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 장편소설

"완전한 사랑" 5부

독고철 2013. 11. 12. 09:52

 

 

 

5. 숨겨진 비밀

 

 

 

"잘 살아야 한다. 모두 잘 될 꺼야. 언니는 그렇게 믿는다."

친정집을 떠나며 큰 절을 하던 은희가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아빠는 애써 슬픔을 외면하고 있었고, 일어설 줄 모르는 은희를

새신랑이 달래서, 시댁에 보낼 음식 한 짐과 함께 은희는 그렇게

우리 곁을 떠나갔다.

은희를 보내고 전 날부터 속이 더부룩하고 게다가 소주 한 잔까

지 한 것이 거북했는지 체 끼가 가시지 않아 병원을 찾아야 했다.

"체한 것 같지는 않고.... 멘스는 정상적인가요? 산부인과를 가

보도록 하세요. 축하해야 할 일인 것 같아요."

 

                                              1

 

"지금 나에게서 무슨 일이 일어나려 하는 거지?"

병원을 나서며 애써 태연한 척하려 해도 다리가 후들거려 계속

걸을 수가 없었다. 사실 지난 8월 그와의 관계 이후 내게는 한 달

에 한 번 그것이 없었다. 그냥 첫 경험에 놀라서 그러려니 하면서

은희 혼사에 정신을 쏟고 있었는데 이런 일이 내게 닥쳐오리라고

는 생각지도 못하고 있었다.

"임신이 아닐 수도 있어. 딱 하루의 관계였는데.... 임신이 되었다

면 어떻게 해야지? 그럴 리 없어. 임신이 그렇게 쉽게 되나? 소

화가 안 되는 것이 그럼 입덧이란 말인가?"

곁에 없는 민우가 원망스러웠다.

책임 져 달라고는 하지 않겠지만 이 일을 함께 풀어 나가야 할

논의 상대마저 없는 나는 갑자기 혼자라는 것에 공포를 느끼며

온몸이 오그라드는 것을 느꼈다.

"우선은 병원부터 가 보아야지."

신설동 일대를 뒤져 여산부인과 한 곳을 찾았다.

"임신 3개월입니다. 한 달에 한 번 정기적으로 검진 받으세요."

“아빠와 동생들의 얼굴을 어떻게 보아야지? 아이를 지워 버릴까?

 

                                            2

 

안돼! 민우와 나의 아이인데 그렇게 포기 할 수는 없어. 민우는

늦어도 5년 후에 돌아온다고 했어. 나 이제 어떻해야 돼?“

차량이 질주하는 도로를 향해 걸어 나가며 차라리 죽어 없어지고

싶다는 마음뿐이었다. 차량 경적소리며 욕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

지만 그들을 향해 고개를 돌리고픈 마음에 여유가 없었다.

차라리 그냥 밟아 주었으면 하며 눈을 감고 걸어 나갔지만 값 싼

목숨을 가져가는 사람도 없었다.

아무리 바빠도 편지 한 번 아니 전화 한 번만.... 하다가 벼

개를 끌어안고 안타까워하면서 울어 버렸다.

“보름을 남겨 두고도 나를 찾지 않은 그였어. 내가 그렇게 매력

도 없고 형편없는 여자일까? 그저 그렇게 하루 밤 놀이감으로

밖에 보이지 않았을까? 세상에 태어나 나만을 사랑하겠다던

민우는 도대체 어디로 간 것일까?“

선반에 올려놓은 선물박스를 사납게 낚아채서 포장을 뜯어내자

곱게 접힌 편지 한 장과 보석함 하나를 만져 볼 수 있었다.

민우의 싱그러운 얼굴이 그의 냄새와 함께 와 닿는 것 같은 보

석함을 가슴에 품으며 천마산에서 처음 그를 받아 드리기 전

나만의 고백이 생각났다.

 

                                             3

 

"제가 선택한 이 남자와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

저는 이 사람을 진정으로 사랑하기에 오늘을 후회치 않으렵

니다. 설사 그가 제 곁에 없다고 해도 저는 이 사람을 결코

미워하지 않겠습니다. 생명을 다하는 날까지 나만의 비밀이

라도 후회하지 않겠습니다."

한 몸이 되기 전 그가 내게 남겨 준 말들도 생각이 났다.

"시간이 되면 그렇게 너를 보내 주려 했는데 이 곳 천마산에

와서 나는 너의 모든 것을 받았고, 지금 이 순간을 살아 있는

동안 영원히 간직하겠어. 은영아! 이 세상에 태어나 진짜 너

하나만을 사랑했어."

망령처럼 민우의 얼굴이 상자에서 피어올랐다.

리본이 달린 분홍빛 편지봉투 겉에는 "이 세상에 태어나 내가 사

랑한 단 한 사람 조은영께 이 글을 바칩니다. 이 글을 읽을 때는

보석함 뚜껑을 열어 주세요."라고 쓰여 있었다.

떨리는 내 손을 잡아 줄 그가 내 곁에 없음이 허전 했지만 뚜껑

을 열자 보석함에서는 "에델바이스"가 날카로운 쇳소리를 내며

흘러나오고 있었다.

 

                                              4 

 

사랑한다. 은영!

 

나! 성민우는 그대! 조은영을 죽도록 사랑한다.

시간이 되면 자연히 알게 될 사실임을 알면서도

그대를 너무도 아끼고 사랑했기에, 상처 없는 추억

속에 남고자 했던 나를 용서해주라.

하지만 당신을 사랑 할 수 있어 나는 행복했고,

당신은 내 삶에 의미 전부였다고 감히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에게 행복한 시간은 그리 오래 허락되지

않았다. 불행한 일이지만 정릉천 뚝방 일이 있은 1년

후에 머리에 이상 징후가 발견되면서 한 동안씩 네

곁을 떠나 있었던 것은 입원치료를 해야 했기 때문

이었다.

끝내 국내치료 한계를 넘어섰다는 의사선생님 진단

을 받고 부모님과 상의 끝에 마지막 방법이 될지도

모를 미국에서의 치료를 택하게 되었고 그렇게 하기

위해 가족 모두가 이민을 가는 것으로 결론이 나고

말았다.

