고 어린 동생들을 가까이서 돌봐
야 한다는 생각에서였다.
"대학에 가고 싶으면 은수가 중학교 다닐 때쯤 하지. 뭐! 그럼 내
나이가 몇이지? 그렇지? 9년 후! 후후~ 31살에 필요하면 시작
하게 되겠네. 후후~"
아빠는 그 해 53세이셨으니 정년까지는 2년이 남았었다. 은희는
3학년이 되어 자신의 꿈대로 미술선생이 되겠다며 열심히 노력하
고 있었고, 학비는 장학금을 받아 해결하면서 화실 아르바이트를
해서 생활비를 보태고 남은 돈으로 용돈을 쓰는 듯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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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남자 친구 있니?"하고 물으면 내숭을 떨며 "절대 없다."고 앙
큼을 떨지만 가끔 전화를 하는 것을 들으면 "오빠! 오빠!"하는 남
자 친구가 있는 것 같은 데 그럴 때 "얘! 니 남자 친구는 '오빠'
니?"라고 놀리면 은희는 아주 골이 난 표정으로 "언니 시집가기
전에는 절대로 안 갈 테니 걱정 말어!" 하며 쏘아 붙이곤 했다.
은경이는 공부보다 직장을 갖고 돈을 많이 벌어보고 싶다고 하
더니 상고로 진학해서 그 해 고3이 되었다.
자그마한 은희와는 달리 168cm의 늘씬한 키에 중2때부터 학교
태권도부에 들어 가끔 대회에 나가 트로피를 받아들고 자기 방
에 보란 듯 진열 했는데, 그런 날이면 기어이 아빠를 모시고 온
가족이 중국집으로 가 탕수육과 군만두에 이은 짜장면을 시커멓
게 입가에 묻혀가며 외식하는 날로 만들곤 했다.
고2 여름방학 때 전국대회에서 은메달을 따고 동네 입구에 조은
경 이름 석자가 플랑카드에 새겨져 걸리던 날 이후로 웬만한 동
네 남자 아이들은 주눅이 들어 딸부자 집인 우리 집 근처에 아예
얼씬도 하지 못했고, 서글서글한 성격 때문인지 세대 차이가 이유
인지 동생들의 고민상담은 나보다는 은경이가 훨씬 시원스럽게
잘하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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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엄마가 돌아가시고 "아빠와 딸"포장마차를 할 때만 해도 은경
이가 학교에서 돌아와 동생들을 돌봐 주지 않았다면 어떻게 살림
을 꾸려 왔을까 생각이 든다.
그런 은경이는 정말 남자로 태어났다면 쾌남아로 세상에 꼭 필요
한 사람이 되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있는 딸 부자집 넷째 딸로
성격 좋고 건강한 우리 집의 중심기둥이었다.
고3이던 그 해 취업 준비에 열을 올리고 있었는데 취업이라야
전국태권도대회에서 한 번 더 입상을 하면 자기가 원하는 국책기
관에 취업을 할 수 있는 특례가 있었다.
그 밑으로 15살의 은애를 비롯해 은미, 은정, 5살의 은수까지 아
직 손이 많이 가는 동생들이 많았던 당시, 가게를 시작하며 우선
집 가까이서 동생들을 돌 볼 수 있어야 하고, 재고의 부담 없는
소액자본으로 할 수 있는 업종을 생각하다가 책방을 해 보기로
했다.
9평 남짓한 가게를 손보며 전면은 문을 포함해서 전체를 유리로
하고, 내부는 얕은 회색 바탕에 벽을 죽 타고 돌며 앵글로 선반
을 만들었다. 색상의 결정과 내부 칠, 실내 인테리어는 은희와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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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해서 나선 곽방근이 맡았고, 앵글 조립과 책의 매입 운반, 진열
은 나와 은경이 그리고 민우가 맡아서 했다.
무엇이든 그 결과보다는 준비해 가는 과정이 웃음과 희망과 행복
이 가득한 것처럼 3일 밤 낮 동안 개점을 준비하며 드디어 우리집
도 이렇게 가게를 가질 수 있다는 행복감에 모두 들떠 있었다.
드디어 개점을 하던 날 중앙에 돼지머리를 올리고 떡고물이 잔뜩
오른 시루떡과 황태포로 차린 고사상에 가게 주인인 내가 먼저 사
발에 막걸리를 가득 붓고는 "곧 아빠가 정년이십니다. 가게가 잘
되어 우리 가족 모두가 어려움 없이 잘 살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하며 절을 했다.
내 뒤를 이어 아빠가 절을 하신 뒤 돼지머리 입에 봉투를 꽂아
주시는 것을 시작으로 친척들이 절을 하였고, 마지막으로 민우와
곽방근도 절을 하며 봉투를 하나씩 돼지머리 콧구멍에 꼽는 것을
끝으로 고사를 마친 후 주변 가게에 떡을 돌리는 것은 나와 은경
이가 맡았고, 머리고기 해체는 작은 엄마가 맡으셨으며, 음복상을
차리는 것과 손님 시중은 은희와 동생들이 맡았다.
오늘은 아빠께서 엄마 돌아가신 후 처음으로 기별을 넣어 집안어
른들이 다들 모이시는 바람에 개업하는 작은 가게는 정말 발 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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딜 틈이 없는 상태에서 연이은 손님에 손이 딸린 은희의 일을 곽
방근이 열심히 도와주고 있었다.
"곽방근씨! 이리 와서 막걸리 한 잔 해요!"
6시부터 시작한 고사는 9시가 되어 끝이 나고 뒷일을 마무리 할
은희, 은경이, 은애와 민우, 곽방근만 남았다.
"은경아! 이곳은 은희와 은애에게 맡기고 나머지 동생들 데리고
집으로 가서 씻기고 잠을 재우렴."
그런 일은 나 다음으로 은경이가 잘 했고 동생들도 군소리 없이
잘 따라 주었기에 은경이는 아빠를 모시고 동생들을 앞세워 집으
로 먼저 갔다.
"수고 했어. 이제 우리끼리 간단하게 고사 마무리를 하자."
사실 그 날 고사를 치루며 나를 비롯한 동생들과 친구들은 거의
음식 먹을 시간이 없었다. 남은 막걸리를 스텐 사발에 가득 부어
우리들만의 자축연을 열면서 잠시나마 행사 뒷이야기로 시간 가
는 줄 모르다가 10시가 다 되어 가게를 정리하고는 곽방근의 에
스코트로 은희, 은애를 집에 데려다 주도록 했다.
"은영아! 축하 한다. 너는 내가 본 가장 아름답게 사는 사람 중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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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야. 굴복하지 않고, 자신의 입장을 희생이라 생각지 않고 담
담한 표정으로 가족을 이끌어 가는 너를 지켜보며 ‘참 아름다운
사람이다.‘라고 늘 느끼며 살아왔어. 오래 전부터 그 느낌이 사
랑으로 내게 남겨지기 시작했지만 ......."
"너 술 취했구나? 이그 그러니까 니네 엄마가 포장마차까지 쫓
아 와서 타박을 하시지. 민우 도련님! 정신 차리시와요."
양손의 엄지와 검지손가락으로 그의 입술을 집게 집듯 집어 흔
들며 입술을 잡힌 그 모습이 못난이 돼지를 닮아 낄낄댈 즈음
가게문이 열리고 곽방근이 나타났다.
"아하. 나는 꼭 이런 깨소금 표현이 있을 때 주책없이 낀단 말
이야. 성도령과 조마님! 좋아요. 좋습니다."
괜스레 얼굴이 붉어짐을 느끼며 곽방근에게 의미 없는 너스레를
떨다가 10시반이 조금 넘어 가게 문을 닫고서 함께 집으로 향했
다.
"저 은영씨!"
곽방근이 나를 불러 세웠다.
"은영씨를 너무 좋아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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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심각한 얼굴의 그를 대하며 웃어야 할지 말지를 몰라 우물
쭈물대는 나에게 다시 한 번 곽방근이 소리치듯 외쳤다.
"나! 곽방근은 조은영을 좋아한다!"
곁에 있던 민우도 어이가 없는지 그저 곽방근의 행동을 지켜 볼
뿐 대책이 서질 않는 듯 했다.
"야! 너 오늘 돼지 혓바닥 먹었지? 웬 봉창 두드리는 소리냐?"
곽방근은 싸늘한 눈으로 우리를 노려보다가 두 말 없이 오던 길
을 되돌아갔다.
술을 한 잔 해서인가 곧 차편이 끊길 시간이었지만 그것보다는
민우와 조금 더 이런 시간을 갖고 싶다는 마음이 앞섰다.
"넌 안가도 되니? 시간이 너무 늦었어......"
"너는 내가 빨리 갔으면 좋겠니?"
"그런 말이 어디 있어. 난 네가 수준에 맞는 훌륭한 집안에서 좋
은 교육을 받은 여자친구를 만났으면 하는 바램이야. 물론 내가
그런 조건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도 했지만 현실은 그런 것
이 아니고, 나 같은 철부지에게 그것을 알려 준 분이 포장마차
할 때 찾아 주셨던 너희 엄마셨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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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동안 너를 사랑하면 어쩌나 하고 고민 많이 했거든. 앞으로도
너는 나의 좋은 친구이지 결코 사랑하는 사람으로 만나 상처를
받고 싶지 않으니까 그런 점을 분명히 해 주었으면 좋겠어. "
사실 그는 자신의 감정을 쉽게 표출하고 강요하지 않는 그런 타입
의 사내로 자신의 행동에 책임질 줄 아는 사람으로 보였다.
그러나 그것은 절제된 삶을 살고 있는 차가운 사람이라는 의미를
가지는, 맹목적 사랑은 더더욱 할 수 없는 사람을 뜻하기도 했다.
어둠을 틈 타 그의 왼손이 가만히 나의 손을 잡는가 싶더니 오른
팔로 나의 어깨를 억세게 감싸 안아 왔지만 그의 품이 싫지 않은
나를 원망하며 거부치 않는 몸짓으로 그의 가슴에 깊숙이 얼굴을
묻었다.
멀리 아빠와 은경이가 나와서 기다리는지 말소리가 또렷했다.
"아빠! 은경아! 왜 안 주무셨어요?"
"으~ㅁ 그래 민우가 데려다 주는 줄 알았으면 그냥 자는 건데..."
민우를 보내고 집으로 들어서며 5년 전의 모습에서 너무 빨리 늙
어 가는 아빠의 뒷모습이 안쓰러웠다.
"언니! 집안일은 다해 놓았으니 씻고 자면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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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다. 은경아!"
언제 보아도 은경이는 듬직한 나의 후원자였다.
책방이 없던 동네에 "조은 책방"이 들어섰지만 소문이 나질 않은
탓인지 3개월째 적자를 내고 있었고 정말 자리를 지키고 앉아 있
기가 힘든 하루하루가 계속 되었다.
아직 아빠와 은희의 수입이 있어 살림을 걱정 할 형편은 아니었
지만 친척들에게 6개월 후부터 이자를 갚겠다고 한 약속을 어떻
게 지켜 나갈지 걱정이었고, 4학년으로 취업 준비에 바쁜 민우가
가끔 들려 심심한 시간을 때워 주고 있었지만 우리 집 살림살이
에 사활이 걸린 이 문제를 어떻게 풀어야 할지 정말 앞이 캄캄했
다.
