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서론
그 친구와 만난 것은 필자가 중학교 1학년이 되면서였다. 보기 드문 뻐덩니에 노숙한 폼으로 얼굴에는 무지막지한 여드름을 달고 큰 키 탓에 같은 반 뒷자리에 함께 어슬렁 거렸던 그는 공부도 그렇지만 주먹질도 전교에서 둘째가라면 서운해 할 친구였다.
집이 같은 방향으로 급격히 가까워진 두사람은 당시 전차를 타면 그만일 3km 정도 되는 거리를 걸어서 매일 함께 하교를 했었고, 아낀 차비로 빵집에 들러 곰보빵과 팥빵을 함께 사먹으며 중학사춘기 시절과 고교 철없는 방황시절을 함께 보냈다.
그리고 지금까지 몸은 떨어져 있어도 한시도 잊은 적이 없는 결론은 46년이나 된 지독한 친구사이라는 말이다. 이번 여행은 우리가 적지 않은 나이까지 살면서 함께 여행할 기회가 그리 많지 않았고, 서로 멀리 떨어져 살고 있으니 건강 할 때 함께하는 시간을 많이 갖자는 마음으로 태동 되었다.
이 글은 58세때의 여행기이다. 필자의 글이 늘 그렇듯 일단 써놓은 글은 수정을 거의 하지 않고 블러그에 남기고 있다. 행여 불편한 이야기가 있더라도 이해하기 바라며 여행기를 시작하겠다.
* 태항산 대협곡 입구
2. 중국과 태항산
우선 중국이라는 나라가 상상을 초월하는 넓이의 나라이므로 (남한 면적의 98배) 지명도 그렇지만 방향감각을 전혀 느낄 수가 없을 것이라는 전제하에 지도상으로 이번 여행지에 대해 알아보았다.
버스에서 보내는 시간이 대부분이므로 버스이동 시간을 기록했다. 아래 버스시간은 대형버스 이동 시간이며 소형버스 이동시간이나 관광시간은 제외했다.
1일차 | 2일차 | 3일차 | 4일차 | 5일차 |
청도-요성 | 요성-신향 | 신향-임주 | 임주-제남 | 제남-청도 |
7시간 | 8시간 | 5시간 | 7시간 | 5시간 |
중국의 지도를 놓고 연구해 보면 우선 태항산은 중국의 수도 뻬이찡이 있는 하북성, 인구 4300만명 사는 정주시가 있는 하남성, 시진핑의 고향 산서성 3개 성에 걸쳐 있는 720km 길이의 대산맥을 말한다.
여행을 출발하는 산동성과 하남성, 하북성 3개성에 사는 인구는 2억명이고, 남한 땅 넓이의 15배가 되는 면적이며, 이곳에서 중국 14억명 인구의 식량 60%를 생산하는 곳이라고 한다. 무협지나 기타 중국소설에 “중원”이라고 나오는 그 무대가 바로 이 3개의 성을 말한다.
그래서 중국의 역대 황제들은 뻬이징에 또아리를 틀고 세상을 움켜잡았고, 황하강 유역 비옥하고 드넓은 평원에서 생산된 풍부한 군량미로 통일 중국의 기초로 삼았다. 당연히 이 땅을 차지한 군주가 가장 강력한 왕이나 황제였으며 통일된 중국의 수도는 항상 이곳에 있었다.
하북성, 하남성, 산서성의 3개성을 가로지르는 태항산은 그 규모가 부산에서 신의주에 이를 만큼 길고 범위가 넓었기에 중국이나 우리 독립군이 일본군과 전쟁에서 은거지로 이용 되었고, 내전시에는 장개석의 국민군에게 몰리던 모택동의 공산군이 은거지로 이용되었다고 한다.
중국의 3대 영웅이라는 말도 처음 들었다. 중국에서 영웅은 의리를 목숨과 같이 하고 큰 업적을 이룬 사람을 영웅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첫째는 중국을 최초로 통일하고 황제에 오른 “진시황”이며 둘째는 역사상 가장 거대한 제국을 건설한 “징기스칸”이며, 셋째는 “모택동“이라고 한다.
첫째는 그렇다치고, 둘째는 몽고인인데 중국인이라고 칭하는 것이 어불성설이나 징기스칸의 아들 쿠빌라이가 통일 중국 원나라를 세웠다고 중국인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마치 고구려가 신라와 당나라에게 망했으니 중국에 속한 변방국의 이야기라는 즉 고구려가 중국 역사라고 주장하는 동북공정 생각이 나서 어찌 사람의 탈을 쓰고 그런 억지를 부릴까 싶다. 셋째 모택동이 영웅이라는 주장에 대해서 과연 300년쯤 지난 뒤 동일하게 역사적 영웅이라고 평가를 할 것인가에 대해 의구심이 들었다.