 

                                           5

  

좀 더 너에게 가까이 가 보고 싶고, 남은 시간에 너

를 사랑하는 내 마음을 네 가슴에 담아주고 싶어 택한

우리의 마지막 여행은 너의 사랑을 영혼으로 받을

수 있었지만 그 이상의 만남은 깊은 상처만 네게 남

기고 갈 것 같아 그리움의 괴로움을, 타 들어가는

내 영혼에게 팔아버린 채 죽음과도 같은 침묵을

지켜야 했다.

 

내 사랑 은영!

앞으로 내 운명이 결정되는 시간은 길어야 5년이라고

했다. 그 동안 미국의 병원에서 죽음과도 같은 생활을

하게 되겠지.

그러나 결코 포기 하고 싶지 않다.

왜냐하면 내게는 돌아오고 싶은 사랑하는 그대가 있

기 때문이고 설사 죽는 그 날이 온다 해도 나는 당신

의 그 팔 안에서 잠들고 싶기 때문이다.

사랑한다. 은영!

 

1979년 8월22일

당신의 영혼까지 사랑하는 성 민우

 

                                          6

 

떨리던 손에 들려 있던 편지지가 방바닥을 딩굴고 통곡을 하고

싶어도 나오지 않는 소리를 질러가며 온 몸을 뒤틀다가 정신을

잃어 버렸다.

아빠가 이상한 소리를 들으시고 건너 오셨다가 쓰러진 나를 안

고 병원에 데려 가셨다고 했다.

"불쌍한 우리 아버지!"

그리 생각하면서도 민우의 얼굴만 머리에 맴 돌았다. 그렇지만

말을 할 수 없는 답답함에 진저리를 치며 떠나려는 그를 붙잡

으려 허공에 손을 휘젓다가 누군가 나의 손을 잡아 주는 것을

느끼며 눈을 뜨던 내 곁에는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아빠와 은경

이를 비롯한 동생들 그리고 노빈이 함께 있었다.

"은영아! 정신이 좀 드니?"

"언니!"

뭐라고 말을 하고 싶었지만 눈물만이 흐를 뿐 말을 할 수 없었다.

다음날 은경이의 도움을 받으며 집으로 돌아 왔다.

방에는 아랫목으로 이불이 깔려 있었고 그 위에 민우의 선물상자

가 뚜껑이 덮인 채로 놓여있었다.

"임신 3개월이라고 했는데, 내 뱃속에는 아이가 자라고 있다."

 

                                           7

 

민우의 그리움보다 아이에 대한 공포감이 나를 짓눌러 왔다.

"어떻게 해야 하는 건가? 아빠나 동생들에게 이 사실을 어떻게

알려야 하지? 아니면 아이를 지워야 하나?"

그가 남기고 간 상자를 끌어안고 그러다가 그의 유언장 같은 편

지를 읽고 또 읽다가 실성한 사람처럼 히물거리며 눈물을 흐리

는 것이 사치라고 생각했다.

"언니! 이것 좀 먹어 봐!"

은경이가 서둘러 야채 죽을 쑤어 쟁반에 받쳐 왔다.

"은경아!"

죽 몇 숟가락을 떠먹이던 은경이를 뒤로하고 돌아누우며 서러

움인지 모를 눈물이 흘러 내렸다.

"언니! 조금만 더 먹자. 의사선생님이 그러는데 잘 먹고 한 이틀

쉬면 괜찮다고 했어. 그리고 민우 오빠 편지를 아빠랑 봤어.

오빠에게 그런 일이 일어나고 있었는지는 정말 몰랐지만 그렇

게 떠나버린 오빠의 심정 또한 무척 괴로웠을 것 같아.

또 이렇게 언니가 힘들어하는 모습을 원하지도 않을 것 같아."

대답을 기다리던 은경이가 한 숨을 쉬며 방을 비우자 숨을 쉬고

있는 나 자신과 아기의 심장 뛰는 소리가 방안에 가득한 것 같

았다.

 

                                         8

 

눈을 뜬 새벽녘 창호지 바른 미닫이문에 달빛이 고여 들며 10월

의 싸늘함이 가슴까지 파고들었다. 어떻게 하든 내 자신이 먼저

모든 것을 결정해야 한다고 마음을 다지며 적어도 그의 의견을

들어봐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가 허락한다면 5년 동안 아니 영원히 혼자서라도 아이를 키우

겠다. 그로부터 소식을 듣기 전까지는 누구에게도 이 사실을 알

리지 말아야지. 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더욱 강해져야 해.“

"은영아! 괜찮아?"

대답을 할 수 없어 그냥 미소로써 답했다.

이 눈치 저 눈치를 보며 노빈이 무슨 말인가를 하려다가 기어이

말을 못하고는 슬픈 눈이 되어 쫓기듯 가게를 나갔다.

"그에게서 연락이 올 꺼야! 민우는 그리 무책임한 사람이 아니

니까. 아니야! 민우는 지금 자신의 목숨을 걸고 싸우는 사람인

데 나에게 연락을 해 줄 만큼 여유롭지 않을 꺼야. 그래도 연락

할 수 있는 주소는 수일 내로 알려 주겠지. 그게 아니야 8월말에

그가 떠났으니 벌써 2달이 지났는데 소식 한 번 없었어."

가게 유리창에 처참히 구겨져 비춰진 나는 민우를 유혹하던 그

 

                                           9

 

날을 함께하면서 결코 후회하지 않겠노라고 다짐 했었지만 창가

에 비춰진 자신의 모습은 초라하고 뻔뻔스럽고 정숙하지 못한

아이를 가진 떳떳치 못한 여자로 밖에 보이질 않았다.

며칠째 아침을 걸렀다.