다행이 버스정류장과 지하철 출입구에서 민우와 안내문을 돌리기
시작한 달인 6월부터 개업 4개월만에 손익분기점을 넘어서기 시
작했지만 이익이라야 이자를 내는 정도의 소액으로 우선은 적자
를 면했다는 점에서 결산을 하며 민우와 함께 환호성을 질렀다.
"이~야호 이제 된 것 같다. 우리는 잘 될 꺼야."
7월부터는 한결 장사도 잘되었고, 시합에 나가 동메달을 딴 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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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한국은행에 취직을 예약해 놓고 신설동 학원에서 주판과 부
기를 배우는 시간외에는 집안일과 가게 일을 거의 도맡다 시피
했다.
"언니 힘들었지. 내가 할 테니까 뭐든지 해 보고 싶은 일이 있으
면 마음 놓고 해 봐."
말만 들어도 정말 든든한 동생이 자랑스러웠다.
남들도 다들 떠나는 바캉스 철을 맞아 유난히 무덥던 그 해
여름은 서울이 텅 빈 듯 했고, 장사도 비수기여서 바람이라도 쏘
일까 하고 망설이던 참에 민우에게서 연락이 왔다.
주말은 번잡하고 주중에 산으로 캠핑이나 다녀오자는 것이었다.
"누구누구 가는데?"
지난겨울에 다들 군에 가 버리고 내가 아는 민우의 친구는 곽방
근 밖에 없었지만 싫지 않은 표현을 그렇게 한 것 같았다.
"응 너는 말해도 잘 모를 꺼야. 한 7-8명 돼."
"곽방근씨는?"
"그 친구는 바다로 놀러 간데 다른 친구들이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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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여자가 같이 가도 되는 장소야?"
"은영아! 제부도에도 함께 갔었잖아! 그냥 따라 나서 봐.
네 나이가 이젠 22살 후반으로 노계라는 것을 잊었니? "
"왠 노계? 호호호호 나는 뭘 준비하면 되는데?"
"텐트에서 하루를 자고 오는 것이니 츄리닝 한 벌 정도만 있으면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준비할 께."
"언젠데?"
"다음주 화, 수요일이고, 장소는 천마산이야."
8월 둘째 주에 있는 7일과 8일 이었다.
"아빠께 허락 받아야 한다는 것 알지?"
민우는 대답을 대신해 씨~익 웃는 모습을 내게 보여 주었다.
"산에를 간단 말이지?"
태어나 산이라고는 가 본적이 없고 그런 곳에 입고 갈 옷도 없었
지만 깊은 산속에서 텐트를 치고 잠을 잔다는 경험해 보지 못한
일들을 앞두고 호기심 반 두려움 반으로 그 날을 기다렸다.
새벽녘까지 설레이는 마음으로 별의별 생각을 다하며 은경이 고
집대로 유행에 맞춘다며 새로 산 청바지를 허벅지가 꽉 조이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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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간 나팔바지로 고쳐 입었다. 흰색 면 부라우스를 받쳐 입고 앞
단추 두 개를 풀어 제친 후 흰색 운동화와 모자를 눌러쓰고 츄리
닝과 세면도구, 화장품 약간이 들어 있는 배낭을 메고 마루에 있
는 거울 앞에서 새벽부터 옷맵시를 보며 즐거워했다.
"춥지 않을까? 아무리 여름이지만 산속이라 추우면 어떻게 해"
키가 비슷한 은경이 방으로 가서 조심스럽게 조끼를 찾았다.
"언니! 뭐 하는 거야?"
잠귀가 밝은 은경이가 눈을 비비며 나직이 물었다.
"쉿! 은경아 아빠와 동생들 깰라. 네 조끼 좀 빌려 다오."
조끼를 찾아 준 은경이는 졸린 눈으로 씨익 웃고는 하품을 하며
다시 잠을 청했다.
새벽 5시 반! 아직 떠날 시간이 멀었지만 내 몸 속에서 이글대는
듯한 야릇한 흥분을 삭이면서 쌀을 씻고 된장찌개를 준비하다가
문득 "캠핑가서 화장실이 가고 싶으면 어쩌지?"하는 생각이 들자
당장이라도 뱃속의 거북함을 있는 대로 쏟아 내야 한다는 강박관
념에 다리가 후들거렸고 급한 걸음으로 화장실에 달려 들어갔다.
긴장을 해선지 새벽녘이라고는 하지만 식은땀이 이마에 맺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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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래식 화장실에서는 시원한 쾌변소리가 들리지 않고 애쓰는 신
음만 요란 했다.
"언니! 무슨 일이야. 괜찮아?"
은애가 걱정스러워 하며 물어왔다.
"괜찮아. 변비가 있어서......."
30분의 고통 속에 어느 정도 뱃속을 정리하고 손을 씻고서는 부
엌에 이르자 그 곳에는 은경와 은애가 자리를 차지하고 내게 자
리를 주려 하지 않았다.
"언니! 우리가 할께. 준비물 챙겨."
정말 좋은 동생들을 흐믓하게 바라보다가 방으로 돌아와 몇 가지
안 되는 화장품으로 다시 화장을 시작했다. 크린싱 크림으로 화
장을 지우고 처음과 다르게 과감하게 화운데이숀을 찍어 바르자
거울에는 커다랗고 허연 보름달 하나가 탄생 하였는데 정말 역겨
운 모습이었다.
그 날 책방은 은경이가 대신 지켜주기로 했고, 은희는 어제 밤
친구들과 바닷가로 놀러 가 버린 덕에 오늘 하루 동안의 살림은
고교 1학년이던 은애가 맡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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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랫배가 아프다는 생각에 아랫목에 배를 깔고 엎드려 잠을 설친
탓인지 잠시 졸다가 9시 반이 다 되어 은경이가 나를 깨우면서,
이제까지 가꾸지 못한 아랫배를 감추려는 마지막 준비물인 콜셋
을 어렵게 다리와 허리 사이에 끼워 넣었다.
그 거북함이란 정말 참기 어려웠지만 민우의 여자친구로 소개 될
그들에게 늘어진 아랫배를 보여서는 안 되겠다 싶어 준비한 고육
책이었다.
우리 집에서 동마장까지는 걸어서 15분 정도면 충분했고 9시 40
분이니 거의 정시에 약속장소에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은영아! 여기!"
한 무리의 젊은이들 속에 카키색 상하복에 카우보이 모자를 쓴
민우의 모습이 보였다. 마치 영화에서나 본 듯한 환한 웃음을 지
으며 달려와 빈 껍질뿐인 배낭을 받아들고 서투른 모습으로 나
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170cm의 내 키에 비해 민우의 키가 176cm이니 남이 봐서 밉상
은 아닌 듯 싶어 그가 하는 대로 가만히 있었다.
"힘들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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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무리의 친구들은 민우를 포함해서 남자가 5명이었고, 여자는
나와 또 한 명으로 모두 7명이었다.
"내가 소개할 께. 이쪽은 나와 결혼을 약속한 조은영씨!"
"이 쪽은 같은 학과 친구들이고 저 여자분은 상철이 약혼녀이지."
어처구니없는 민우의 거짓말을 들으며 한 쪽 손으로 있는 힘을
다해 민우의 등짝을 꼬집어 주면서 웃는 낯으로 인사를 나누었지
만 비명이라도 지를 법한 민우는 야릇하게 미간을 찌그리다가 이
내 웃음으로 답하며 일행을 춘천행 버스로 몰아갔다.
마석까지는 1시간 반이 걸리고 우리가 야영을 계획하고 있는 곳
까지는 버스에서 내려 2시간을 걸어가야 한다며 버스에 올라 당
연한 듯 민우가 내 곁에 자리 잡았다.
"은영이 너 향수 뿌렸니?"
"넌 아직도 날 그렇게 모르니? 내가 향수 뿌린 것 본적이 있어?"
"아니 그런데 오늘은 네 곁에서 꽃향기가 나네."
민우가 코를 벌름거리며 단추가 두 개 풀어진 내 가슴을 향해 코
를 디미는 시늉을 했다.
"너 한 번만 더 징그럽게 하면 나 그냥 갈 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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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아~ 알았어. 나는 신사잖아? 다시는 장난 하지 않을 께.
그런데 우리 버스 안에서만이라도 손잡고 가자."
민우는 내 대답이 필요치 않은 듯 나의 손을 꽉 잡았다.
그런 민우를 밀쳐 내고 싶지 않은 나는 그의 손에 깍지를 끼고
힘을 주다가 버스가 망우리 고개를 오를 즈음 오랜 습관처럼 팔을
가슴으로 보듬은 채 고개를 그의 어깨에 힘없이 풀어 놓았다.
여름날 에어컨도 없는 완행버스가 망우리 고개를 넘어가면서 그
래도 창가로 바람이 들어 와 선지, 지난밤을 새워서 그런지 쏟아
지는 잠을 참을 수가 없었다.
"나 졸려!"
민우가 가만히 내 품에 안겨 있던 팔을 빼서 어깨를 감싸 안았다.
나는 민우의 겨드랑이를 파고들듯 코를 디밀며 풋풋한 그의 체취
속에서 잠에 취해 드는가 싶다가 버스가 멈춰서는 것을 느끼며
잠시 눈을 들어 창 밖을 보았다.
소나무 숲이 엄청난 것으로 보아 고교 때 소풍 왔던 금곡능이 분
명했다. 내 얼굴 위에는 민우가 햇빛을 가리려고 언제부터 들고
있었을지 모를 카우보이모자가 보였고, 오른손으로 연신 나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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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채질을 하고 있는 민우의 자상한 모습이 나를 감동시키고 있
었다.
그냥 눈을 떠버리면 이 모든 행복이 내게서 달아나 버릴 것 같아
가늘게 한숨짓고 그의 가슴에 머리를 더욱 깊게 묻고서, 숨쉴 때
마다 부풀어 오르는 가슴과 그의 체취에 진한 흥분을 느꼈다.
"민우는 내게 어떤 사람일까?"
제부도에서 그는 내게 처음으로 사랑한다고 고백을 했었고, 그의
배려를 값싼 동정이라고 단정해 버리며 정릉천변에서는 두 번 다
시 생각하고 싶지도 않은 일들을 함께 겪어야 했다. 포장마차를
하던 일 년 동안 함께 리어카를 끌어 주던 민우였고, 책방을 열면
서 그가 없었으면 어떻게 할 뻔 했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으며,
버스정류장과 지하철 출입구에서 안내문을 돌리면서도 나보다는
나를 위해 항상 적극적이었던 사람이었다.
그러면서도 나를 거칠게 대하거나 소홀하게 대함이 없었던 늘 장
난 같이 내 곁을 맴돌았던 그는 내 마음이 열릴 때까지 언제나
기다리겠노라고 말을 했었다.
나의 이마에 그의 입술이 와 닿고 카우보이모자가 바람을 더하면
서 민우의 달콤한 속삼임이 내 귀를 간지럽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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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님! 그만 일어나셔요. 이제 다 왔어요."
햇살을 피해 눈을 찌그리며 의식적으로 그의 품을 파고들어 그
의 목덜미에 가벼운 키스를 하자 민우는 황급히 모자로 나의 머
리를 감싸며 짧은 경련과 함께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여름철 정오의 햇살이 눈을 부시게 했지만 야영장에 도착하고
나서 점심을 해결하기로 하고, 일행은 가지고 간 참외와 포도,
과자로 허기를 때웠다.