아무튼 태항산을 가기 위해 대한민국과 가장 지척에 있는 산동성 청도공항에서 여행은 시작되었다. 여행경비를 가장 저렴하게 하는 방안으로 채택된 코스라는 생각이 들었다. 버스타는 것이 싫은 사람은 하남성 정주시로 가는 비행노선을 선택
하면 비용은 상대적으로 더 들지만 버스 타는 시간을 최대한 줄일 수 있는 것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 산동성,하북성,하남성,산서성 이렇게 4곳을 여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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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그럼 지금부터 본격적인 태항산 여행을 떠나보자.
1일차
인천공항 출발 시간은 오후 14시05분 이었다. 중국의 산동성 청도시로 출발했다. 이래저래 청도는 그 동안 4번이나 갈 기회가 있어서 익숙한 곳이었다. 비행시간은 1시간 5분이지만 시차가 -1시간이어서 청도공항에 중국시간으로 14시 10분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함께 여행 할 필자가 속한 여행사 일행들을 만났다.
33살이라는 조선족 청년이 안내를 맡았다. 어차피 경비를 지불 한다면 중국사람 중에서도 조선족에게 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중국 사람 조선족이라는 점이다. 그들 역시 중국이 자신들의 조국이라는데 이견이 없었다.
제주도에 갔을 때의 택시기사 말이 생각났다. “중국인들이 제주도에 많이 여행 온다던데 경기가 좋아졌나요?” “그런거 없어요. 어찌나 지독한지 화교들과 짜고 한국사람들에게는 한푼도 돌아가지 않게 화교가 운영하는 식당, 선물점, 호텔 심지어
관광버스나 택시도 많이 기다려서더라도 화교들것만 골라 탑니다. 우리 도민들에게 도움 되는 일은 거의 없는 거죠.“
하기사 우리가 중국에 여행을 가도 가이드는 한국어를 하는 조선족이 좋고 식당도, 선물점도 조선족 가이드가 소개한 조선족이 운영하는 곳에 가게 되지 않던가? 문제는 바가지를 씌우지 않고 제 값으로 해주면 좋겠는데, 그런 면에서 과연 조선족이 그렇게 하는지는 각자 겪어보고 생각해 보면 될 일이다라고 생각한다.
이래저래 15시에 출발한 버스는 3시간을 달려 18시에 산동성 어딘가에서 저녁을 먹게 되었다. 중국여행 경험이 꽤 있는 필자였지만 처음으로 식물원 안에 통째로 시설된 상상을 초월한 식당에서 식사를 하며 여행기간 동안 함께 할 구성원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이곳까지 3시간 동안 이동하면서 “대륙이니 그렇겠지.” 하는 생각으로 산이 없는 들판을 달려 왔다. 왕복 4차선 고속도로는 대형 트럭들로 줄을 잇고 가끔 승용차들이 빠른 속도로 추월해 나갔다. 물동량으로만 본다면 경부고속도로보다 더 많아 보이는 그렇게 많은 물자가 해안쪽에서 내륙쪽으로 이동하는지? 경제가 이정도로 활발한 것인지? 정말 내심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운전자들은 소형차는 110km, 버스는 90km, 트럭은 70km의 속도 제한을 엄격하게 지켰고, 자신의 차를 급가속 시키거나 급정지 시키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자연히 차량들은 물 흐르듯 경쟁 없이 무리없이 주행이나 추월을 하고 있었고 다른 차가 추월해도 아주 당연한 듯 운전을 하고 있었다.
이렇게 운전하는 중국인들을 보며 첫째 중국의 교통법이 매우 엄중하다는 것을 생각할 수 있었고, 둘째 가도가도 끝이 없는 대륙의 길을 굳이 서둘러 가봐야 빨리 도착할 수 있다는 희망이 없기에 느긋하게 5시간 혹은 10시간 운전을 운명처럼 규정 속도를 지키며 무리없이 통 큰 양보를 하며 운전을 하게 되지 않았나 싶었다. 다만 대부분 운전자들이 중국 모든 지역에서 굉음에 가까운 크락숀을 자주 사용하는 것이 신경을 거슬리게 했다.
저녁식사를 마치고 어두워진 18시 40분 다시 버스에 올랐다. 1박이 예정된 산동성 요성시에는 24시가 되어 도착 했다. 1시간 교통사고로 고속 도로에 묶여 있던 시간을 감안해서도 4시간 20분을 버스에서 보냈다. 청도시에서부터 7시간 20분 고속도로를 달렸는데도 아직 산동성을 벗어나지 못했으니 참으로 크기는 큰 나라라는 생각이 들었다.