아니 언제 식사를 했는지 기억이 나질 않았다. 그저 아침이면 눈

을 뜨고 있다는 것이 힘들어 이른 아침 가게로 달려 나와 문을

열고는 가을의 스산함도 잊은 채 늦은 밤까지 혼자만의 공간에

서 숨어 지내 듯한 시간을 보내며 나는 완전히 웃음을 잃어 갔고,

가끔 가게에 들려주는 노빈에게 하지 않아도 될 신경질을 부리

며 마구 박대를 해서 내쫓곤 했다.

짧은 머리에 자그마한 노빈은 그러는 나를 노려보다가 "나 갈께!"

하곤 슬그머니 자리를 피해 주었지만 그 날 따라 11시가 가깝도

록 노빈은 집으로 갈 생각이 없어 보였다.

"왜 안가? 무슨 미련이라도 있니?

빨리 가 버려. 정말 나는 네가 싫단 말이야. 담배연기도 싫고

아니 너하고 함께 숨을 쉬는 것 조차 너무 힘들단말야. 빨리 가

빨리 가 버리란 말이야."

 

                                           10

 

늦은 시간이기도 했지만 발작의 도가 지나쳐 거의 정신병자처럼

소리를 지르며 그를 문 밖으로 내쫓다가 그에게 어깨를 붙들렸다.

"은영아! 왜 그래? 정말 너 답지 않게 왜 그래?"

"이 손 놔!"

그의 손을 뿌리치며 카운터가 있는 책상으로 달려가 엎드린 채

울음을 터뜨렸다.

"생각해 봤어. 그리고 또 생각해 봤어. 내일 나하고 병원에 가자."

"무슨 병원?"

"난 14년 동안 너를 지켜보며 살아 왔어. 지금은 너 자신의 판단

보다는 옆에 있는 사람들의 객관적 사고가 필요한 때라고 생각

해."

"니가 뭔데 그런 말을 하는 거야? 니가 뭘 알기나 알아?"

"난 네가 영원히 친구로 곁에 있으라고 한 사람이잖아."

"그럼 뭘 어떻게 해야 해? 난 지금 어떤 결정도 할 수가 없어."

"은영아! 좀 편안하게 생각하면 안 되겠니?"

어디까지 알고 이런 말을 하고 있을까? 이 친구가 나를 넘겨 짚

으며 떠 보려고 하는 말은 아닐까? 책상에서 고개를 들어 일그러

진 애써 담담한 표정으로 노빈의 차가운 눈을 마주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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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쓰러져 병원으로 옮겨지던 날 의사선생님이 보호자를 찾

아 '환자가 임신중'이라는 말을 했어. 다행이 나 혼자 들었기에

다음달 결혼인데 처갓집 보기가 민망하니 아무 말도 하지 말아

달라고 당부 하면서 본의 아니게 네가 괴로워하는 이유를 알게

되었어.

너를 빼앗긴 아픔이 큰 만큼 미움도 컸지만 상대가 민우라는 점

에서 친구에게 배신을 당한 느낌을 져 버릴 수 없었고, 이렇듯

너에게 참기 어려운 고통을 준 그 녀석이 너무 밉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우선 민우에게 이 소식을 알려야겠다는 생각으로 여러

곳에 수소문을 해 보았어."

염치없이 그를 바라보던 나는 이미 자존심마저 없었다.

"그- 그 곳이 어딘데....."

"민우가 한국을 떠날 때 상태가 무척 안 좋아 침대에 누워 산소

마스크를 끼고 공항을 나갔다고 하더......."

"거기가 어딘데? 민우가 왜 그렇게 하고 나갔는데?"

넋이 나간 사람마냥 바닥에 주저 앉아버렸다.

"은영아! 선택은 네가 해야 해. 자 받아! 민우의 병원 주소야."

 

                                      12

 

구세주라도 만난 것처럼 소중히 메모지를 받아 들고 떨고 있는

나에게 천정에 차가운 시선을 고정한 그가 말을 이어 갔다.

"더 이상 네가 상처 받고 울부짖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아! 그리

고 병원에 가겠다는 결심이 서면 내가 곁에 있어 줄께."

노빈은 그렇게 말하며 비참해져 보였을 내게 눈 길 한 번 주지

않은 채 사납게 문을 열고 거리로 나가버렸다.

아무튼 주소가 적힌 쪽지를 손에 쥐자 그 순간 모든 것이 해결

된 듯 싶었다. 손거울을 보면서 눈물자국을 지우고 서둘러 가

게문을 닫고서 집으로 향했다.

오랜만에 밝은 모습으로 들어서는 나를 보고 은경이가 반겼다.

"언니 좋은 일 있구나. 오빠한테 편지 왔어?"

"응 그래! 민우씨 주소를 받았어."

"커피 한잔 줄까?"

"땡큐~"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밥상을 펴고 앉아 편지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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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우씨 보세요.

 

8월의 우거짐도 이젠 낙엽으로 우리 곁에 남고 당신

과의 마지막 눈 맞춤도 그새 석 달이 흘렀습니다.

만남보다 헤어짐이 어렵다고 했지만 지난 여름, 운명

처럼 현실로 남게 된 비바람 치던 캠핑장 작은 공간

안에서 창백한 모습으로 내게 기대어 오던 당신을 잊

을 수가 없어요.

 

태어나 처음으로 사랑이란 것을 알게 해 준 당신!

언제나 내 곁을 지켜주던 민우씨가 없다는 것만으로

도 나는 하루가 허전하여 살아 있음을 느낄 수가 없

어요.

무작정 찾아 나설 수도 없고, 그렇다고 당신을 원망

할 수는 더더욱 없고, 기약 없는 기다림을 숙제로 남

겨 주고 간 당신!

5년이 아닌 10년인들 당신을 사랑하는 이 마음은

 

                                      14

 

변함이 없겠지만 "기다려 달라."는 당신의 그 한마디

약속이 너무도 내겐 소중한 오늘이랍니다.

 

주소지가 병원이던데 치료는 생각대로 잘 되어 가는

것이겠지요? 언제나 긍정적이고 적극적이고 원만한

당신이니 잘 견뎌 내리라 믿으며 이 글을 받는 대로

"기다려 달라" 그렇게 내게 말 해 주세요.