2시간을 걸어야 한다는데 새로 산 운동화가 작았던지 발가락을
조여 오기 시작했다. 처음 입어 본 콜셋 안은 땀으로 범벅되어
버린 듯 싶었지만 더위와 허기에 지친 틈새에서 나를 돌보아 줄
사람도 없었고, 아프다는 표현을 하기에는 적절치 못한 분위기에
서 나는 그들과 같이 유쾌한 모습을 보일 수 없었다.
옆에서 함께 걷던 민우가 물어 보지도 않고 나무 그늘로 나를 몰
아 세우고 배낭과 조끼를 빼앗아 버리고는 신발을 벗어 뒷 굽을
꺾어서 스러퍼를 끌듯 신으라고 했다. 그리고는 함께 간 친구들
에게 먼저 야영장소로 가서 식사 준비와 야영준비를 부탁하고
비포장 도로 한 곁에 나를 털썩 주저 앉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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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우야! 미안해."
"뭘? 그런 말이 어디 있어. 진작 아프다고 할 일이지 곰 같이 그
냥 오면 어떻게 하니? 이 곳에서 한 시간 정도 더 가야 하니까
푹 쉬어."
그는 양말을 벗기고 한쪽 발씩 아주 정성스럽게 주물러 주었다.
"땀 냄새 나지?"
그는 대답대신 나의 발등에 가벼운 키스를 하는 바람에 소스라치
게 놀라며 발을 빼고는 어깨를 밀치며 이런 그의 행동을 어떻게
받아 드려야 할지 정신이 아득했다.
민우는 2개의 배낭을 앞뒤로 메고 인적이 뜸한 시골길을 향해 싫
다는 나를 등에 업었다. 사실 왼쪽 새끼발가락의 피부가 까져 난
감하던 터였는데 나를 업어 버릴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하던 터여
서 처음엔 싫다고 버텼지만 그의 두 손이 나의 엉덩이를 감싸고,
내려 달라고 할 때마다 철썩철썩 엉덩이를 때리는 통에 놀라고
아파서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때리지마. 나 멍들면 어떻게 해?"
"엉덩이 만져 볼 기회가 없으니 때려라도 보아야 할 것 아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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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라구?"
민우의 두 귀를 사정없이 잡아당기자 언덕길을 오르며 힘들었
던지 길가 나무 그늘로 몸의 방향을 틀더니, 숲이 우거진 곳에
나를 내동댕이치고는 두 눈이 맞닿을 거리까지 무섭게 다가와
뜨거운 입김을 내뿜었다. 두 사람은 누가 먼저 랄 것 없이 깊은
키스를 나누게 되었다. 서로의 몸을 격렬하게 더듬다가 그의
거친 손이 웃옷을 벗기려 들 때 더 이상은 일이 날 것만 같아
이미 이성을 잃어버린 그를 옆으로 밀쳐내고 하늘을 향해 두
눈을 감았다.
숨겨져 있는 나는 그를 갖고 싶다는 소망이 너무 간절했지만
어쩐지 그를 사랑해선 안 될 것만 같은 생각이 나를 지배하면
서 더는 아무것도 허락하고 싶지 않았다.
"은영아!"
"으~ㅇ"
"내가 너를 사랑한다고 했었나?"
"------"
"난 네게 상처를 주게 될까 항상 마음이 무거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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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 준 일이 없으니 된 것 아니니?"
"그런 뜻이 아니고 ........"
민우가 입을 다물어 버렸다.
"민우야 난 네가 너무 좋아져 큰일이야."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노
빈과의 문제를 정리했다고 하더라도 노빈과 민우의 정리가 남아
있는 터여서 말을 아껴야 한다고 생각했다.
야영지에서는 3개의 3인용 텐트와 가운데 모닥불 자리가 만
들어져 있었고 석유버너에서는 밥과 김치찌개가 끓고 있었다.
우리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오후 3시의 늦은 점심에는
김치찌개에 꽁치통조림이 함께 넣어져 있었고, 개울가에서 주어
온 납작한 돌을 버너에 달구어 삼겹살이 구어 졌다. 소주잔이 돌
려지면서 나도 서너 잔을 분위기에 취해 받아 마셨지만 야외라는
기분에 취한다는 기분이 들지 않았다.
함께 온 친구들은 졸업반 이어선지 그저 소리 지르고 춤을 추고
어쩔 줄 모르는 그런 젊은 시절 모습보다는 차분하고 정적인 분
위기에서 앞날의 희망, 진로, 인생, 사랑.... 그런 이야기를 하며
깊은 산속 개울가에서 저녁을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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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닥불이 피워지고 모기를 쫓는다고 젖은 쑥을 함께 태우면서
쑥 향기는 바람을 타고 토네이도가 자리를 옮기듯 이 구석 저 구
석을 넘나들었다.
조용한 기타 소리와 나직한 노래자락은 모닥불을 벗 삼아 계곡
에 피어오르고, 은하수가 깔린 높은 하늘에서 별을 헤는 시간을
맞은 우리는 모닥불 주변에 둥그렇게 둘러 앉아 술잔을 주고
받으며 산 속의 암흑과 적막함에 익숙해져 갔다.
밤이 깊어 자정이 가까워 오자 상철이라는 친구의 약혼자가 텐
트 하나를 차지하고 들어가 버렸다.
"응 그래. 저 텐트에서 자면 되겠지."
이런 곳에서 처음 밤을 보내는 나는 잠이 올 것 같질 않아 주변에
서 권하는 대로 술잔을 받으며 취한 기분이 되고 싶었지만 그 날따
라 밤은 내게 잠을 청해 오지 않고 있었다.
밤이슬이 내리면서 준비한 조끼를 껴입어 보았지만 한기를 느끼
며 민우의 겨드랑이에 팔짱을 낀 채 모닥불가로 더욱 다가앉았다.
슬그머니 일어난 민우가 배낭에서 파카를 꺼내 어깨에 덮어주는
것을 지켜보며 그날따라 술을 마실수록 말수가 적어지는 민우가
걱정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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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1시가 가까워 오자 나머지 친구 셋이 두 번째 텐트 속으로
기어들어갔고 모닥불 주변에는 민우, 나, 그리고 상철이라는 친
구가 끝까지 자리를 지키며 술잔을 비우고 있었지만 어느 순간
그 친구마저 약혼녀가 있는 텐트로 사라지는 황당한 일이 벌어지
면서 두 눈을 껌벅이며 걱정스럽게 민우를 보았다.
"왜 무슨 일이라도 일어날까 봐 걱정되니? 같이 자면 되지 뭐."
사정없이 그의 팔을 꼬집어 뜯었다.
"어림없어. 나 혼자 잘 꺼야."
진담인지 농담인지 모를 이야기를 서로의 눈을 보며 낮은 소리로
속삭이면서 깊은 산속의 오두막 3채와 조그맣게 타오르는 모닥불,
그 곁에 민우의 어깨에 기댄 채 검고 깊은 하늘에 노란 별들을 세
는 다정한 우리만의 세상이 너무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은영아!"
차가운 표정으로 그가 나를 불렀다.
"으 ~응"
"너는 나 없어도 잘 살수 있겠지?"
4년 전부터 그는 항상 내 곁에서 내가 필요 할 때 만날 수 있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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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었기에 사실 그의 소중함을 나는 잘 느끼지 못하고 살아
왔었다. 그런 면에서 민우는 내게 산소와 같은 친구였다.
"만약 내가 네 곁에 없어도 잘 살 수 있겠지?"
"농담 하지마. 괜스레 시커먼 산 속으로 사람 불러 놓고 실없이
분위기 잡으려고? 난 슬픈 주인공은 되고 싶지 않아요.“
둘만이 남은 모닥불 곁에서 술꾼마냥 단숨에 소주잔을 들이켰다.
"은영이~ 술 잘 마시네. 그러다 탈나는 것 아이니?"
검정 칠을 한 산속에 빠꼼이 하늘이 뚫리고 그 곳에 별들이 죄 다
모여 우리를 심판 하듯 지켜보는 가운데 모닥불에 시선을 고정한
민우의 창백한 얼굴에서는 외로움이 느껴졌다.
쉽게 농담을 할 친구가 아니라는 것을 잘 아는 나이기에, 그의
굳은 얼굴이 무서웠고 행여 내가 들어서는 안 될 말을 할 것만
같아 슬금슬금 눈치를 보며 답답한 마음에 소주를 마구 마셨다.
아니 그냥 취해보고 싶었는지도 몰랐다.
"노빈이가 군대를 그렇게 가 버리더니, 넌 뭐야! 어디 가서 머리
깎고 중 이라도 될래?"
조금은 취했다고 느껴지던 나는 무릎사이로 고개를 묻고 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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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 슬펐는지 괜한 서러움에 울고 있었다. 두 손으로 턱을 괴
고 침묵하던 민우가 나의 손을 가만히 잡아끌었다.
"이거 놔! 이거 놓으란 말이야!"
그리 분한 일도 아니었지만 나는 그의 손을 사납게 뿌리치다가
결국 그의 품에 안겨서 그의 등 뒤로 바라다 보이는 작고 검은
세상을 희미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두 개의 텐트와 산골 개울물 흐르는 소리, 풀벌레 소리 가득한
검정색 도화지 속에서 흰 점을 찍어 놓은 듯한 모닥불가에 한
남자의 가슴에 안겨 어깨 너머로 보이는 별들을 보며 무엇이
그다지 슬펐는지 주르륵 주르륵 흐르는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어깨의 토닥임을 느끼며 그를 살며시 밀쳐 냈다.
"나! 술 좀 더 마실래."
그가 따라 주는 술잔을 단 숨에 들이키며 어차피 나는 엄마를
대신하는 운명을 가지고 살아왔으니 젊은 날의 추억 같은 것은
사치스러운 것이라고 생각했다. 다행이 수아를 만났고, 민우와
노빈 같은 착하고 좋은 친구들이 내 곁에서 젊은 날 방황하는
나를 지켜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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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운 것이 있었다면 그 들을 하나씩 떠나보내야 하는 이별의
순간이 늘 힘들겠지만 만나면 헤어짐을, 헤어짐은 언젠가 만남
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단정하려 애썼다. 얼마나 마셨을지 모를
소주 덕에 아무 생각도, 느낌도 없는 상태가 되어 버리고 말았다.
"은영아! 너 너무 취한 것 같다. 그만 자야지."
그의 팔에 부축되어 하나 남은 텐트로 이끌려갔다.
담요가 펴져 있는 텐트 속에서 신발이 벗겨지고 배낭으로 베
개가 만들어 진 잠자리에 뉘어지며 텐트문을 잠그려던 그의
엉덩이를 발로 차버렸다..
"넌 안돼! 나가"
그 후론 아무런 생각이 나질 않았다.
숨이 막혀 오는 갈증을 느끼며 온 몸의 혈관이 터져 나갈 것 같
아 도저히 더는 참을 수가 없다고 생각했다. 황급히 텐트문을
열고 모닥불 곁에 앉아 졸고 있던 그를 향해 "민우야! 나....."