* 호텔앞 풍경으로 도시마다 화력발전소가 있고 증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2일차
아침 기상은 5시30분이었다. 버스를 탓다하며 대뜸 5시간이니 이곳이 어디쯤인지 가늠도 못한 채 가이드 리드에 따라 이동했다. 필자 같이 궁금한 것이 많은 여행객을 위해 지도 한 장 준비해서 친절히 “현 위치는 이곳인데 다음 목적지는 이곳입니다. 오전 이동시간은 몇 시간이고 몇 시쯤 휴게소에 들러 가겠습니다.”하고 멘트를 해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이 들었다. 또 지나는 지역에 대해 조선족 말로 “나발”(관광안내)을 좀 더 다양하게 불어 주면 좋겠는데 무슨 수호지 타령만 혼자 떠들고 여행객들은 관심 없이 대부분이 졸고 있는 버스안 모습이 계속되었다.
드디어 어제부터 12-13시간의 고속도로 이동을 통해 산동성을 벗어나 하남성에 들어섰다. 어제부터 약 8시간 동안 본 것이라고는 끝이 없는 벌판만을 보았는데 2일차 오전에도 별반 차이가 없어 보였다. 그러나 점심때가 되어 끝이 없어 보이던 평야에 거짓처럼 갑자기 거대한 돌산들이 길을 막고 나섰다. 드디어 태항산 근처에 도착한 것이다.
어제와 오늘 그 끝없는 대륙의 벌판을 이동하며 몇 가지 특이한 점을 보고 느꼈다.
첫째 밭고랑 모양이 우리나라와 다르다는 점이다. 둘째 논을 보지 못했고 물이 흐르는 강다운 강을 보지 못했다. 셋째 소나 돼지, 말, 양등 가축은 물론 개도 한 마리 보질 못했다. 넷째 중국 그러면 돼지고기가 주부식인 나라라고 생각했었는데 괜찮아 보이는 식당임에도 불구하고 반찬류는 거의 채소를 기름에 볶아 놓았을 뿐 고기류는 전혀 볼 수 없었다. 다섯째 연무로(스모그) 하늘의 태양빛을 제대로 볼 수 없었다. 여섯째 고속철도가 일부구간 고속도로와 병행 건설되어 있었는데 역사시설이 우리나라 50-60년대 수준의 시설로 아주 간결하게 건설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첫째 밭모양이다.
우리네 밭은 고랑을 깊게 파고 가운데 부드러운 흙두덕을 만들어 그곳에 식물을 자라도록 한 것에 반하여, 2일 동안 중국 대륙이 내게 보여준 밭은 폭 2m 평평한 평지에 식물이 자라고 테두리에 둑을 쌓아 두었다는 점이다. 우리나라는 식물이 자라는 여름에 비가 많아 배수가 잘되라고 고랑을 깊게 파는데 반해 중국은 비가 적어 물을 가두는 형태의 농사를 짓는 이유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이색적인 밭고랑
둘째 어느 곳에서도 논을 보지 못했고 강다운 강을 보지 못했다. 이곳 중원땅은 아주 적은 비가 오고 너무 땅이 넓어 관개수로를 할 수 없어 논농사를 지을 수 없고, 적은 강우량에도 농사지을 수 있는 옥수수와 밀을 대부분 경작 한다는 말을 가이드 설명으로 들었다.
2일 정도 고속도로를 달려야 하는 중국 대륙 평원에서 정말 강다운 강을 보지도 못했다. 기껏 몇 시간 만에 한 번씩 적은 물이 흐르는 수로나 빈약한 실개천을 본 것이 다였다. 그러니 당연히 물이 절대 부족한 이곳 중국인들은 자주 씻을 수도 없고, 옷도 세탁 할 수 없으며 황사먼지가 몸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단추를 목 있는 부분까지 잠그고 사는 중국식 옷이 탄생하지 않았나 하는 상상과 이런 지역에 큰 가뭄이나 물난리를 겪게 된다면 엄청난 피해가 날 텐데 하는 걱정도 해보았다.