나는 당신만을 사랑하며 영원히 기다리며 살겠습니다.

민우씨~설마 전화번호를 잊은 것은 아니겠죠?

혹시나 해서 알려 드릴 께요. (543-6750)

 

1979.10.31 조은영 드림

 

 

 

 

 

 

 

                                          15

 

답장을 기다리는 날들은 내게 너무 행복했다. 그가 내 편지를 받

으면 미친 듯 "기다려줘. 사랑한다."며 답장을 보내오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가끔 노빈이 가게에 들르면 주소를 알려 준 그가 너무도 고마워

행복한 마음으로 그를 대할 수 있었고 그도 나를 예전과 같이

생각해 주는 것 같았다.

시간이 지나며 배가 불러 오는 것을 느끼면서 가족들이 모르게

배를 동여매기 시작해야 했지만 키가 크고 그리 날씬하지 않았던

덕에 이상해보이지는 않았다.

11월15일 첫 눈이 서울에 내렸다.

창가에 허연 김이 서리더니 못 생긴 얼굴 하나가 창문에 얼굴을

온통 찌그려 붙이고 가게 안을 노려보고 있었다. 청소하던 빗자

루를 집어 던지고 그를 향해 달려 나가 문을 밀쳤다

."야~아아 민우..."

"그렇게 반갑냐? 첫눈 오는 날 은영이에게 환영 받기는 오늘이

처음이네."

창가 볼따구를 붙이고 서 있다가 달려 나오는 나를 보고 짐짓 놀

라는 척하며 노빈이 말했다.

 

                                       16

 

"으~ㅇ 그래 반갑다. 어서 들어와."

"가게문 그만 닫고 우리 어디 가서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 뭐 먹

고 싶은 것 있니?"

가끔 노빈이가 가게에 들러 먹고 싶은 것을 사주 곤 했는데 첫눈

이 온다고 내게 들린 모양이었다.

"야! 너 나이가 몇인데 아직 첫눈 오는 날 데이트 할 상대도 못

찾았냐? 임자 있는 몸한테 공 들여 보았자 꽝인 걸 모르냐?"

오랜만에 낄낄대며 웃었다.

"그래 임자 있는 몸이 홀몸이 아니라서 걷어 먹이려고 왔다."

"너 죽을래? 남 들으면 어쩌려구."

"빨리 입 막아라. 아니면 가게 앞에서 큰 소리로 광고 할 꺼다."

그의 팔을 가게 안으로 끌어들이며 꼬집어 뜯었다.

"아야야 아따거~"

보름이 지나면서 나도 안정을 찾아 갔고, 노빈이도 진정 친구를

위하는 마음으로 나를 대해 주었다.

"노빈아! 나~ 장춘동 족발 먹고 싶었는데...."

"그래? 나도 족발 먹고 싶었는데, 내 금방 다녀올께."

 

                                      17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노빈이 뛰쳐나갔다.

"노빈아! 올 때 순대도 좀 사 와라"

한 시간 반 만에 돌아온 노빈의 손에는 장춘동 원조 할매 족발과

순대가 들려 있었다. 마침 은경이가 은수를 데리고 가게로 나왔

다가 함께 첫 눈 파티를 하며 가게는 오랜만에 웃음이 넘쳤다.

 

한 달이 지났지만 그로부터 소식이 없었다. 주소가 잘못 되

었으면 편지라도 되돌아 와야 하는데 그럴 시간이 너무 지난 듯

싶었고, 그에게 아기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겠다는 생각에 다시

편지를 쓰기로 했다.

 

                                     

그리운 민우씨

 

당신이 달려와 곧 나를 안아 줄 것만 같은 환상 속에

기다린 한 달이었습니다. 우체부 아저씨의 행낭이 전부

당신의 편지인 것 같고 우편함을 아침저녁으로 기웃

거리며 당신의 소식을 기다렸지만 무언가의 착오로 시

간만 흐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18

소식을 전하지 못 할 만큼 힘든 시간인가요?

그렇다면 소식을 기다리는 은영이가 기다림에 익숙하

질 못해서 일 테고 기다리기에는 우리 두 사람의 아니

당신의 의지 한마디가 너무도 소중하여 오늘 이렇게

다시 편지를 띄우면서 당신이 내게 남겨 준 "이 세상에

태어나 단 한 사람 조은영만을 사랑했다."라는 당신의

그 말을 영원히 믿고 싶어요.

 

사랑하는 민우씨!

그냥 "사랑한다"고, "기다려 달라"고 단 한마디라도 해

주세요. 당신의 변치 않은 사랑만을 알게 되면 나는 더

없는 행복으로 기다림에 익숙해 질 것만 같고, 우리들

의 아기도 행복해 할 것 같아요.

민우씨 사랑해요.

 

 

1979년 11월30일 당신의 조은영 드림

 

                                    19 

 

조바심은 들었지만 빠르면 20일 정도 지나 답장이 오리라 기대를

하며 밝은 모습으로 집안일과 가게 일을 꾸려 나갔다.

서점은 제법 수익을 내기 시작해 이자와 원금을 함께 갚아 가고

있었고, 시집간 은희와 제부가 생활비 일부를 보내 와 그런 대로

생활에 부족함이 없이 지내고 있었다.

아빠가 내년 2월에 정년퇴임 하신다는 점과 내가 홀몸이 아니라

는 점을 빼고는 큰 문제가 없었지만 민우로부터 편지만 오면 아

빠께 말씀드리고 아기를 낳아 키우겠다고 생각했다.

"민우가 돌아 올 때까지 동생들과 함께 보살피며 살면 되지. 뭐."

1997년 12월 24일 드디어 미국으로부터 한 통의 편지가 날아들

었다.

 

 

                                     20   

 

은영이에게

 

결론만 간단히 말 하겠다.

현재 민우는 사경을 헤매고 있다.

또 병이 낫는다고 해도 너와는 혼인 시킬 수 없다는

우리 가족들의 결론이니 이상한 편지로 더 이상 문제

를 일으키지 말고 이 정도 선에서 민우를 잊도록 해라.