하다가 말을 끝내지 못하고 목구멍을 타고 넘으려는 그 무엇들
을 억지로 참으며 급하게 개울가로 달음질쳐 세상 밖으로 쏟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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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곡의 물소리가 있었기에 망정이지 그 요란스러움을 참으려고
애썼지만 정말 참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러서는 눈물까지 솟아
올랐다. 곁에서 등을 두드려 주던 민우가 잠시 자리를 비운사이
아랫배를 조여 오던 콜셋을 벗어던지고 창피함도 잊은 채 시원
하게 소변을 보았다. 한 쪽에서 아는지 모르는지 머뭇거리던 그
가 돌아와서 치약이 묻은 칫솔을 내게 건네주고 등을 가볍게 쓸
어주었지만 숙취가 가져다 준 늘어진 나의 심신은 그 어떤 것도
대신 할 수 없을 정도로 괴로운 것이었다.
민우의 부축을 받아 텐트로 돌아 왔다.
눈알이 팽팽 돌고 속이 메스꺼워 누워 있는 것만으로도 참기 어
려운 새벽 3시 반....인적이 있을 리 없고 속의 것을 다 토해 버린
뒤라 쓰리고, 허기진 상태로 오금이 덜덜덜 떨려 왔다.
"은영이 자니? 너 그럴 줄 알았다. 한참 동안 고생해야 할 꺼야.
자 뜨거운 커피를 타 왔으니 좀 마셔 봐라."
알미늄으로 된 커피잔을 들고 창피함에 살금살금 그를 훔쳐보며
뜨거운 커피를 마시자 한결 한기도 가시고 속도 편해짐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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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군용담요로 나를 감싸주면서 이마에 가벼운 키스를 남긴 채
텐트문을 닫으려 했다.
"어디 가려구?"
"으~ㅇ 편히 자. 잘 자라."
이미 잠을 잘 형편이 아니던 나는 담요를 뒤집어 쓴 채 술이 깰
때 오는 덜덜 떨리는 시간을 맞고 있었다. 그것이 조금 안정되어
가면서 그가 궁금하여 조심스럽게 텐트문을 열자 모닥불 가에서
담요를 뒤집어쓰고 졸고 있는 그를 발견할 수 있었다.
이유 모를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조용히 다가가서 그의 머리를
가슴으로 감싸 안고 정지된 시간 속에 서로를 맡겨 두었다.
"나와 같이 들어가 자자."
떨리는 나의 목소리였다.
1평 남짓한 텐트..... 양쪽으로 폴대가 서있고, 머리 쪽으로 배낭
을 놓아 베개를 만들었다. 바닥에는 낙엽을 주워 모아 두툼하게
깔고서 비닐과 판쵸우의를 덮고 그 위에 담요가 깔려 있었다.
나는 아무 생각 없이 길게 누워 눈을 감았고, 그는 텐트 문단속
을 한 후 내 곁에 몸을 뉘었지만 두 사람은 눈을 뜨고 있어도 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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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있어도 모를 칠 흙 같은 어둠 속에서 상대의 몸에 닿기만 하면
감전 되어 죽을 것만 같은 심정으로 서로의 심장 뛰는 소리만을
느끼고 있었다.
손을 뻗어 그의 손을 찾아 내 가슴에 가만히 가져다주었다.
순간적인 일이었지만 거대한 움직임이 있는 듯 싶더니 다시 둘만
의 공간은 정적만이 감돌며 어둠 속에서도 그가 내 곁에 앉아서
나를 노려보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고, 가슴에 얹혀진 그의 손은
가볍게 떨고 있었다.
살며시 일어나 앉아 두 손으로 그의 얼굴을 찾았다.
"민우! 너를 사랑해! 그리고 결코 오늘을 후회하지 않을 꺼야."
그의 입술을 찾아 길고 긴 키스에 빠지며 우리는 그다지 서두
름 없이 몰랐던 서로의 몸을 탐닉해 갔다. 입술이 목을 타고 흘
러내리고 단추가 풀린 셔츠가 그의 손에 벗겨지면서 브레이지
어가 가슴 위로 밀어 올려졌다.
어둠 속에 감춰진 가슴에 그의 숨결이 닿는가 싶더니 그의 입술
이 남겨주는 짜릿한 전율에 신음하다가 그의 입 속에 온 몸이
빨려 들어가는 듯한 벅찬 기운에 낮게 신음 했다. 참을 수 없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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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분에 쌓여 나도 모르게 "허~억" 소리 지르며 그를 향해 달려
들었다.
누워 버린 그의 배를 타고 앉아 처음으로 느껴 보는 느낌들에
온 몸을 떨며 무슨 용기에선지 그의 웃옷 단추를 급하게 풀어
헤치고는 양손으로 그의 가슴을 쓰다듬다가 그의 품에 안기고
싶다는 충동을 느끼며 거친 숨을 참을 수 없었다.
나를 안아 뉘인 그는 힘없이 늘어진 나의 머리에서 목으로 다시
가슴을 애무를 시작하면서 두 사람은 그 이상의 것을 상상하며
애를 태웠다. 거침없이 바지 속으로 파고드는 집요한 그의 손길,
그는 이성을 잃은 듯 급하게 바지를 벗기려 들었고 거부하는 몸
짓과 침묵 속에 숨어있던 부끄러움과 두려움이 함께 찾아왔다.
“그만 더는 안돼”
그를 밀쳐내고 손을 뿌리치며 무의식적으로 어둠과 허공에 손을
내저었다. 여행을 따라 나서며 민우와 이런 순간이 오더라도 결코
후회하지 않겠다고 생각했지만 날카로운 지퍼 소리에 온 몸의 신
경이 굳어지는 듯 했고, 그의 손이 청바지의 단추를 풀고 지퍼를
내리려는 순간 무의식적으로 바지를 움켜쥔 채 두 다리를 꼬고서
어찌해야 할 줄 몰라 움추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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밖의 온도는 싸늘함이 있었지만 둘만의 공간은 뜨거운 열기로 낮
은 신음소리와 함께 벗기려는 자와 벗겨지지 않으려는 자의 작은
다툼만이 있을 뿐이었다.
“민우~ 그만해. 나 싫어. 아퍼~”
“은영아”
어쩌면 그 날의 시간은 오래 전부터 내가 원했던 일인지도 몰랐다.
그래서일까? 몇 차례 애를 쓰고 있는 그를 향해 이래서는 안된다
고 생각하면서도 점점 그를 받아들이고 싶어 하는 나의 원초적 욕
망에 힘들어해야 했다.
“나는 후회하지 않아. 나는 후회하지 않아”
주문을 마음속으로 외며 바보같이 눈물이 났다.
“은영이 우니?”
대답하지 않았다.
펜티로 가려진 그 곳에 그의 성기가 파고들 듯 닿아 있었다.
"은영아! 나는 오늘밤 우리를 책임질 수 없을지도 몰라."
"..........책임 져 달라고 한 적 없어."
갑자기 더 이상 허락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그의 머리를 힘껏
옆으로 밀어내고 도망치 듯 한구석에 웅크리고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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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만~~~"
여기서 그만 멈춰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속절없이 그를 받아
드리고 싶다는 욕정에 가득찬 나 자신이 미웠다.
"제가 선택한 이 남자와 영원히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해 주십
시오. 저는 이 사람을 진정으로 사랑하기에 오늘을 후회치 않
으렵니다. 설사 그가 제 곁을 떠난다 해도 저는 이 사람을 결코
미워하지 않고, 살아 있는 날까지 나만의 비밀이라도 후회하지
않으렵니다."
그가 등 뒤로 다가와 조용히 끌어안았다.
"은영아! ."
그가 이끄는 대로 등을 돌려 하늘을 향해 눕자 다리 사이에 무릎
을 세운 그의 손에 마지막 남은 얇고 작은 천이 벗겨지면서, 눈을
감아서는 안 된다고, 사랑하는 사람과의 첫 순간에 눈을 감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 어둠 속에 그의 얼굴을 두 손으로 받쳐 들
고 기쁨인지 슬픔인지 모를 낮고 조용한 울음을 터뜨렸다.
그는 몸을 밀착시키며 애를 쓰고 있었다.
"은영아! 나 좀 어떻게 해줘! 정말 미쳐 버리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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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머리를 가슴에 묻고 거친 호흡으로 어찌 할 바를 몰라 괴로
워하며 속삭이고 있었지만 나는 그의 머리를 가슴으로 꼭 감싸
주는 일 밖에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창훈아! 영재야! 이것들이 자나? 정규야!"
분명히 새벽을 가르는 상철이의 목소리였다. 우리는 불장난을 하
려다 들킨 사람들 마냥 사랑도 못해보고 야단스럽게 담요를 뒤집
어 쓰며 잠든 척 고른 숨을 쉬어야 했다.
"정규야! 소화제 있니?"
"민우에게 가 봐라"
"민우 자니? 나 상철인데~ 민우야!"
"응. 왜 그래?"
잽싸게 파카를 입으며 민우가 졸리는 듯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미안한데 소화제 있으면 줄래?"
"잠깐만."
후레쉬를 꺼내 배낭 속에서 소화제를 찾아 텐트 문을 열고 상철
이에게 약을 건네는 듯 싶었다. 나는 알몸으로 담요를 뒤집어 쓴
채 조금 전 이 곳의 정사를 저 친구에게 다 들켜 버린 것이 아닐
까? 하는 창피함에 숨소리마저 크게 낼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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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다녀간 후에 놀란 가슴으로 다시 무엇인가를 시작하기에는
두 사람 모두 너무 쑥스럽고 지쳐 있었다. 새벽 5시 반! 어설픈
첫 정사는 우리들에게 피로만을 안겨 주었다. 낮은 안개의 바깥
세상과 얇은 헝겊으로 차단된 작은 공간에는 담요 한 장에 벌거
벗은 두 남녀가 서로의 얼굴을 맞대고 상대에게 무언의 이야기를,
때로는 가벼운 키스를 하면서 아침을 맞아 갔다.
상철이가 깨우고 간 3명의 친구는 잠을 못 이루겠던지 텐트를 털
고 나와 모닥불을 환히 살랐다. 주문을 외우듯 투덜거리며 산속
의 어둠을 쫓아버리고 커피를 끓이자 구수한 향이 계곡에 피어
올랐다.
누구 들으라는 소리인지 뼈 있는 목소리도 들렸다.
"에이 밤이 너무 짧았어. 새벽녘 이슬도 차지만 혼자라는 것이 이
곳에서는 더 춥다."
모닥불이 환이 밝혀지자 텐트 안에서도 서로를 알아 볼 만큼의
어둠이 거치고 짙은 눈썹을 가진 첫인상이 깨끗하면서 차가운 민
우의 얼굴이 조각처럼 나를 보며 숨 죽여 있었다. 곤히 잠들어 있
는 듯한 그의 눈꺼풀에 가벼운 키스를 했다. 가볍게 몸을 뒤틀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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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우가 내 엉덩이를 끌어당겨 몸에 바싹 붙이고는 목 줄기에 가
벼운 키스를 했다. 사랑하는 사내 품에서 잠드는 것이 이다지 포
근하고, 여유롭고, 달콤한지는 몰랐던 일이지만 우리의 황홀한
잠자리는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민-우야 ! 놀-자. 밥-먹자."
