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고철 금강산 리메이크
2004년 8월27일 지금으로부터 약21년전 금강산을 육로여행으로 다녀온 기록이다. 지금은 가 볼 수 없는 곳이기에 당시의 휴전선 넘어 모습과 금강산에 대한 느낌을 공유하고 싶어 다시 글을 정리하게 되었다. 아쉬운 점은 당시 휴전선을 넘는 순간부터 엄격히 사진 촬영이 제한되어 다양한 사진을 남길수 없었다.
2004년 금강산 여행기
(2004.8.27 - 8.29)
1. 희망을 안고서
2004.8.27 서울 잠실을 출발한 관광버스는 5시간 반을 달려 고성의 금강산 콘도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북쪽 입국을 위한 간단한 교육과 간이비자, 여권을 받아들고 여행자 모두 손에 달고 살던 휴대폰 회수가 이루어졌다. 북쪽 반입 불가 품목은 휴대폰 및 밭데리, 25배 줌 카메라, 망원경, 라디오, 나침판, 무기류 등이었다. 가지고 갈 수 있는 화폐로는 달러나 달러금액이 보관되는 카드로 교환해야 했다.
술과 음식물은 반입 금지품목이었지만 다녀온 사람들의 말로는 금강산에 가면 현대가 운영하는 슈퍼마켙이 있는데 소주 1병에 10달러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북쪽에 들어가면서 문제되면 빼앗기고 말지하는 마음으로 술과 가벼운 안주와 과자등을 사서 일행의 배낭 속에 나누어 챙겼다.
우리가 속한 금강산 관광팀 1200여명은 통일전망대에서 북으로 가기 위해 지루한 시간을 보내야 했다. 출국인원이 1200여명이 되다보니 출국에 따른 절차와 심사에 많은 시간이 소요되었기 때문이다. 잠실을 9시에 출발해서 오후 5시가 되어서 가설조립식건물이던 대한민국 마지막 관문인 출입국관리소를 빠져나왔다.
1200여명의 인원을 실은 약 30여대의 현대소속 중형버스들이 줄을 지어 북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말투가 우리와 같지 않은 버스기사이니 아무래도 북쪽 사람인 듯싶었다. 국군이 비무장 지대 경계에 설치해 놓은 철책을 따라 있는 도로를 이용해서 북으로 북으로 긴 행렬이 이어졌다. 한 10분쯤 갔을까 비무장지대로 들어서는 듯 큰 키에 멀끔하게 생긴 우리 헌병 아들들이 지키고 있는 마지막 관문 앞에서 캄보이를 맡은 짚차가 비켜섰다.
도로 옆으로는 북으로 연결될 동해선 철도 작업이 완성되고 있었고 우리 버스 일행은 비무장 지대에 고삐 풀린 소떼 마냥 줄을 이어 북으로 향해 나아갔다. 다리 중앙이 휴전선이라고 했다. 이쪽은 대한민국...저쪽은 다른나라....
우선 병사들을 보며 확연히 다른 것을 몇 가지 느낄 수 있었다. 국군은 돌격할 때 외에는 대검(칼)을 총에 꼽지 않지만 내가 본 첫 번째 인민군은 아카보 소총에 꼬챙이 같은 창을 꼽고 서있었다. 국군은 방탄 헬멧을 쓰고 있었고, 인민군은 천으로 된 국군의 작업모 비슷한 모자를 쓰고 있었으며, 국군은 희멀건하고 키가 큰데 반해, 인민군은 조만한 체구에 예외 없이 검게 그을려 있었다. 인형 같은 움직임과 얼굴 표정이 없는 그들을 보며 통일이 된다면 과연 그들과 평화롭게 살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예전에 라오스를 갔을 때 일이 생각났다. 1995년인가? 처음 그 곳에 갔을 때 사회주의였던 라오스 수도 비엔티안은 지금 내가 바라보는 사람들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웃음이라고는 없고, 자존심만 강한 척 거드름을 피며 결코 자본주의와 어울려질 것 같지 않은 그런 사람들이었는데, 재방문 했던 2000년에는 5년의 세월만 흘렀을 뿐인 데도 문호개방에 따른 태국식 타락한 자본주의 물결이 온 나라를 이상하게 변질시켜 놓았던 것을 보았다.
우선 자본주의와 함께 제일 먼저 들어오는 것은 매춘이다. 자본없이 돈을 벌 수 있고, 돈을 버는 방법이 없기에 가난하고 통제된 나라일수록 매춘으로 자본주의를 배우기 시작한다. 그 나라도 불과 5년 사이에 매춘이 성행하고 곁들여 커지는 것이 관료들의 부정부패이다. 흔히들 중국과 베트남등 공산주의 나라에서 자본주의를 택한 나라의 공통적인 문제는 "되는 것도 없고, 안 되는 것도 없다."란 점이다. 즉 안되는 것도 되게 할 수 있다는 말로 조금만 권력이 있으면 그것으로 아쉬운 자를 픽박하며 팔자를 고치려 든다. 앞으로 북한이 순차적으로 겪어야 할 자본주의로의 길일 것이다.
이미 휴대폰들을 대한민국에 영치시켜 놓은터라 1200여명의 일행은 너나 나나 할 것 없이 정보문명의 혜택에서 멀어진지 오래였다. 시키는 대로 해야만 하는 통제 삶을 대하며 긴장한 빛이 역력한 사람들은 하루를 큰 위협 없이 그저 밥 세끼 든든하게 먹고 등 따시면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단순한 모습들로 변해 가며 몇 안 되는 인민군들의 통제 속에 말 잘 듣는 인민?들이 되어 갔다.