두 통의 편지는 분명히 민우에게 전달했고 답장을 쓸

형편이 되질 않아 내가 대신 쓴다.

 

1979.12.10 민우 엄마

 

 

눈물도 나질 않았다.

"민우가 그럴 리 없어. 나만을 사랑 한다고 했는데....."

곁에 있던 노빈이 편지를 빼앗아 읽고 나서 멍하니 창가를 바라

보는 나의 머리를 안아 주었다.

 

                                      21

 

"노빈아! 나 이제 어떻게 해야 해? 응~ 노빈아!"

"아냐. 그 사람은 절대 그런 사람 아니야. 뭔가가 잘 못 되었어.

그렇지? 노빈아! 네가 아는 민우도 그런 사람 아니잖아?"

말없이 노빈은 눈물과 콧물이 범벅된 나의 머리를 끌어안고서

부르르 떨고 있었다.

"이제~ 이제 나는 어쩐다지?"

뱃속의 아기는 이제 제법 힘찬 움직임이 느껴지기 시작했고 광목

으로 동여맸다고는 하지만 벌써 지난달부터 동네 목욕탕을 가질

못 할 정도로 배가 불러오고 있었다. 울어서 해결 될 일이 아니라

는 생각이 들면서 어떻게 해야 할지를 결정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밤을 꼬박 새우고 노빈을 불러냈다.

"노빈아! 제3자 입장에서 네가 나라면 어떻게 하겠니?"

"은영아! 일단은 병원에 가 보도록 하자. 그리고 나서 결정 할일

아니니?"

아주 낮은 목소리로 노빈이 답했다.

"병원에 가서 뭘 어떻게 하자고?"

"네가 결정할 일이야. 혼자서 낳아 키울 수 있다면 그렇게 해야겠

지만 ..........."

 

                                          22

 

"다시 한 번 편지를 쓰면 어떨까?"

지난 편지에 "당신의 아기를 가졌어요." 라고 확실하게 쓰지 못한

것이 후회스러웠다.

"노빈아! 한 번만 더 편지를 해 볼께."

솟구쳐 오르는 눈물을 소매에 떨구며 울지 않겠노라, 후회하지

않겠노라 마음으로 다졌지만 단 하루의 관계로 내 뱃속에 자라고

있는 이 생명에 대해 엄마라는 생각이 머리를 짓눌렀다.

 

민우씨 보세요.

 

이렇게 당신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고, 그러기에는

당신을 사랑한 나의 마음이 너무 깊기에 당신이

내게 하고픈 진실된 마음을 알고 싶어 오늘 이렇게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편지를 쓰고 있네요.

 

"세상에 태어나 너 만을 사랑한다."던 당신의 그 음

성이 아직도 귓가에 쟁쟁하건만 당신의 엄마로부터

 

                                    23

 

받은 편지는 그 모든 것을 한 순간에 정지 시켜 버

렸고 그것은 마치 깊은 수렁에 빠진 듯한 어둠 속에

목을 졸리며 갇혀 있는 것 같은 생각이 들었어요.

 

그렇지만 사랑하는 민우씨!

그 날 우리는 서로에게 처음인 모든 것을 허락하면

서 우리만이 가질 수 있는 소중한 것을 갖게 되었

답니다.

우리들의 아기 말입니다.

치료차 그 곳에 간 당신에게는 이 소식이 희망이

되어 기쁨을 드릴 수도 있겠지만 행여 고통을 드리

게 될 수 있다는 생각에 당신의 "기다려 달라."는

그 한마디면 혼자서 아기를 키우며 세월을 기다릴

생각을 했었습니다.

 

6개월째인 당신과 나의 아기!

"기다려 달라."는 당신이 있다면 나는 그 무엇도 두

렵지 않고 당신만을 기다리며 굳굳이 살아 갈 수

있습니다.

 

                                    24

 

당신이 원하지 않는 우리들의 아기가 아니기를 간절

히 빌며 답장을 고대 합니다.

 

 

1980.1.3 조은영 드림

 

 

80년 1월 15일 은희가 건강한 사내아이를 낳았다. 제부인

곽방근과 은희는 행복한 모습으로 아기를 바라보고 웃었다.

"좋은 소식이 오겠지. 아무렴."

축복 받는 조카가 한 없이 부러웠다.

언제나 기다림은 초조하지만 그의 답장이 꼭 올 것이라는 희망

으로 하루하루를 보내던 어느 날 예고 없이 은경이와 노빈이

가게로 들어섰다.

"은영아! 나 왔다."

"넌 복학 준비도 않니? 그런데 손에 있는 것이 뭐야? 그리고 은

경이는 은수를 어떻게 하고 왔니?"

 

                                     25

 

"으 ~ㅇ 언니! 은수는 은애에게 맡기고 왔어. 잠깐 왔는데 뭘?"

"은영아! 가게는 은경이에게 맡기고 둘이서 극장이나 가자."

"그래 언니 허리우드 극장에 가면 요즈음 '초원에 빛'이라는 영화

를 하는데 눈물 없이 못 본대. 가게는 내게 맡기고 오빠랑 다녀

와요."

"너랑 둘이 가라. 곧 졸업하면 너도 출근해야 되니까 시내에 나간

김에 옷도 좀 사고, 노빈이랑 영화라도 한 편 보고 와라."

"얘는 정말 대책이 없어. 내가 네 친구지 은경이 친구니?"

아직 남의 눈에 뜨일 정도는 아니지만 8개월째인 뚱뚱한 배가 부

담스러워 가기 싫어하는 나를 두 사람이 내 쫓듯 가게 밖으로 밀

어내 버렸다.

2월의 잔뜩 흐린 날씨는 금새라도 눈을 퍼부을 것 같았고, 주머

니에 손을 찌른 채 바쁜 걸음을 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며 회색

빛에 쩔어버린 서울이라는 생각을 했다.

회색빛 하늘... 며칠 전 내렸던 눈으로 주저앉은 회색빛 거리...