잠깐 눈을 감았다가 뜬 것 같은데 시계는 벌써 8시를 넘어서고
있었다. 친구들이 텐트 앞을 오가며 그만 자라고 성화 부렸다.
"제수씨! 그만 일어나세요. 배고파 이젠 더 못 참아요."
담요를 빼앗아 몸을 둘러 감추자 알몸이 들어난 민우는 황당한
자신의 모습에 당황한 듯 입맛을 다시다가 이내 장난끼를 발동
하여 벌거벗은 엉덩이를 얼굴에 디밀고는 개스하는 시늉을 하
는 바람에 순간적으로 놀라서 그의 엉덩이를 "철썩" 때리고 말
았다.
"옳지! 잘한다. 한대 더!"
텐트 밖 친구들이 몰려와 문 앞에서 "한 대 더 !"를 외치며 한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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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떠 "제수씨 힘이 달리면 말씀만 하세요. 당장 박차고 들어 갈
테니까요." 라고 외쳤다.
"야! 임마 니들은 눈치도 없냐? 새벽부터 왜 난리냐? 좀 놔둬라.
제발 좀 놔둬라."
민우가 낄낄거리며 옷을 입으면서 친구들에게 말했다.
"자식 어디가면 꼭 혼자 와서 아침이면 코펠뚜껑을 두들기며 행
복 끝' 하고 외치던 놈이 누구냐? 우린 오늘 너를 생각해서 무
지하게 많이 참은 거다."
민우가 담요를 뒤집어쓰고 있는 내게 다가와 가볍게 키스하다가
담요를 감쪽같이 제친 후 가슴에 얼굴을 묻는가 싶더니 밑으로
쭉 입술을 이동하는 통에 나도 모르게 신음에 가까운 비명을 질
렀다.
"아~허~ㄱ"
"잘 한다. 성민우! 아주 친구들 밖에 세워 놓고 간을 졸이는구나.
제수씨! 이따가 어떻게 우리 얼굴 보려고 그리 애간장을 녹이는
겁니까?"
민우의 등짝을 사정없이 두들겨 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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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한다. 그래 맞아야 해. 성민우! 넌 좀 맞아야 해!"
"자! 형님 나가신다. 텐트문에서 5m 뒤로 물러 섰거라."
민우가 텐트 밖으로 나가자 친구들도 제각기 떠들어대며 아침
준비에 부산했다. 그도 그럴 것이 코펠 뚜껑만 밖에 있었지 정작
코펠은 우리텐트에 넣어두고 자는 통에 깨울 여력이 없어 8시가
넘도록 친구들이 배곯이를 하고 있었다.
그가 텐트에서 떠난 후 담요 사이로 들어난 벌거벗은 나를 바라
보며 하루 밤 사이에 사람들 앞에서 이토록 뻔뻔해져 버린 내가
무척 신기해 보였다. 한 쪽 무릎이 세워져 있었고, 허벅지를 타
고 그 곳에 이르러서는 숱이 많지 않은 검은 숲과 어우러진 아랫
배가 늘어져 있었지만 남자에게 밤을 허락한 내 몸이 그리 흉하
거나 불결하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펜티를 찾아 다리 사이로 집어넣으며 까칠한 그의 턱 수염이 닿
았던 벌겋게 된 가슴 주변과 목 주변, 안쪽 허벅지에 따가움을
느끼면서 차례로 옷을 입다가 허전해진 아랫배를 보며 간밤에
집어던진 콜셋 생각이 불현듯 났다. 난감한 일이었지만 여기
있는 누구에게도 "지난밤에 우리 두 사람은 아무 일도 없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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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라고 이야기 해 본들 웃음만 살 뿐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뻔
뻔스럽게 부지런히 옷을 입었다.
"그래. 나하고 성민우가 한 텐트에서 잤다. 그래 둘이 좋아서 하
고 싶은 대로 신나게 즐겼다. 왜? 뭐가 잘 못 됐어?"
세면도구를 챙겨 들고 입 운동을 한 후 뻔뻔한 얼굴로 심호흡
하고 텐트의 지퍼를 열어 제치며 태양 앞으로 나섰다.
그런 고민스러운 나와는 달리 밖은 아침을 준비하느라 모두들
부산했고 그다지 나에게 관심을 쏟는 것 같지 않았다. 개울로
가서 세수을 하며 혹시 어제 내가 저질러 놓은 것들이 있으면
어쩌나 싶었지만 다행스럽게 깨끗이 치워져 있었고 만나는 사
람마다 "안녕하세요? 잠자리가 불편하셨지요?"라는 정도의 인
사만을 건넬 뿐 편안하게 대해 주었다.
"아침은 떡라면 입니다. 식사들 하세요."
전날 서먹함에 친구들을 자세히 보지 못했지만 아침을 먹으며
바라 본 민우의 친구들은 제법 나이가 들어 보이고, 하나 같이
내성적인 사람들의 모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누구든 간밤의 이야기를 꺼내 한 소리 담을 만도 한데 아침으로
먹는 떡라면 예찬과 오늘 산행에 대해서만 의견을 주고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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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스럽게 남녀가 한 텐트에서 혼숙을 한 것도 문제가 되질 않
았다. 어쨌거나 서로 상대를 스스럼없이 바라 볼 수 있다는 것은
마음 편한 일이었다.
"친구들! 은영씨가 말이야 아시다시피 신발에 문제가 있어서 산
행을 함께 못 할 것 같다. 아쉽지만 나와 은영씨는 이 곳에 남
아 있다가 적당한 시간에 하산 할께."
산행팀과 잔류팀이 나누어지고 여정에 따라 준비물을 서로 달리
챙긴 후 민우와 팔짱을 끼고 손을 흔들어 주는 우리를 남겨 두고
그들은 환하게 웃으며 산을 향해 떠갔다.
"은영씨! 반가웠어요!"
그들이 소리치며 손을 흔들고 우리도 그들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라디오에서 10시 뉴우스 끝물에 "오늘은 전국적으로 비
가 온다."는 예보를 하자마자 그 새를 못 참고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민우는 서둘러 텐트주변에 배수로를 파고 , 텐트 위는
비닐을 덮고 장대비에 쫓기듯 텐트 안으로 숨어들었다.
"후드르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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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닐 위로 빗방울이 떨어져 구르더니 어느 순간부터는 우박이
떨어지는 듯했다. 두 사람은 얼굴을 내 밀 만큼 텐트의 자크를 열
어 놓고 몰려서 오고가는 검고 낮은 구름과 세찬 비바람 소리를
서로 듣겠다고 장난스럽게 싸웠다.
그러다가 작은 공간을 찢어 놓을 듯한 천둥소리에 놀라며 나는
마치 기다린 사람마냥 그의 품에 매달리며 정신없이 그의 입술
을 찾았다.
그러나 그는 지난밤과는 전혀 다른 사람으로 그런 나를 밀치며
텐트 밖으로 나가 버렸다. 너무 놀라 나는 부끄러움과 자존심도
잊은 채 비가 들이치는 텐트에 앉아 숨 막힐 듯한 빗줄기 속에
서 하늘을 향해 알지 못 할 고함을 지르고 있는 민우를 무겁게
바라보고 있었다.
"민우! 왜 그래? 나 무서워. 도대체 왜 그러는 거야?"
하지만 민우는 하늘을 향한 채 대답이 없었다.
너무 오랜 시간을 빗속에서 침묵하는 그가 걱정되어 텐트 안으
로 힘들게 끌어들였지만 파란 입술로 떨고 있는 그가 순간 무척
낯설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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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서도 한편으로 입을 굳게 닫고 눈을 감은 채 좀처럼 나를
보려하지 않는 고집스러워 보이는 그가 너무 가엽다는 생각이
들어 천천히 머리를 가슴으로 안으며 이렇게 말했다.
"미안해. 민우야! 난 너를 사랑하나 봐. 하지만 너를 힘들게 하고
싶지는 않아"
그리고는 내 자신이 너무 비참한 것 같아 소리 내어 엉엉 울었다.
그에게 안겨 눈물이 가슴을 흠뻑 적셔 타고 넘쳐 날 때 나직한
그의 음성이 들렸다.
"시간이 되면 내 가슴속에서 너를 놓아 주려 했는데.....“
나는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무섭기만 했다.
“나는 이미 너의 모든 것을 갖고 말았어.”
내가 무슨 말을 듣고 있는 것인지? 떠나겠다는 건가? 지난 밤 이
미 모든 것을 가졌으니 어떻게 하겠다는 건가?
"은영아! 이 세상에 태어나 너 하나만을 진정 사랑했었다."
머리를 매만지며 낮게 속삭이는 그의 음성에 소름이 돋는 듯 했다.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야? 확실하게 말해 줘."
한숨만을 내쉬던 그는 더 이상 말이 없었고 그 때까지 들리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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않았던 세찬 빗방울 소리와 간간이 부서지는 천둥소리가 얼마
동안 두 사람을 갈라놓았다.
"나아~ 보름 후에 미국으로 들어가."
말을 마친 민우의 목에서 작은 침 넘어 가는 소리가 들렸다.
기가 차서일까 웃음이 나오며 민우의 장난이 심하다고 생각했다.
"그럼 나는 뭐야? 민우야! 그러지마. 이제 겨우 너를 사랑하게
되었는데......"
고개를 돌려 그를 노려보았지만 거짓말이길 바라면서도 눈동자
가 흐려져 더는 그를 볼 수 없었다.
"왜 공부하러 가니? 몇 년이나?"
바보처럼 울먹이며 아주 작은 소리로 물었다.
"으~ㅇ 한 5년 정도...."
시선을 주지 않은 채 그가 답했다.
"그럼 나 어떻게 할까? 안 갈 수는 없는 거야? 아니면 도망가 듯
함께 따라 갈까? 이제 겨우 사랑한다고 말 할 수 있었는데......"
끝내 울음을 터뜨리며 돌아누워 엎드린 채 그를 외면했지만 생
각지도 못한 충격에 숨을 쉬고 있는지 조차 느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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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이 가까워 오면서 빗소리가 더 요란해졌다.
천둥소리에 잠을 깬 나는, 그가 잠에서 깨어날까 조심하며 그와
의 이별을 생각하고 있었다.
공부를 하러가는 그를 붙잡아서 될 일이 아니고, 따라 간다는
것은 꿈결의 이야기이니 더더욱 아닌 것 같았다.
결혼? 지난 밤 겨우 사랑을 확인 했는데 무슨 수로 결혼을 하고
우리 집은 또 어떻게 하나? 게다가 민우의 엄마는 우리가 결혼
을 한다면 가는 길을 막고 반대 하실 텐데..... 쿨적거리는 소리에
잠을 깼는지 풀어진 듯한 눈으로 바라보던 그가 으스러지게 나를
끌어안았다.
불과 몇 시간 전에 그를 사랑한다고 고백 했건만 그 새 이별을
해야 하는 나는 또다시 혼자만의 삶, 그 한가운데 서 있어야 했다.
"5년만 기다리면 되는 거야?"라고 말하고 싶어도 부담스러운 존
재가 되고 싶지 않아 그저 그의 가슴에 손가락으로 장난을 하듯
“민우 사랑해”라고 써 내려가며 슬픈 눈으로 그를 바라보다 울고,
바라보다 미소 짓기를 반복하는 나에게 한숨짓던 민우가 나직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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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영아! 나.... 너 가지고 싶어."