셋째 소나 돼지, 말, 양등 가축은 물론 개도 한 마리 보질 못했다. 왜 그럴까? 이곳 사람들은 육식을 싫어해서 일까? 아니면 먹일 것이 마땅치 않아서 일까? 이것에 대한 답은 그 넓은 평원은 밭으로 정지 되어 초지가 없었고, 물이 부족해 동물을 키울 여건이 전혀 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넷째 중국 그러면 돼지고기가 주 부식인 나라라고 생각했었다 이 문제에 대한 답은 가이드가 명쾌하게 설명해 주었다. 산동성과 하남성 일대는 옛날 魯나라 땅이었다고 한다. 노나라는 땅이 넓고 기름져 옥수수와 밀등 주식류는 풍부하게 남아돌았으나 부식류는 매우 부실했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동물을 키우지 않고, 바다나 강이 없으니 생선이나 육류 없는 식탁은 채소로 채워질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비가 적어 먼지 많은 곳에서 자란 채소등은 몽땅 기름에 볶아서 먹을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魯나라는 옛날부터 채소류인 반찬마저 귀해 소금간을 짜게 해서 조금씩 먹도록 하는 관습이 생겼다는 것이며, 그 전통으로 우리가 접하는 반찬도 대부분 짰고 기름에 볶아져 있었다. 물론 육류는없었다.
다섯째 연무로 하늘의 태양빛을 제대로 볼 수 없었다. 서울에서 뻬이찡의 스모그로(연무) 사람들이 마스크를 쓰고 다니는
화면을 자주 보았다. 당시 그 화면을 보며 중국사람들이 자동차를 너무 많이 타고 공업화 하면서 공장의 공해가 심해서 그러려니 생각했었다. 하지만 필자가 본 중국대륙의 스모그는 좀 다른 각도에서 보아야 한다는 생각이다.
뻬이찡을 포함해서 너무도 광대한 평원에는 강수량이 적어 먼지가 날릴 수 밖에 없고, 산과 강이 없어 공기의 흐름이 정체되어 버렸으며, 정말 끝없는 들판에 나무라고는 포플러 나무들이 땅에 비해 너무 초라하게 성냥개비 꼽히듯 심겨져 있느니 무슨 친환경적이고 정화적이겠는가? 생각해 보면 그 환경이 나무 없는 민둥머리 산과 무엇이 다르겠나 싶었다.
* 각 도시마다 발전소가 있고 굴뚝 연기로 보아 거의 공기 흐름이 없음
이 문제의 해결책은 비전문가인 필자의 입장에서 본다면 평원의 절대녹화가 해답이라는 생각이다. 그래야 강도 생기고 공기도 정화되며, 강우량이 적은 땅에 안정적 물도 확보되지 않겠는가? 하지만 14억명 인구를 먹여 살려야 한다는 문제가 선결과제라면 한치의 경작지라도 늘리는 것이 우선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결국 우리나라가 겪었듯 국민소득이 선진화 되어야 인간의 삶에 질 향상을 위한 환경,강의 수질, 산림녹화등에 변화가 있게 되리라 생각했다.
여섯째 고속철도 역사의 시설
우리나라의 KTX와 같은 모양의 중국 고속기차가 고속도로 옆 철길을 빠른 속도로 달려가고 있었다. 달리는 기차나 콘크리트 구조물의 모양, 상부 신호,전기,통신시설의 겉모습은 우리나라의 것과 거의 유사했다. 아니 똑 같았다.
다만 한 가지 크게 차이나는 점은 정거장의 모습이었다. 벌판 가운데 건설된 중국의 철도정거장은 우리나라의 50-60년대 간이 역사 정도의 극히 빈약한 모습이었다. 물론 도시의 철도역사를 볼 기회가 없었으니 단정하기 어렵지만 비가 적고 먼지가 많은 땅이니 굳이 대형 구조물이 아닌 노천 정거장을 건설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 고속철도 정거장으로 믿겨지지 않았다
조선족이 운영한다는 태항산 입구 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다. 역시 반찬은 채소류 볶음과 특식으로 된장국과 상추가 식탁에 올랐다. 그곳에서 오후 관광으로 잡혀 있는 구련산으로 이동하기 위해 승합차로 갈아탔다. 공기는 대낮에 눈 앞의 산이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스모그가 가득했고 숨쉬기 조차 불편할 정도로 먼지가 많았다.
* 드디어 태항산이 길을 막고 섰다, 정오의 너무 짙은 스모그
* 5000년전 상나라 왕들의 절벽에 있는 동굴무덤
건너편 절벽에 굴과 같은 구멍들이 보였다. 가이드 말로는 5000천년전쯤 이곳에 국가였던 상나라 왕족들의 무덤이라고 추정한단다. 도굴이 심해 절벽에 굴을 파고 그곳에 장례를 치렀다는 이야기이다.