초췌한 사람들의 회색빛 얼굴.... 달리는 버스에서 내뿜는 회색빛

매연.... 모두가 죽어버린 듯 싶은 처참한 서울 거리에 내가 팽개

쳐져 있는 듯 했다.

 

                                         26

 

지하철을 타고 종로2가에 내려 낙원상가로 갔다.

말 없는 노빈의 슬픈 눈을 훔쳐보다가 "노빈아! 나 하고 극장에

가고 싶지 않지?" 하자 희극배우 마냥 노빈이 금새 얼굴 빛을 고

쳐 잡고 딴청을 피웠다.

"그래 네 몸에 아기가 내 아기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했다."

"뭐라고? 그런 말이 어딧어."

노빈은 달아나고 나는 가방을 들어 사정없이 그에게 휘둘렀다.

"표 살 테니까 천천히 와라."

그는 바람같이 파고다공원 담장길을 혼자서 뛰어 갔다.

그 동안 사는 것이 너무 바빴어. 그 흔한 연애 한 번 제대로 멋

지게 해 보지 못하고 그저 동생들 뒷바라지에 돈 벌어 이자 갚

는 것이 근래 몇 년의 내 생활이었다.

그래도 내 곁에는 다른 친구들이 갖지 못 한 좋은 친구들이 많

이 있었잖아? 그런데 민우에게서 왜 답장이 없는 거지?

1월 5일 우체국에서 편지를 붙였고, 오늘이 2월 10일이면 답장

올 때가 지났는데.......민우의 멋 적어 하는 모습이 떠올랐다.

그는 항상 내 주변에 있었어. 힘들어 할 때 나를 위로해 주고,

내가 원할 때 그는 모든 것을 주었어. 그가 보고 싶었다.

 

                                           27

 

"은영아! 사랑한다. 이렇게 답장을 주세요."

노빈의 손에 이끌려 영화관 안으로 들어갔다. 고교시절 사

랑하는 사람들이 서로를 원하면서도 끝내 이루어지질 못하고 훗

날 서로 다른 사람과 결혼한 상태에서 만나게 되지만 옛사랑을

못 잊어 하면서도 서로의 행복을 빌며 발길을 돌리면서 초원의

빛이라는 시가 화면을 채운다.

 

초원의 빛

워즈워드

 

한때엔 그리도 찬란한 빛으로서

이제는 속절없이 사라져가는

돌이킬 길 없는

초원의 빛이여, 꽃의 영광이여

우리는 서러워하지 않으며

뒤에 남아서 굳세리라

존재의 영원함을

티없이 가슴에 품어서

인간의 고뇌를

사색으로 달래어서

죽음도 안광에 철하고

명철한 믿음으로 세월 속에 남으리라

 

                                   28

영화가 계속되는 순간 나는 울음을 멈출 수 없었다. 왜 그렇게

슬피 울었는지 지금도 이해되질 않지만 아무튼 노빈을 졸라 계단

에 쪼그리고 앉아 다음 상영을 한 번 더 보면서도 나는 울음을

멈출 수 없었고 눈이 퉁퉁 부운 모습에 개의치 않고 종로거리로

나섰다.

"노빈아! 오랜만에 시내에 나섰으니 술이나 한잔 사 줄래?"

"좋지! 은영이 답다. 좋은 곳이 있어."

노빈은 "피마골"이라는 술집 골목으로 나를 데리고 갔다.

옛 주막 같이 생긴 술집에 들어서 약주와 파전, 매운 낚지 볶음

을 시켜 놓고 노빈과 술잔을 주고받았다. 아기를 가지고부터

가끔씩 마시던 술이 제법 늘어나 그 날 노빈과 꽤 많은 술을

저녁 9시가 다되도록 함께 마셨다.

"은영아! 나랑 결혼하면 어떻겠니?"

"너! 술 취했니? 아니면 술 먹고 나를 희롱하는 거냐?"

"아니야! 아니야! 천하의 조은영을 누가 희롱하겠냐? 그런 뜻

이 아니고 다른 사람에게 너를 빼앗기기가 너무 아깝다는 뜻

이다."

 

                                         29

 

노빈에게만 기세등등하게 주먹을 쥐고 눈을 부라리는 내가 터

무니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심술을 볼 가득히 채운 내 모습

이 상상되어 그와 함께 오랜만에 입을 찢을 듯 웃어 제꼈다.

"내가 너와 결혼 안 하길 다행이지, 조금만 기분만 나쁘면 지금처

럼 주먹을 쥐고 달라 들어 두들겨 패면 난 어찌 살겠냐?"

10시가 다 되었다. 우리도 이젠 집으로 가야 할 시간 이었다.

"은영아! 민우로부터 소식이 없으면 어떻게 할꺼니?"

"............"

"만약에 "

순간 불길한 예감이 스쳤다.

"만약에 뭐? 빨리 말해 봐? 만약에.... "

"만약에 민우에게 무슨 일이 있어 네게 답장을 영원히 못한다면

어떻게 할거니?"

"노빈아! 너 내 친구지? 시원하게 말 좀 해주면 안 되니?"

눈물이 가득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던 노빈은 한 장의 편지를 내

게 남겨주고 화장실을 간다며 술집 밖으로 나가버렸다.

편지와 노빈을 함께 바라보다가 낯익은 편지의 겉봉에 덧붙인

 

                                       30

 

작은 글씨들에 눈길이 멈추고 어두운 조명 탓인지 가득 담긴 눈

물 탓인지 흐릿한 글씨들을 읽어 나갔다.

 

" I regret to inform you that Mr.Sung died

on January 15,1980 at this hospital. "

(유감스럽게도 미스터 성은 1980년 1월 15일

이 곳 병원에서 사망하였음을 알려 드립니다.)

 

"잘못된 것이겠지. 이게 무슨 글이람?"

그렇지만 회송된 편지는 내 글씨였고,내용 또한 분명한 사실이

었다. 계산대에서 돈을 치루고 밖으로 어슬렁거리며 나오면서

단 하루의 관계로 아기를 갖게 된 사실도 믿기 싫었지만 그리

믿었던 그가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는 충격을 받아 드릴 수 없

었다.