빗소리가 거세지며 천둥과 번개가 계곡을 메우는 듯 했다.
마치 굶주린 사람들 마냥 두 사람은 서로를 삼켜 버릴 듯 입술을
나누어가지며 누가 먼저랄 것 없이 거추장스럽게 남아 있던 마지
막 하나까지 벗어던졌다.
"후회하지 않겠어?"
그를 바라 볼 수 없다는 생각에 두 눈을 감고 고개를 끄덕이며
오래전부터 연습 해왔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그를 받아들였다.
번개 끝 물의 천둥소리와 비닐을 적시는 거친 빗방울소리, 계곡
물이 불어 흘러내리는 굉음 속에 어느 순간부터 나는 그의 목을
끌어안은 채 울고 있었고 끝을 모르던 그가 몸 위에서 축 늘어져
버리면서 우리는 그렇게 서로에게 처음이라는 의미를 담아 모든
것을 주고받았다.
땀에 흠뻑 젖은 벌거벗은 남녀가 둘 밖에 없는 산속의 작은 공간
에서 가뿐숨으로 하늘을 향해 누워 두 눈을 감고 있었다. 한 남자
의 사랑을 받은 자신이 어른이 된 듯한 느낌과, 오랜 미련을 떨쳐
버린 듯한 시원섭섭함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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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영아! 너만을 사랑해."
"나도 민우만을 사랑해."
멈출 것 같지 않은 비에 계곡물이 불어나고 서둘러 대피를 해야
할 지경이 되면서 민우와 함께 빗속에서 텐트를 걷고 하산 길에
나섰다. 민우의 우의를 내가 입었지만 이미 온 몸이 다 젖어 버린
상태였고 첫 경험의 고통을 간직한 채 버스가 닫는 마석에 오후
4시가 다되어 도착했다.
"은영아! 우리 어디 가서 몸이라도 말리고 가자."
민우가 잡아끌었다.
"우선 전화부터 하고."
"산에서 지금 내려왔는데 비가 와서 옷도 말리고 식사도 하려면
집에는 좀 늦어야 될 것 같다."
은경이에게 전화를 넣고 훤한 대낮에 여관주인의 따가운 눈총을
의식하며, 옷을 말릴 수 있는 뜨끈뜨끈한 방을 얻었다.
보기만 하던 여관이라는 곳을 처음 들어서며 무슨 큰 일이 나는
것으로만 알았던 그 곳에 뻔뻔스럽게 민우의 팔짱을 끼고 태연
하게 방문을 열어 제치고 들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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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만이 있는 것을 의식하자마자 두 사람은 기다렸다는 듯이 키스
를 나누면서 옷을 아무 곳에나 벗겨 던지며 서로를 끈질기게 탐
하다가 깊은 잠에 빠져 버렸다.
잠에서 깨어 날 즈음 내 곁에는 민우가 곤히 잠들어 있었고, 날이
저문 창 밖에 빗소리가 계속되고 있었다. 아직 민우가 한 밤중이니
어찌 할 수 도 없고 해서 민우의 곁으로 살며시 누워 몇 시간전
에 우리에게 있었던 아마도 모를 사건들을 생각하며 조건 없이
행복했던 시간을 되새김질 했다.
동마장에 도착 한 것은 저녁 10시였다. 버스안에서 그의 어
깨에 기대어 나직이 물었다.
"나를 떠나지 않을 꺼지? 나만을 사랑한다는 그 말이 사실이지?"
"나는 네가 상처 받을까 힘들어. 또 내가 너를 지켜 주지 못할까
두려워. 보름이라는 시간이 있다지만 시간의 흐름이 목을 조여
오는 것만 같고, 세상을 살며 단 한 사람만을 사랑하겠다고 하
는 내가 그럴 자격이 있는지 두렵기만 해."
민우는 서울이 가까워 갈수록 말수도 적어지고 땀을 비오듯 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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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며 경련을 일으키는가 싶더니 고통에 일그러진 모습이 역력
해 보였다.
"왜? 어디 아파? 왜 그래?"
조금 전까지 장난스럽고 열정적이던 민우가 아니었다.
계속해서 온 몸과 다리를 떨고, 시선은 나를 직시하지 못한 채
불안해했다. 두 손을 모으고 침을 흘리는 이상한 모습에서 왜
그러는지 이유도 모른 채 괴로워하는 그의 머리를 끌어안고 어
떻게 하든 진정을 시키려고 노력하면서도 처음 보는 그의 이상
한 행동을 이해 할 수 없었다.
잠이 들었던 그를 부축해 버스에서 내리면서 조금은 안정이 되
어 보였지만 그래도 예전의 민우는 아니라고 생각되었다.
“이젠 괜찮아? 내일 전화 줄 꺼지? 집에 가서 푹 자고 나면 좋
아 질거야.”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애써 웃음을 보이려고 노력했다.
“미안해. 나 지금 너무 안 좋은 것 같아. 내일 전화할 께.“
첫경험을 주고받은 커플치고는 너무 어울리지 않는 서먹한
몇 마디의 대화를 남기고 마지막 모습을 남긴 그와 그렇게
이별을 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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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음이 정확치 않은 어눌한 말을 남기고 시야에서 사라져 가는
택시를 믿을 수 없는 눈으로 몇 번이고 돌아보면서 집을 향해
걸었다. 그토록 자신 있고 사려 깊은 민우의 또 다른 모습에
의아해 했지만 며칠 지나면 괜찮아 질것이라는 생각하며, 그
보다는 꿈만 같은 지난 시간에 그와 나누었던 일들을 떠올리며
집을 향해 걷는 길은 마냥 행복 했었다.
10시반쯤 집으로 돌아와 아빠와 동생들 그리고 의외의
손님인 곽방근의 환영을 받으며 늦은 저녁을 해결 했다.
"웬일이세요? 이 시간에 혼자서 우리 집엘 다 와 계시고?"
"좋은 일이 있어서 아버님께 말씀드리려고 왔는데 일단 아버님
께는 조건부 합격점을 받았습니다."
곽방근이 머리를 긁적대며 말을 이었다.
"사실은 은희에게 청혼을 했습니다."
은희와 곽방근을 번갈아 쳐다보며 믿기 어려운 시선을 보내자
언제나 새침때기 같은 은희가 마주 앉아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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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희는 만으로 20살, 대학 2학년, 아직 결혼을 염두에 둘 나이는
아니었다. 그래도 그렇지 저 사람이 제부가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는데 한 참 동안 입을 벌리고 넋이 나간 사람처럼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며 앉아 있자 아빠가 나서셨다.
"두 사람이 좋아하는 결혼이라면 말릴 수 없겠지만 조건을 달았
다. 첫째 언니 결혼 후에 혼인 가능하고 둘째 신랑은 확실한 직
장을 가지고서 정식 청혼을 하며, 은희는 대학 4학년을 마치고
결혼을 하되, 언니의 이제까지 수고를 잊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다."
모든 시선이 내게로 쏠리면서 22살에 노처녀 소리를 듣는 것도
모자라 이젠 똥차 취급을 받게 되는 순간이 되어버렸다.
"일단 아빠의 조건부 허락이 있었으니 나는 아빠의 의견에 따르
겠어요. 그렇지만 결혼이란 그 준비가 만만치 않은 것이니 준비
에 대해서는 차츰 이야기하기로 하구요."
"아이고 처형장모 허락을 받았으니 이젠 다 된 듯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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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며 넉살좋은 곽방근이 내게 큰 절을 했다.
하루 동안 너무 많은 충격을 받아선지 쉬고 싶은 생각만 들었다.
은경이가 내 의중을 눈치 챘는지 엄마를 보내 드리고 나서 부쩍
외로워 보이는 아빠와 예비 형부의 술자리를 주선하고 언니는
쉬라며 손을 잡아끌었다.
"그래 은영이는 들어가 쉬고 자네와 나는 소주 딱 한 병만 하고
헤어지도록 하세. 은경아 술상 좀 봐 오너라."
"예! 아빠"
언제나 성격 좋은 은경이는 시원시원하게 대답도 잘 했고, 동작
도 빨랐기에 큰 걱정 없이 술상도, 동생들의 뒷일도 은경이에게
모두 맡기고 내 방으로 들어갔다.
얼마 전부터 당분간 은수를 은경이가 데리고 자고, 나는 혼자 방
을 쓰고 있었는데 그날은 비가 온다고 보일러를 조금 넣었는지
아랫목에 깔린 이불 밑이 따뜻했다.
형광등을 붉은 취침등으로 바꾸고 옷가지를 벗어 새 옷으로 갈아
입으며 오늘 그가 내게 남겨 준 환영 속에서 그를 그리다가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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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름 후라고 했는데..... 설마 오늘은 찾아오겠지."
가능하면 서점 일에 몰두하면서 그의 소식을 기다렸지만 하루
하루를 더해 열흘이 자나자 기다림은 초조함으로 피를 말리는
시간이 되어버렸다. 산에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그 답지 않은
심각한 얼굴로 오열하는 모습에 당황해 하던 내 모습을 상상하
면서도 금방이라도 그가 웃으며 내게로 올 것만 같아 숨이 막히
는 것 같았다.
"아마 내일은 아침 일찍 가게로 나를 찾아 올 꺼야."
그가 나를 부를 것만 같아 집으로 향하면서도 몇 번이고 고개를
돌려 그를 찾다가 아예 뒷걸음질을 치며 걷곤 했다.
이제 3일이 남았는데..... 딱 한 번만이라도 그를 만나서 ‘당신을
정말 사랑했어요.‘라고 말하고 싶다는 생각에 밤을 새워 뒤척이
다가 어떻게든 그를 만나야겠다고 생각에 그의 집으로 전화를
했다.
신호는 가고 있었지만 받지 않는 전화를 몇 차례 계속하다가 고
장을 문의하자 전화국에서는 3일전에 전화가 끊겼다고 했다.
다행이 곽방근에게 전화가 연결되면서 민우의 소식을 물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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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후 미국으로 간다는 말만 들었을 뿐 그 역시 요즈음 민우를
만나지 못했다며 학교에 가서 알아보겠다고 했다.
“설마? 그런 일은 없을 꺼야. 민우는 그럴 사람이 아니야.”
미친 듯 학교로 달려갔다. 한 번도 그의 학교에 가 본 적이 없었
지만 불어과 4학년 강의실을 찾아 복도에서 서성이다가 강의가
끝나고 출입문을 나서는 사람들 중에서 그를 찾고 있었다.
"혹시 은영씨 아니세요?"
낯선 사람의 질문을 받으며 그가 얼마 전 천마산에 함께 등산을
갔던 주정규라는 친구임을 알 수 있었다..
"어제 왜 공항에 안 나오셨어요? 민우가 힘들어하면서도 연신
은영씨만 찾던데.... 아참! 그렇지. 어제 민우가 떠나면서 은영
씨에게 전해 드리라는 것이 있었는데, 그래서 오셨군요. 잠시
만요."
흐릿한 형광등이 빛나고 팔뚝에는 링거가 꼽힌 채 병실에
누워 있는 내 곁에는 주정규와 이영재, 오창훈이 걱정스럽게 바
라보고 있었다.