덧붙여 하는 가이드 말은 믿거나 말거나 한 이야기로 이곳에 소개하면 요즘 중국에서는 여자 무덤에서 시체빼다 파는 것이 유행이란다. 아버지가 죽으면 효심강한 아들이 위로한다고 도굴된 여자 시체를 사다가 함께 묻어 주는 것이 유행처럼 되어 있단다. 그 값으로 처녀는 우리 돈으로 1000만원 정도이고 그 외는 200만원인데 중국당국에서는 이 유행을 엄하게 금하고 잡히면 3년형을 살아야 한다고 한다. 웃지 못 할 이야기이다.
승합버스를 타고 40분쯤 이동하면 구련산 입구주차장에 도착한다. 참고로 태항산이란 우리 나라 태백산맥과 같이 큰 산의 총칭으로 그 안에 구련산, 천계산, 만선산등 많은 명산들이 들어 있는 셈이다.
태항산 입구에서 보는 모습은 그리 좋아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계곡으로 깊이 들어 갈수록 예상치 못한 200에셔 300여m의 붉은색 대리석 수직 절벽 계곡을 접하게 되면서 그 생소함과 웅장함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 계곡 양옆을 장식한 붉은 대리석 절벽은 족히 200m이상 되어보였다
계곡 수직절벽 폭포수 곁에 설치되어 있는 180m짜리(약 50층 아파트 높이) 엘리베이터를 이용해 절벽위로 오르면 그곳에 또 다른 놀라운 광경이 기다리고 있었다.
* 절벽 위에서 아래로 쏟는 폭포- 물이 말라있었다
* 180m짜리 고속 엘리베이터
절벽위에는 마치 높은 산이 새로 시작되듯 약간의 계곡이 있고 산족들의 마을이 형성되어 있었다. 이런 오지의 산위에 그 옛날부터 살아왔다는 산족도 신기했지만 절벽까지 오르는 한사람이 겨우 지나갈듯한 아슬아슬한 절벽계단길과 까마득한 절벽위에 손바닥만한 밭에서 빈약한 채소가 자라는 모습은 절대 배불리 먹고 살 수 없는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 폭포 절벽 바로 위의 계곡모습 (손바닥만한 농지가 이들의 양식공장이다)
* 폭포 위쪽에는 (절벽 위쪽) 수천년전부터 산족들이 마을을 이루고 살고 있었다
* 절벽위에서 바라본 협곡
관광이 끝나고 밤을 맞으러 가며 가이드는 옵션 100불과(가이드팁50$, 마사지20$, 환산선 전동차30$) 내일 관광 중 선택옵션 “빛 나리길“관광 110$짜리에 대한 설명이 있었고 신청한 사람들에게 1인당 210$ 씩을 받았다. (이 돈 외에는 딱히 쓸돈이 없었다)
2시간 정도 버스로 이동해 하남성 신향시에서 저녁을 맞았다. 역시 크게 벗어나지 않는 저녁식사 메뉴로 식사를 하고 마사지실로 향했다. 중국 발마사지를 받았다. 발바닥에 부항을 떠 주는 것이 이채로웠다. 가이드 말로 중국의 타지역에서 한국관광객이 팁을 잘 주어서 마사지사들이 팁에만 관심을 보이는 지경에 이르렀다며 관광개발 초기에 해당하는 태항산 관광에서는 그 문화를 바꾸기로 가이드끼리 약속했으니 팁을 절대 주지 말라고 당부했다. 정 많은 한국인을 벗어나지 못했는지 많지도 않은 1000원 팁을 주고 싶은 마음을 꾹 참고 그곳을 나왔다.
3일차
변함없이 아침 기상은 5시30분, 식사 6시30분, 출발은 7시30분이었다. 이 곳 하남성의 수도는 정주시로 인구가 우리나라 인구와 맞먹는 4300만명이며 5000년전 상나라와 주나라의 수도였다고 한다.
역시 가이드가 지도에서 이동 위치를 알려주면 좋으련만 아무 것도 모른 채 약 2시간을 이동해서 산에 들어서니 어제와 비슷한 산세와 절벽의 왕릉 굴을 보며 전날 왔던 곳에 다시 왔음을 알 수 있었다.
* 천계산 입구에서
* 천계산 (아침인데도 스모그로 뽀였다)
어제 구련산 가던 계곡과 다른 천계산 계곡으로 들어섰다. 계곡이 끝나자 1670m 된다는 천계산 정상부를 향해 미니버스는
있는 힘을 다해 절벽을 따라 나 있는 도로를 곡예 하듯 달렸다. 물론 절벽에 난 길이니 바로 곁은 수직 절벽이어서 절경에 감탄하면서도 짜릿함을 함께 느껴야 했다.