노빈이 뒤에서 뭐라고 불렀지만 그냥 거리를 향해 달리고만 싶었

다. 질척한 회색겨울 끝자락에서 숨이 콱 막힐 때까지 달리며 이

대로 모든 것을 끝내 버리고 싶었다.

 

                                        31  

 

몽롱한 천정에는 강한 불빛에 눈이 부셨지만 그것을 느끼는

것도 잠시 아무런 생각이 나질 않았다. 태어나 3번째의 병원신세

를 지며 첫 번째는 민우가 곁에 있었고, 두 번째는 노빈이, 세 번

째도 가족들과 노빈이 내 곁에 있었다.

"은영아 정신이 드니?"

대답대신 고개를 돌리고 나는 아무 생각도 하지 않으려고 입술을

깨물었다.

"괜찮다. 시련이란 누구에게나 있는 게야. 엄마의 죽음을 보았지

않니? 아빠는 그래도 너희들을 보며 이렇게 살아가고 있고, 어

떠한 경우에도 모진 생각은 하지 말아라. 그럴 용기가 있으면

인생을 헤쳐 나갈 생각을 먼저 하고 자신을 불행하다고 생각하

기에 앞서 자신보다 더 불행한 사람들이 훨씬 많다는 것을 알아

야 한다."

그날은 은경이와 노빈이가 밤을 새웠다.

은경이가 자리를 비운사이 노빈이 물었다.

"괜찮니?"

"나 어떻게 된 거야?"

 

                                          32

 

"술집에서 뛰어 거리로 나온 후 얼마 동안을 걷다가 바로 찻길로

뛰어들었어. 말려 보려 했지만 너무 순간적인 일이었고 ...... "

"아기는?"

"제왕절개로 아기의 생명은 구했어."

"어디 갔어? 내 아기........"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조금도 움직일 수 없었다.

"진정해. 내 말을 믿어. 딸아이인데 8개월이 조금 모자라게 태어

나 인큐베이터에 들어가 있어. 네 몸이 나으면 만날 수 있을 꺼

야."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를 아이의 소식에 고개를 벽 쪽으로 향하고

가늘게 신음하며 눈물 흘렸다.

두 다리에 타박상이 있었고 갈비뼈가 6대나 금이 간 상태에서 제

왕절개를 해서라도 아이를 살려 보자고 결정한 사람은 노빈이었

다. 그러나 아빠를 비롯해 그 누구도 아기에 대해서는 말을 꺼내

지 않았고 은경이를 제외한 동생들은 그 사실을 모르는 듯 했다.

나는 입원 5일만에 노빈이가 밀어 주는 휠체어를 타고 가슴 졸

이며 신생아실 유리관 속에 있는 아기를 처음 만나 볼 수 있었다.

 

                                          33

 

주름져 늘어진 피부사이로 살이라고는 붙어 있질 않은 검붉은 피

부를 가진 힘든 숨을 몰아쉬는 아기를 바라보며 안아 줄 수도 불

러 볼 수도 없는 안타까움에 그저 말없이 눈물을 찍어 내야 했던

기억들....나는 하루도 빠짐없이 바라만 볼 수 있던 아이를 찾아

가 아가를 위해 무엇 하나 할 수 없는 못난 엄마 모습으로 깊고

긴 용서를 빌 뿐이었다.

병원 생활 15일이 지나고 이틀 후로 퇴원일이 결정되자 입원 첫

날 이후 못 뵈었던 아빠가 술을 드신 모습으로 병원을 찾아 오셨

다.

"은경아! 아빠의 생각인데 아이를 우리 집으로 데리고 가서 살

린다는 보장이 없구나. 또 아기의 아빠도 이 세상 사람이 아니

고.... 그렇다고 너와 저 어린 것이 함께 지금부터 평생 고난의

길을 가야 하는 것이 아기나 너를 진정 위하는 길이 아닌 것 같

고...... 그래서 말인데 은영아! 해외입양을 알아보는 것이 가장

현실적인 방법일 것 같구나."

"아빠! 아이를 키우고 싶어요. 집에서 키우기가 어려우면 제가

집을 나와서 혼자서 아기를 키우겠어요.."

 

                                      34

 

라는 준비된 말이 입안에서 맴돌았지만 아직 돌봐야 할 어린

동생들과 며칠 전에 정년퇴직 하신 아빠를 생각하며 대답대신

담요를 머리끝까지 덮어쓰고 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이를 악물

고 온 몸을 비틀었다.

한 편으로 모두에게 원했든 원하지 않았든 우리 아기를 이런

결정에 끌어 드려야 하고, 아빠 그리고 동생들을 내게 짐으로

남겨 주신 엄마가 원망스럽다는 생각을 했다.

가족의 생계와 어린 동생들, 그리고 유리관 속에 도움을 필요로

하는 아기의 가냘픈 숨소리가 골수를 파고들어 할 말을 잃은 내

게 아빠는 어깨를 다독거려 주시다가 아무 말씀 없이 돌아가셨다.

"노빈아! 솔직하게 말해 봐. 난 네 말을 따라야 할 것 같다."

퇴원전날 유리관 앞에 두 사람이 아기를 바라보며 했던 말이다.

"뭘!"

노빈이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아빠가 아기를 외국에 입양시키자고 하신다."

"참아 낼 수 있니?"

"나도 모르겠어. 나 혼자라도 키우고 싶지만 내게는 엄마와 약속

 

                                         35

 

한 아빠와 동생들이 있고, 인큐베이터의 아기를 당장 키우기엔

가진 것이 너무 없다는 것이 힘들어"

지쳐 아무 감각도 없는 머리와 두 눈을 노빈의 어깨에 가만히 맡

겨 버렸다.

"은영아! 나도 몰라. 그렇지만 유리관 속에서 자라야 할 미숙한

아기를 혼자서 키운다는 것은 너나 아기나 모두 불행해 질 수

있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어. 잔인한 일 같지만 민우가 없는 현

실에서는 아기가 입양되어 좋은 환경에서 자라게 하는 것도 아

기를 위해서 좋은 일이라고 생각된다만......"