"괜찮으세요? 의사선생님은 잠시 쑈크에서 오는 졸도라면서 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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었다가 정신 차리면 가도 좋다고 했어요. 그리고 이건 어제 민
우가 공항을 떠나며 은영씨에게 전해 달라고 했어요."
이영재가 슬며시 붉은 리본으로 묶여 있는 상자 하나를 내놓
고는 뒷걸음질 쳤다.
민우의 출국을 다 알고 있었다는 듯 밝게 웃는 모습으로 고마움
을 표하며 유골함이라도 받아 쥔 사람 마냥 두 손으로 빨간상자
를 가슴에 보듬고, 그렇게 떠나가야 했던 민우를 이해하지 못해,
아니 사실이 아닌 것만 같아 고개를 떨구었다.
"왜? 내게 전화 한 번 걸 필요가 없었니? 민우! 그 새 내가 그
리도 싫어졌어? 책임이라도 지라 할 것 같아 그랬니? 성민
우! 네가 내게 이럴 수 있는거니? 내가 이렇게 너를 그리워하
며 사랑하는데 아무 말도 없이 떠나 버리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하니?"
그의 친구들이 떠나간 병실문이 채 닫기기도 전에 나는 슬픈
눈물을 닦아야 했다.
"은영아! 난 오늘밤 우리를 책임질 수 없을 지도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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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가 책임 져 달라고 했어?"
천마산에서 그와 내가 주고받았던 말들이 생각났다.
"오늘 일들을 그렇게 내게 말했던 거니?"
창 밖에 어둠이 내리고 눈물이 말라 버리면서 낯 선 응급실을
나서 아무 생각 없이 청량리를 향해 걸었다.
"은영이 오랜만이다. 오늘 유난히 물이 좋겠는걸?"
단골 웨이터아저씨가 이끄는 대로 자리를 잡고 싸이키 조명과 광
란의 음악 속에서 술잔을 급하게 비우며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
사실 앞에 버림 받은 자만이 알 수 있는 분노에 힘들어했다.
"성민우! ~~~~이 나쁜 놈아!"
빈 병이 테이블에 늘어나면서 술을 잘하지 못하는 나는 몸을 가
누지 못 할 정도가 되어갔다. 처음 보는 사내들과 감정 없는 춤
을 추다가 테이블로 돌아와 술잔을 들이켰고 적어도 민우는 그
렇게 떠날 사람이 아니라고 “아니야. 거짓말이야.”를 반복하며
‘성민우’ 그를 마음으로 불렀다.
초라한 형광등 불빛, 지린내가 코를 자극하는 지저분한 화장실의
회백색 천정이 눈에 들어 왔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고 싶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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않았지만 너무 과한 술이 목구멍을 타고 넘는 듯 했고, 변기 위에
앉아있는 내게 몇 사람이 웃옷을 잡아 뜯으며 흔드는 것 같았지
만 도저히 두 눈이 떠지질 않았다.
“그러지 말아요. 나 불쌍한 여자에요.”
두 손으로 가슴을 가리며 슬프게 외쳤지만 몸부림도 잠시 그들에
의해 강제로 상의가 찢겨져 나갔다. 위기라고 생각하며 벗어나야
겠다고 흔들거리는 몸을 추스르려고 애를 써 보았지만 풀려버린
다리는 서는 것 조차 거부하는 듯 자꾸 주저앉고 있었고, 그들에
의해 양 겨드랑이가 부축되어 어정쩡한 자세로 바지가 무릎 밑으
로 벗겨져 내려지면서 거부해야한다는, 반항해야한다는, 절대
허락해서는 안 된다는 감정이나 욕망이 나질 않았다.
거북한 속을 다 토해내서인지 정신은 또렷하게 돌아오고 있었지
만 부들부들 떨리는 알몸인 상태로 비명을 지르겠다는 생각이 들
지 않았다. 그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두 다리를 꼬고 그들의 손
이 사정없이 스쳐가는 곳마다 움찔움찔 놀라며 그러지 말아 달
라고 가늘게 애원했다.
"당신들 뭐 하는 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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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늘게 눈을 뜨자 누군가 그들을 화장실 문 밖으로 끄집어내며
억세게 제지하는 것이 보였다.
"이 아가씨가 화끈하게 손 좀 봐 달래서 그러는데.... 형씨! 잠깐
이면 되니 자리 좀 피해 주시오."
반쯤 닫혀 진 화장실 문 밖에서 소란스러움이 있었지만 나와는
관계없는 일처럼 그들이 버리고 간 상태에서 조금도 움직이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정말 이러면 손님들 좋게 이 곳을 나가지 못할 텐데....."
크고 낮은 목소리와 함께 또 다른 사람들의 소리가 들렸다.
"씨벌놈들 대갈빡에 피도 안 마른 것이 여그가 느그 안방이여?
재미는 니들끼리 있는 대서 해야 안 되것냐?"
“얘들아! 이놈들에게서 술값 받고 저 아가씨 옷값하고 차비까지
받아내라. 안낸다고 하면 파출소에 강간범으로 신고하고....."
그 순간까지 나는 아무런 생각을 할 수 없었지만 한 가지 알 수
있던 것은 기대했는지도 모를 가장 나쁜 상황은 싱겁게 지나갔
다는 것이었다.
"은영아! 왜 그러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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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익은 단골 웨이터아저씨가 상의로 벗겨진 몸을 덮어 주며 울
고 있는 나를 안아 주었다.
"그래! 그래 울고 싶을 때 싫 것 울어 버려라. 그렇지만 운다고
해결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단다. 그리고 무슨 일이 있더라도
자신의 몸을 함부로 내던져서는 안돼. 짓밟이고 싶더라도 순
간이 지나면 영원히 네가 힘들어하며 살아가게 되는 시작이
되는 것이니까 그래서는 안돼."
몽롱한 정신으로 얼마 동안 그의 품에 안겨 울다가 결국 웨이터
아저씨가 택시를 동승해서 집 앞까지 데려다 주었다.
그 일이 있은 후 선물상자는 내 방 선반 위에 잘 모셔져 있었다.
민우의 일이며 고고장에서의 일까지 그것들을 정리하고파서 혼
자서 끙끙거리며 3일째 물만 삼키고 있었지만 버림 받았다는 것
에 대한 공포심만 커질 뿐 세상의 모든 것이 원망스럽기만 했다.
그러다가 나이트에서의 순간이라도 떠올리면 너무 초라하고 창
피한 생각에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들 수 없었고, 잠시라도 민우
의 얼굴을 떠올리면 숨이 넘어 갈 것 같은 그리움이 원망스러움
을 앞서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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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우만은 그렇지 않을 꺼야. 민우는 내게 그럴 수 없어.”
수 없이 그를 원망하다 그리워 하다를 반복하며 혹시 모를 그
의 편지를 기다리기로 하면서 차츰 이별에 익숙해지는 자신을
느낄 수 있었다.
"늦어도 5년 후면 돌아오겠지. 그의 소식을 받으면 저 선물상자
를 열어봐야지."
9월 첫째주 토요일 곽방근이 우리 집을 방문 하겠다고 은희
를 통해서 알려 왔다. 은희는 얼마 전부터 화실 일을 한다며 한
달이면 반은 집을 비웠지만 그리 큰 문제가 없는 조용한 동생이
었는데 목요일 저녁인가 은희가 나를 찾아 서점으로 왔다.
"언니! "
"무슨 일이 생겼니? "
나 자신도 민우와의 일로 인해 가슴앓이를 하는 상태였지만 은희
의 초라한 모습에서 ‘어디 아프기라도 한 걸까?’하는 초조함이
나를 감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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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
"괜찮아. 말해 봐."
어두운 은희의 얼굴에서 쉽지 않은 일이 닥쳐왔음이 직감적으
로 느껴졌지만 정말 착하게 살아 온 은희에게 무슨 일이야 있겠
나 싶었다.
머뭇대던 은희의 작은 입술이 조용히 움직였다.
"미안해 언니 ! 사실 나! 그이 애를 가졌어."
‘얘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야?’ 그렇게 말할 뻔한 입을
손으로 틀어막고 놀란 눈으로 은희를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은희가 무릎 위에 얼굴을 묻고 울음을 터뜨렸다. 말문이 막혀
한참 동안을 침묵하며 언니에게 도움을 청하는, 언니로써 별로
해준 것이 없는 은희의 등을 토닥여 주었다.
"그래서 그 사람이 토요일 우리 집을 방문 한다고 하는 거니?"
은희가 아주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생각은 어떤데?"
말문을 닫았던 은희가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말했다.
"언니한테는 너무 미안하고 죄송한 일이지만 아이를 위해서
결혼을 빨리 했으면 좋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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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집에서는 이 일을 알고 있니? 또 우리 집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짐작은 하는 거구? 그 집안은 도대체 어떤 집안이니?"
전혀 생각지 않은 은희의 말에 신경질을 부리며 뱉어 버리듯
말을 쏟아 냈다.
"정말 미안해. 그렇지만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언니가 이해 해줘."
자그마한 체구의 그녀가 드디어 감정을 삭이지 못하고 울면서
내 품에 뛰어 들었다. 나는 말없이 그녀의 등을 쓰다듬으며 신경
질을 부리던 내가 부끄럽다는 생각을 했다.
"아버님 저 이번에 한국항공에 취직을 했습니다. 첫 출근
은 10 월 1일 부터 이고요......."
"그래 무슨 말을 하려는 거냐? 간단하게 말을 해라."
"은희씨와 결혼을 10월에 올릴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아빠께는 전날 저녁 은희 모르게 먼저 전후 사정을 말씀드린
터였다. 서운해 하시면서도 나보다 먼저 결혼을 시키는 것으
로 결론을 내렸지만 전날에 비해 아빠의 모습과 태도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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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무슨 소리야. 언니가 있는데 순서는 지켜야지. 그리고 자네
취직은 했다지만 부모님 허락은 어떻게 하고 집은 또 어떻게 할
텐가?" 은희는 이제 2학년인데 뭐가 그리 바쁜가?"
무릎을 꿇고 앉은 곽방근은 식은땀을 흘리며 은희는 어찌 할 바
를 몰라 했다.
"부모님께 허락을 받았습니다. 결혼을 하면 당분간 본가에서 생
활을 하고 은희씨는 대학을 졸업시키도록 하겠습니다. 은영씨
아니 처형보다 먼저 결혼하는 것이 도리에 어긋나지만 저희들
결혼을 아버님 허락하여 주십시오."
그가 일어나서 아버지께 절을 드리자 옆에 앉아 있던 은희도
덩달아 함께 절을 드렸고, 이내 나에게 두 사람이 큰 절을 하는
통에 황망히 맞절을 하고 말았다.
"은영아! 네가 먼저 해야 할 결혼을 이 사람들이 먼저 하려는 구
나. 네 생각은 어떠니?"
"저는 동생들 다 결혼 할 때까지 시집 안 갈래요. 아빠가 허락
하신다면 은희의 결혼을 축하해 주고 싶어요."
식은땀을 흘리던 곽방근이 환히 미소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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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쯤이면 좋겠나?"
"하루라도 빨리 하자는 저희 부모님 말씀이십니다. 제가 3대 독
자이거든요. 9월 4째 주쯤이 어떠냐고 하시던데."