* 천계산 7부 높이 주차장에서 58세의 모습이다
* 산위로 오르는 아슬아슬했던 절벽길
필자는 아직 그랜드 캐니언을 가 보지 못했다. 함께 간 친구가 이곳과 그랜드 캐니언을 비교해 주었다.
“그랜드 캐니언보다 이곳이 분명히 몇 수 위야.“ 필자는 태어나 이런 광활하고 웅장한 계곡을 본 적이 없었다. 그 풍광에 빠져 천계산 풍경구를 관광 동안 필자는 맨 꼴찌로 일행 뒤를 따라 다녀야 했다.
* 천계산 순환 관광도로 절벽위에서 대협곡을 바라보다 (도저히 사진으로 담기 불가)
* 정상으로 가는 곤도라 (2시간후 스모그로 사진촬영불가)
* 곤도라로 오르면 또하나의 계단으로 가는 정상
급경사 계단을 오르며
* 이곳이 천계산 정상석으로 한글이 이채롭다.
* 이곳에 도교 시원이 있다. 정상 상식밖이다. 물은 어쩐다나?
* 정상에서 7부 주차장을 바라보다.
천계산 정상부 도교사찰까지는 스키장에 있는 곤도라를 타고 다시 500개 이상으로 보이는 계단을 올라야 했다. 잠깐 땀을 흘린 보람으로 천계산 정상에 섰다. 정상에서 보는 웅장하고 절묘한 협곡의 아름다움에 넋을 잃었다. 이런 곳에 도교 사원이 있음도 신비스러웠다.
500개 정도의 계단을 내려올 때 1인당 중국돈 20원 (우리돈 3500원)하는 미끄럼을 타고 여자라면 누구나 악을 쓰며 즐거워하는 행복한 미끄럼놀이에 마음껏 웃었다. 우리나라 워터파크 미끄럼을 뽀족한 산 정상에서 타고 내려온다고 상상하면 될 것 같다.
* 대리석으로 깍아만든 홈통 미끄럼을 타고 신나게 하산. (전혀 문제 없음)
* 7부 주차장엔 한국인을 위한 산채비빔밥 식당이 있다. 식당뿐 아니라 관광지내에서 한국인과 중국인외 다른나라관광객은 보지 못한것도 특이했다.
오후에는 미니버스에 실려 천계산 식애구 관망대를 관광했다. 계림의 산과 같이 정상부가 몽글몽글 한 것이 특징인 이곳은 명나라 말기 황제의 휴양지였다고 한다. 이곳에서 산정상 주변으로 난 산책길을 따라 약 1시간 남짓 걸어서 관광을 했다. 산 정상부 높은 곳이서인지 아래쪽 보다는 스모그가 훨씬 덜했다.
* 뒤에 봉우리들이 계림의 산과 비슷했다
남은 일정은 만선산 관광이었다. 당초 예정대로는 왔던 길을 되돌아 산을 하산하여 평지를 이용 다시 만선산으로 이동하도록 되어 있었으나 가이드가 추천한 “빛나리 길”을 일행 모두가 선택하여 그곳으로 가기 위해 하남성 미니버스에서 내려 산서성 미니버스를 타고 시진핑 주석의 고향 산서성으로 이동했다.
한참을 하산했다고 느껴지는 구릉지에 도착해서 다시 소형 승합차로 갈아탔다. 제복을 입은 여자관리인이 열어주는 철제문을 지나 동굴속으로 버스가 달려 나갔다.
* 인간이 건설할 수 있는 범위를 벗어난 절벽길을 달렸다
* 이런 고봉의 (약 1500m이상의 산들) 절벽에 길을 뚫었다
* 중간에 오금 저리는 절벽을 뒤로 하고
* 정말 상식이 통하지 않는도로로 봉고버스 한대가 간신히 지나는 길이며 인력으로 대리석을 깍아서 절벽에 길을 만든 수공예 터널길이었다.
수직의 절벽에 터널이 뚫리고 자연 채광을 위해 간간히 구멍 뚫린 밖의 세상 속에서 난생 처음 보는 아찔함과 웅장함에 다들 할 말이 없었다. 몇 장의 사진을 찍고 이런 동굴을 뚫어 길을 낼 수 있음은 5000년 전 절벽에 굴을 뚫어 왕의 장례를 치렀다는 고대 왕들의 무덤에서부터 힌트를 얻었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더불어 이곳 사람들은 대리석에 수천년 전부터 굴을 뚫는 노하우를 알고 있었다는 생각을 했다. 한마디로 길지 않은 "빛나리 길" 관광이었지만 110$을 지불하고 볼만하고 느낄만한 경험이었다.