"정말 아기를 위해서 그렇게 하는 일이 최선일까?"

시간이 되어 아기와 헤어지며 가늘게 숨을 이어 가는 어린것에게

"이렇게 마지막이 될 수는 없다고..." 마음속으로 되 뇌이면서 태

어나 한 번도 운 적이 없고 기껏해야 하품 정도만을 할 수 있는

작고 주름진 아이에게 내가 무슨 짓을 저지르려는지 반문하면서

뜬 눈으로 밤을 새웠다.

다음날 퇴원 전에 해외입양지부에서 나온 사람을 만나 노빈이 배

석한 가운데 친자포기서와 입양동의서를 썼다.

 

                                           36

 

"아기는 어떻게 되나요? 계속 유리관에 있게 되나요?"

"걱정 마세요. 아기가 충분히 자란 다음에 입양 절차를 밟도록 하

겠습니다."

"아기가 병원에 있는 동안 찾아와서 봐도 될까요?"

"부인이 원하시면 언제든지 볼 수 있지만 눈으로 인큐베이터 안

에서만 만날 수 있고, 신체적인 접촉은 할 수는 없습니다."

아무 생각도 없이 죄를 짓고 있다는 강박관념에 슬픈 표정으로

울면서 나는 그 날 바보스럽게 모녀 이별 서약서에 인장을 찍어

버렸다.

“정말 잘 한 결정이야. 나는 아이를 키울 능력이 없어.

이렇게 하는 것이 아이를 위한 최선책이야."

라고 애써 결론지으며 살아 있는 것 같지 않는 육신을 은경이와

노빈에게 맡겨 버렸다.

아빠가 정년퇴임을 하신 후 아무 일이나 하시겠다고 일자리

를 찾아 나섰지만 당시 일자리는 정년 퇴임자에게 까지 돌아 올

차지가 없었다. 생활은 책방에서 들어오는 수입과 은경이의 월

급, 은희네 부부가 보태 주는 돈으로 우리 7명의 의식주와 교육

 

                                          37

 

비, 가게를 하면서 친척들에게 진 빚과 이자 일부를 갚아 나가고

있었다.

아침과 저녁 2차례 면회시간에 병원을 찾아 아이가 점차 자라나

는 모습에 안도 하며, 1개월이 지나자 눈을 가늘게 뜨고 세상을

보고자 마치 자기를 버린 엄마를 찾아내려는 듯한 가냘픈 몸부

림을 슬프게 바라보는 날들이 더해갔다.

나만의 아기 이름도 지었다.

"성민영"

내 첫 딸아이 이름은 민우씨의 민자와 내 이름 은영에서 영자를

따서 "민영"이었다. 배냇저고리에 꽃 실로 이름을 새겨 아이에게

입혀준 것이 엄마로써 아기에게 줄 수 있었던 처음이자 마지막 선

물이었다.

"민영아! 못 난 엄마를 용서해 다오."

그렇게 하루에도 수백 번 용서를 빌며 아침저녁으로 인큐베이터

앞 면회실에서 안아 보는 것 조차 허락되지 않은, 그저 바라만 볼

수밖에 없던 아이는 두 달이 넘어서면서 얇게나마 미소 짓기 시작

했다.

 

                                            38

 

아는지 모르는지 비록 유리창 안이었지만 간호사가 안고서 얼르

며 첫 모녀 상봉을 주선 할 때, 아이는 아직 완전히 떠지지 않은

눈을 내게 맞추려고 애를 쓰다가 결국 작고 가냘픈 울음소리를

내며 너무도 슬피 울었다.

마치 긴 이별을 예감이라도 하듯....

 

"간호사님 우리 민영이 어디 갔지요? 예? 간호사님!"

"진정하세요. 힘드시겠지만 참으셔야 해요."

"노빈아! 노빈아!"

정신을 놓지 않으려고 혀를 깨물면서 거리를 배회하다가 미친 듯

노빈에게 전화를 했다.

"노빈아! 나 민영이에게 데려다 줘. 딱 한 번만 민영이를 멀리서

라도 보고 싶어서 그래. 노빈아!"

창피함도 모르는 모정의 질긴 끈을 감아 잡고 어떠한 일이 있어도

나는 민영이를 다시 찾아 와야 한다고 결심하며 노빈에게 도움을

청하고 있었다.

 

                                             39

 

"노빈아! 나 못 살 것 같아. 내게 민영이를 찾아 줘. 노빈아!"

거리에 쓰러져 울부짖는 나를 끌어안고 그는 자정이 가깝도록

곁을 지켜 주었다.

"은영아! 이제 아픔은 시작일 뿐이야. 하지만 우리가 택한 길이

최선책이었다는 걸 다시 한 번 생각하고 며칠 후에 그래도 네가

원한다면 함께 민영이를 데려오자."

눈물도 말라버렸고 아이를 데려 올 수도 없는 나의 처지를 괴로

워하며 나는 우울증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민영이를 생각하면

자다가도 가슴이 벌떡거리며 숨이 차 곧 죽어 넘어 갈 것만 같

았다.

아이의 울음소리가 머리를 가득 채우면 나는 가게를 나와 민영

이가 있다던 합정동으로 정신없이 달려갔고, 몽롱한 상태로 거

리에 나 앉아 있는 나를 아빠와 노빈이 집으로 데려오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이와 함께 둘이서만 멀리 떠나 버리겠다고 결

심한 나는 아빠와 동생들이 잠든 집을 향하여 큰 절을 하고서 집

을 나섰다.

옷가지가 든 가방을 한 손에 들고 떨리는 손으로 그 곳의 문을

 

                                        40

 

열고 들어서서 원장님을 만났지만 너무 늦은 결심에 나는 무

너져 내리는 안타까움에 주저앉아 울어야 했다.

"민영이는 이미 이 땅에 없었던 것이다."

 

5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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