"예끼 이 사람아! 양가 어른들 인사도 그렇고 혼수도 해야 할 텐
데 어찌 혼사를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한단 말인가? 아무튼
서두르는 모양이시니 우리도 준비는 해야겠고, 우선 양가 어른
들 모임부터 주선하게."
양가 어른 인사는 9월 둘째 주 화요일 시내 롯데 호텔 커피숖에서
가졌다. 그의 부모님은 교직자셨고 그리 여유 있는 집안은 아닌
것 같았지만 두 분 다 훌륭한 부모님이라고 생각되었다.
"아빠! 그 분들이 서두르시는 이유를 아시잖아요?"
"그래 오늘 그 분들을 뵈니 마음이 놓이지만 너를 생각하니 아빠
의 마음이 무겁기만 하구나."
"에이 아빠! 저 때문에 괜히 분위기 잡지 마시고 시내 나온 김에
좋은 곳에 가서 생맥주 한 잔 사주세요."
롯데호텔 지하의 "런던포그"라는 맥주 집에서 아빠가 사주시는
술잔을 난생 처음 함께 잡았다. 나를 바라보시는 아빠의 눈가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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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그 동안 무심히 보았던 잔주름이 깊게 자리 잡고 있었고, 55
세 정년까지 1년2개월 밖에 남지 않은 초라한 아빠의 모습이
가엾다고 생각되어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왜 그러니 은영아! 그러지 마라. 오늘 같은 날 얼마나 좋은 날
이니? 엄마도 좋아 하실 게야."
아빠와 나는 그 날 눈물이 담긴 맥주잔을 함께 마셨다.
처음 해 보는 은희의 결혼 준비여서 어디부터 손을 댈지 몰
라 고민하다가 작은 어머니를 모셔다가 혼수를 준비하기로 하고
먼저 부모님과 자신들이 덮고 잘 비단이불과 베개, 시 어른들께
드릴 예단으로는 양복지와 한복지를 준비하기로 했다.
다행이 급히 서두르는 결혼에 본가에 들어가는 살림이어서 필요
하면 나중에 분가 할 때 장롱과 가전제품을 준비하자는 그 쪽 집
안 어른들의 말씀을 받아드려 간단한 혼례품만을 준비하기로 했
다.
신랑의 양복은 작은아버지가 맡아 주셨고, 당시 처음 나온 컬러
TV와 석유풍로등은 친척들이 하나씩 장만해 주셨다. 우리는 예
물과 시부모 예단만을 준비하는 정도에서 준비를 끝내고 드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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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첫째 주 종로에 있던 신혼예식장에서 두 사람의 결혼식을
지켜보았다.
조용한 은희의 미소는 그 날따라 너무 예뻐 보였고, 국화향 가득
한 예식장에 우뚝 서 있는 제부가 믿음직스러웠다.
"제부 결혼을 축하해요."
"처형장모 고맙습니다."
"언니 고마워!"
"와 딸 부자집 셋째 딸이네."
신랑 친구들이 그 새 미모를 알아보고 은경이에게 집중적인 관심
을 보이는 가운데 "야! 너희들 우리 처제가 태권도 국가대표선수
라는 것 아냐?" 이 한마디에 장난스럽게 집적대던 제부의 친구들
이 슬그머니 줄행낭을 놓았다.
번잡한 손님들 틈에 전날 제대를 했다는 짧은 머리의 하노빈이 결
혼식장에 모습을 나타냈다.
"은영이 잘 있었니?"
"어! 언제 나왔어? "
"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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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와의 어색한 대화가 싫다고 느껴져 신부에게로 달려갔다.
"은희야! 잘 살아야 해!"
제주도를 향하는 신혼의 한 쌍이 잘 살아 주기를 바랬다.
집으로 돌아오며 아빠는 끝내 말씀을 하지 않으신 채 창 밖에 시
선을 고정하시고 가끔 은수의 장난만을 받아 주고 계셨다.
"다들 수고 많았다. 쉬도록 하고.. 은경아! 아빠 술상 좀 봐다오."
잠시 후 노빈이가 제대 인사차 왔다며 눌러앉아 아빠와 벌써 소
주를 2병째 마시고 있었다.
"너희 엄마가 있었으면 얼마나 좋아 했을까?"
아빠는 그 말씀을 몇 번 하시다가 끝내 울음을 터뜨리셨다.
나를 비롯한 동생들은 엄마가 돌아가신 후 처음 눈물을 보이시는
아빠가 너무 안돼 보여 어떻게 위로를 해드려야 할지 어둥대다가
결국 온 가족의 울음보가 터져버리고 말았다.
10시가 넘어 전화벨이 울렸다.
"처형장모! 저희들 무사히 도착 했습니다. 은희 바꿔 드릴께요."
"언니!"
"그래 행복하니? 난 네가 제부와 행복하게 살 거라고 믿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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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화기에서는 은희의 작은 울음소리 밖에 들리지 않았다.
"제가 약속드립니다. 은희를 행복하게 해주고 제가 보아 온 처
형장모의 모습도 결코 잊지 않겠습니다."
제부는 그렇게 말을 했다.
"처형장모의 모습? 과연 그런 말을 들을 자격이 있는 것인지?
처형장모? 처형장모라?......"
다음날 우리 집은 방 사용 문제로 가족회의를 했다. 집에
남은 가족은 엄마와 은주언니, 은희를 제외한 아빠와 22살의 나,
18살의 은경, 아래로 은애, 은미, 은정, 5살의 은수까지 7명이었
고 방을 어떻게 쓰느냐 하는 것이 문제였다.
이제까지는 아빠가 모든 결정을 하셨지만 오늘의 회의는 거의 은
경이의 주도로 매듭이 지어져 가고 있었는데 동생들은 은경이의
눈치를 보느라 불만이라고는 있을 수 없었다.
"아빠! 제가 생각해 보았는데요. 이렇게 하면 어떨까요? 안방은
아빠와 은수 그러니까 남자들 끼리 쓰도록 하시고, 건너 방은
언니 혼자 쓰면 좋겠고, 작은방에는 은애와 은정이, 문간방에는
저와 은미가 썼으면 좋을 것 같아요. 얘들아! 그렇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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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생들이 앵무새 같이 "응 언니!"하고 대답했다.
아빠의 생각도 크게 다르지 않으셨던지 은경이의 제안대로 그렇
게 결정이 나 버렸고 부지런히 이사를 하며 짐 정리를 하였다.
성격 좋은 은경이가 모든 살림을 맡아주고 나서부터 나의 할 일
은 동생들 챙겨주기 그리고 오전 11시부터 저녁 10시까지 서점
을 운영하는 것 외에는 거의 할 일이 없었다.
그나마 은희의 결혼식까지 정말 정신없는 시간을 보내며 문득
문득 민우에 대한 그리움이 넘쳤지만 은희의 일에 정신을 빼앗
기려고 무진 애를 썼다.
은희 부부가 신혼여행을 마치고 신접 살림차 우리 집에 왔다.
제부도를 다녀 온 후로 우리 집에 드나든 그였기에 낯설음보다
는 아주 편안한 모습으로 집안에 들어서며 처제들의 환영을 받
았다.
은희 부부를 위해 건너 방을 내주기로 하고, 엄마가 없다는 흉이
잡힐까 하여 정성을 다해 잔치상을 마련하고는 작은 아버지를 비
롯한 친척들을 모시고 신혼부부의 인사를 받았다.
신랑을 서까래에 달아 매야 할 이용정, 김경백, 성연동, 미국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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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 민우까지 친한 친구가 하나도 없는 탓인지, 예쁜 신부를 얻어
선지, 곽방근은 그저 좋아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그런 그를 지켜보다가 전날 저녁부터 체기가 있어 손톱을 따고
소화제를 먹었지만 가라앉지 않는 거북함에 살며시 물러나와
작은방을 향하며 은경이와 은애가 열심히 일을 하고 있는 부엌을
지나다가 기름 냄새가 싫어선지 심한 헛구역질이 났다.
입을 틀어막고 작은방 아랫목에 배를 깔았다.
"은영아! 소화제 사왔어. 이거 좀 먹어 봐."
문을 열고 노빈의 타는 듯한 시선을 피하며 그가 사 온 소화제를
받아 들었다.
"고마워."
7시부터 시작한 잔치는 10시 가까이 되어 끝이 났고 나는 꼼짝
없이 작은방 아랫목에 배를 깔고 누워서 밖의 사정에 귀를 기우
리고 있었지만 다들 동생이 먼저 시집 간 것에 대해 섭섭함 때문
일 것이라는 생각들을 하시는지 노빈을 제외한 누구도 나를 찾아
주지 않았다.
"성민우! 왜 꼭 그렇게 가야만 했어? 그 날을 책임 질 수 없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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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모른다고 했었지만 나는 책임 져 달라고도 하지 않았어! 그
리고 너는 세상에 태어나 단 한 사람만을 사랑한다고 했잖아?"
갑자기 너무 서글퍼 엉~엉~ 목 놓아 울고 싶어져 이불을 머리까
지 둘러쓰고 소리 없이 펑펑 울기 시작하면서 오랫동안 참았던
그리움에선지 눈물이 멈추질 않았다.
손님들이 다 가고 난 앞마당에 나섰다.
건너 방 신혼부부는 피곤해서인지 방의 불을 꺼 버렸고, 노빈은
빈 술상의 그릇들을 조심스럽게 부엌으로 나르고 있었으며 은경
이와 은애는 부엌에서 소리를 죽여 가며 설거지를 조심스럽게
하고 있었다.
"은영아! 괜찮아?"
"언니~ 눈이 퉁퉁 부었네. 괜찮아?"
"쉿! 수고들 했어. 어서 마무리 짓자. 너무 늦었어."
4명이서 서두른 정리는 10시 반이 다 되어 끝이 났다.
"은경아! 내일 아침 준비하고 시댁에 보낼 물건들은?"
"언니 걱정마. 준비 다 해 놓았어요."
"그래 수고들 했다. 어서 들어가 쉬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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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 오빠하고 나가서 바람이라도 쏘이고 와. 내가 기다릴 께."
은경이에게 떠밀려 나와 노빈이 길거리로 내쫓겼다.
"노빈아 나 술 한잔 사 줄래?"
"무슨 일이 있니? 네 얼굴이 너무 어둡고 슬퍼 보이니 말이다."
"그냥 술이나 한잔 사 줘."
포장마차에 앉아 소주와 꼼장어를 시켰다.
노빈을 바라보며 괜히 그가 정말 밉다는 생각을 했다. 연거푸
술잔을 들다가 그것도 성이 차질 않아 술병 채 입 속으로 쏟아
부었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잔 채우기를 계속하던 그가
더는 못 참겠다는 듯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야! 하노빈 뭐가 어색해졌니? 난 그런 여자야. 난 그런 여자라구.“
“그만 가자. 너무 늦었어.”
“이 손 놔. 이 손 놓으란 말이야. 너나 가. 너나 가 버리라구.”
그 날 난 그가 한없이 미웠다. 마치 당시 힘들었던 나 자신의 모
든 일들이 그를 만났기 때문이라는 터무니없는 이유를 달아 죄
없는 노빈에게 마구 소리를 질렀다.
“이 나쁜놈아! 나쁜 자식. 이 손 놔. 나쁜 놈!
그렇게 소리라도 쳐야 살아있는 나를 느낄 수 있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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