만선산! 계곡에서 절벽에 굴을 뚫어 산 중턱 마을까지 험한 길을 중형버스를 타고 올랐다. 버스로 2시간을 계곡에서 중턱으로 다시 절벽 위에 나 있는 길을 따라 관광을 했다. 만약 “빛나리 길”을 보지 않았다면 감동에 찼을 풍광이었다. 그러나 일행은 이미 그 보다 더한 절경을 보았던터라 큰 감흥 없이 관광을 마쳤다.
만선산에서 바라 본 대협곡과 대리석으로 된 고봉들(산 바닥에서 정상까지 대리석)
* 굽이굽이 급경사를 올라 수직절벽에 굴을 뚫어 관광도로를 만들었다
4일차
똑 같은 일과로 7시30분 관광을 위해 임주대협곡으로 1시간 정도 이동했다. 어제까지 보았던 풍광과는 색다른 산세를 대하며 새로운 흥미가 느껴졌다. 여행사 안내서를 보면 당일 보는 태항산 대협곡이 관광의 하이라이트라고 되어 있던데 과연 어떤 곳일까? 궁금했다.
* 드디어 하이라이트 태항산 대협곡 입구
전동카를 타고 30분쯤 이동하면 1시간 남짓 거리를 걸어 갈 사람과 전동차를 타고 갈 사람으로 구분 한다. 웬만하면 이때 걸어야 물이 흐르는 태항산의 계곡 속살을 들여다 볼 수 있는 기회가 온다.
* 대리석 배경의 폭포
* 대리석이기에 가능한 다리 (인공으로 깎아 만들었다.)
* 계곡 절벽에 관광길은 콘크리트로 만들어져 있다
태항산은 전체가 대리석으로 산을 이룬 바위산이다. 나무가 거의 없고 연약한 암질은 풍화와 물길 닿는대로 깍기고 짤리어 절벽과 계곡의 절경을 이루고 있었다. 계곡수는 산의 크기에 비해 수량이 극히 적었고, 우리나라처럼 깊은 산 계곡 아무 곳에서나 물을 떠먹을 수 있는 그런 곳은 아예 없다고 보면 된다. 그 이유는 산 중간부분까지 산족들이 사는 마을이 곳곳에 있고 수량이 적어 계곡물은 썩어 고인물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 대리석이기에 가능한 이색적인 폭포 (물이 더러워 이끼로 덮혀 있다.윗쪽에 산족 마을있음)
아무튼 대리석 때문에 좀 특이한 태항산의 계곡은 설악산 흘림골에 비해 그리 나아 보이지 않았다. 계곡을 거슬러 올라가 주차장에서 다시 전동카를 타고 절벽 위로 나 있는 길로 이동했다.
* 태항산 어느 곳을 가나 절벽 바로 위에 도로가 나 있고 띄엄띄엄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정말 오랜 옛날부터 이 산 높은 곳에 손바닥 만한 땅만 있으면 사람들은 그곳에 집을 짓고 살아온 흔적이 역역했다. 대리석으로 된 벽체와 대리석 판석을 깔아 놓은 지붕을 보며 혀를 내둘렀다. 그 썩음한 집에 분명히 아직도 사람이 살고 있는 흔적을 볼 수 있었다.
* 지붕은 대리석 판재로, 밭은 절벽을 끼고 손바닥만 했다.
친구는 그랜드캐니언이, 미국인이 이곳을 도저히 따라 올수 없는 이유로 그곳은 버려진 콜로라도의 계곡땅이지만 태항산대협곡은 수천년 전부터 사람들이 길을 내고 땅을 일구고 자연에 순응하며 살아 왔고 지금도 살고 있는 대협곡이기에 그 가치를, 그 규모를,그 형태의 면에서 그랜드캐니언과 비교될 수 없는 훌륭함이 있다는 것이다.
족히 300m쯤 되는 절벽 유리판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며 전율했다. 중국인 다웠다
그곳에서 약 10분쯤 전동차로 이동하면 걸어서 하산하는 길목이 있다. 가이드가 1시간 30분 걷자고 하면 무조건 응해야 한다. 그 이유는 필자가 선정한 이번 여행의 백미가 바로 그곳이기 때문이다. 보기만 해도 서늘한 절벽의 길을 따라 이동해서 200m쯤 되는 수직 원통계단을 통해 계곡으로 내려가는 코스이다. 이는 긴 설명보다는 한 번 가서 느껴 보시라고 권해본다.
* 드디어 도로에서 급경사 계단을 지나 대협곡 아래로 걸어서 이동한다
* 가는 길에 허리를 숙이는 곳도 있다
* 그렇게 가다보면 개략 200m 되보이는 수직 철제 계단을 만나게 된다. 아마도 우리나라라면 환경오염이라고 데모꾼들이 반대했을 모습을 하고 있다.
* 계단을 내려가다 보면 이런 절벽을 내려가고 있는 것이다
* 수직 계단을 내려오면 그다지 심한 경사 없이 하산길로 접어든다.
* 드디어 이 문을 통과하면 하산도 태항산 여행도 끝을 고한다.
12시40분이 되어 계곡의 아름다움에 심취되었던 필자는 일행의 제일 마지막으로 버스에 올랐다. 이것으로 태항산 여행은 종료 된 것이다. 여행을 다니며 이렇게 시원하고 후회 없기는 참으로 오랜만인 것 같았다.
점심을 먹고 14시에 산동성 제남시로 향했다. 제남시 호텔에는 6시간이 지난 20시에 도착했다. 서울에서 부산까지 5시간 걸리는데 우리 일행은 이번 여행에서 4박5일 동안 매일 그 이상 거리를 이동한 셈이었다.
* 제남시에서 맞은 석식으로 닭과 탕수육등 가장 훌륭한 식사를 했다
5일차
제남시에서 마지막 아침을 맞았다. 이제 돌아가는 길만 남았다. 시작하는 날부터 황사인지 모를 먼지가 하늘을 뒤덮고 있더니만 지난밤에는 그 정도가 더 심하다고 느꼈었다. 그런 이유인지 밤새 코가 막히고 기침으로 잠을 설쳐야 했다. 그 고통에 “난 이런 나라에서 살고 싶지 않다.” 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황사인지 스모그인지는 몰라도(귀국해서 필자가 느꼈던 그 현상이 건강에 매우 해로운 스모그 현상임을 보도를 통해 알았다.) 한 낮에 태양이 구름 잔뜩 낀 날 달을 보는 느낌이고, 그런 날이 며칠째 계속 된다면 필자는 이런 나라에 잠시라도 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하며 이곳 중국의 중원이라는 하북, 하남, 산동성에 사는 2억명의 사람들은 이 스모그로 호흡기병에 걸려 단명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후 4시인데 스모그로 태양빛이 흐리고 음산한 어둠속이었다
그래서일까? 중국인들이 제주도에 땅을 사들인다는 뉴스가 주목된다. 솔직히 내가 돈 많은 중국인이라면 돈은 중국에서 벌고 가족과 살기는 쾌청한 제주도에서 사는 방법을 찾을 것 같다.
어제 임주에서 제남시까지 6시간 동안 갈 때와 마찬가지로 끝없는 벌판을 달려야 했다. 정말 끝없는 평원을 보다가 지겨워 2-3시간잠을 청하고 나서 다시 눈을 뜨면 똑 같은 벌판, 직선으로 나 있는 고속도로를 변함없이 버스가 달리고 있었다.
끝이 없는 평원에 밭으로 된 경작지들을 바라보며 중국인의 대륙기질은 이런 것에서부터 시작되지 않았나 싶었다. 즉 이 넓은 경작지를 대하며 좀 서두르면 하루 내에 마칠 수 있을 것 같은 희망이 있어야 열심히 해볼 텐데, 끝없는 들판을 대하며 오늘 못하면 내일 하면 되고 세월이 흐를 만큼 흘러야 끝이 나는 것이다 하고 생각하게 되면 바쁜 것 없는 대륙근성, 만만디 바로 그렇게 되는 것 아닌가 싶다.
그래서 장거리를 뛰는 운전사들도 서두르지 않고 느긋하게 규정 속도로 시간이 흘러가기를 바라는 만만디 근성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고 걸음걸이도 우리처럼 바삐 걷는 중국사람은 없어 보였다. 사람, 차, 오토바이, 자전거까지 모두 만만디로 살아야 하는 그들의 운명 같은 기질은 끝이 없는 이 넓은 땅에서 시작되지 않았나 싶다.
* 우리나라보다 크다는 하북성의 고속도로망
드디어 제남에서 출발한 버스는 청도에 도착했다. 제남시를 떠난 지 5시간 만에 일이다. 나름 중국의 중원을 만만디로 느껴며 바라 볼 수 있어 의미 있는 여행이었으며, 태항산이라는 보기 드문 지형과 대리석으로 된 명산을 볼 기회가 되어 매우 행복했다
여행사에서 제공한 식당과 호텔은 비교적 만족스러웠으며 가이드의 친절도 좋은편이었다. 조금 보완하자면 지도 한 장 복사해서 여행객이 이동 거주 위치를 알 수 있도록 배려 해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오래도록 기억될 태항산 여행기를 마치도록 하겠다./끝
2013.11 몽사 독고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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