금강산 호텔이 개장되기전까지 관광객들의 숙소로 사용하던 장전항의 부두에 배로 떠있는 해금강 호텔을 뒤로 하고 간단한 거의 형식에 가까운 입국 절차를 마쳤다. 여기까지 오려고 하루 종일을 길바닥에서 달리며 기다리기를 반복했다. 그러나 잠시도 마음 놓을 곳이 아니었다. "동무 나 좀 봅세다" 하면 난감한 처지가 되어 버린다는 생각에 긴장할 수 밖에 없었다.
금강산 자락이 맞닿은 장전항에서 그날 숙소인 온정리로 향하며 바위가 잘생겼다 싶으면 "김아무개 찬양"글이 음각화 되어 새겨져 있었고 어찌 크게 썼던지 천년이 지나도 지워질 일이 없을 것 같았다. 도로는 주민전용과 관광전용으로 차별해서 쓰고 있었는데 둘 사이는 100m쯤 떨어져 있었고 철조망과 전기철조망이 사이를 가르고 있었다.
곳곳에 바위가 크고 잘생겼다하면 이렇듯 붉은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희한하게도 평양으로 연결되었다는 제법 큰 주민전용 도로에는 차량이 없었다. 온정리는 제법 큰 마을인 것 같았는데도 불구하고 북에서 3일 동안 생활하며 나는 한 대의 민간차량도 본 기억이 없다. 이동수단으로는 아주 가끔 보이는 고물이 따로 없는 자전거 외에 걷는 것이 전부인 듯싶었다.
금강산을 제외한 모든 산은 까까머리로 몸체를 들어내고 있었고, 서울에서 뉴스로 접하던 황량한 산과 들 그런 것들이 눈앞에 펼쳐졌다. 행여 주민들이 길가에 있는 것을 보면 그들은 쑥스러움 인지 불안함인지, 하나같이 우리와 눈을 마주치려 하지 않았다.
낡은 집들과 빛 바랜 회색빛 지붕의 통일된 집들....똑같은 어두운 (검정색)색의 옷으로 감싼 주민의 옷차림, 휴전선을 넘으며 200-300m 간격으로 붉은 기를 들고 금강산 관광차량을 지키는 인민군들...인민군들의 벗은 모자 안에 빡빡 밀어버린 머리....왜소한 체구.... 웃음이 멈춘 듯한 얼굴....소변 볼 그늘 하나 없는 민둥머리 산들....그런 곳이 내가 본 북쪽의 첫 날 모습이었다.
2. 금강산을 꿈꾸며
버스는 주민들이 살고 있는 온정리 마을 곁을 지나 울타리로 감싸인 관광지구로 들어갔다. 관광지구내에서는 압박감을 최소로 줄여보겠다는 주최 회사나 북쪽의 노력이 엿보였지만 울타리 밖 길목은 권총을 찬 인민군들이 표정 없는 차가운 얼굴로 경비를 서고 있었다. 나를 비롯한 관광객들은 어디까지가 자유의 한계인지를 살피며 조심스런 모습으로 생소한 곳에서의 어색한 저녁을 맞이했다.
한번쯤 보고, 정상을 밟아보고 싶던 금강산! 그러나 애통하게도 있어야 할 금강산은 구름으로 반이나 짤리우고 대형 폭풍이 덮친다는 예보대로 한 두 방울 빗방울이 마음을 어둡게 했다. 그저 감으로 잡히는 것은 "아하~ 금강산은 돌산이구나"하는 정도의 느낌으로 내일이면 일기가 좋아지겠지하며 위안을 삼았다.
호텔중 최상급이라는 금강산 호텔에 들어서면 우선 그곳이 북쪽이구나 하는 느낌을 받을 수 있는 것이 정문 벽에 마주 걸린 대형 금강산 그림 한 폭이다. 방 키를 받아 들고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며 눈동냥을 통해 최상층에 ‘하늘 라운지’가 있고 ‘민족식당’이라는 카페를 비롯해서‘가라오케’‘ 마사지실’등을 갖추고 새롭게 리모델링을 한 듯 했지만 싸구려 건자재를 비롯해서 시설에 너무 돈을 드리지 않아 호텔이라고 받아 드리기가 어색했다.
창틀, 소파, 바렌다, 조명구, 느려터진 2대뿐인 엘리베이터 등 아무튼 필자가 1970년대 중고교 시절에 갔던 호텔의 기억만도 못한 것 같았다. 방문이 열리면 싱글 침대가 투윈으로 놓여있고 행여 집으로 착각하고 힘차게 앉으면 아마 꼬리뼈에 문제가 생길 듯 싶은 침대는 딱딱한 나무재질에 스폰지(5cm)가 깔려 있었다.
덮는 이불은 분명히 양모이불인데 이리저리 털이 몰려 잠을 갈겨 자는 사람은 아침에 곰만한 덩어리를 안고 자게 될 것 같았다. 텔레비젼 15인치, 소형 냉장고, 특이하게 특급호텔에 에어컨이 아닌 선풍기 1대가 들어 있었고, 모두 LG제품인 것도 신기 했다. 침대 곁으로 사이드등 각각 1개, 중앙거울 위에 비상등이 하나 있는 것으로 보아 특급호텔이 이 정도면 그 곳의 전력사정은 안 보아도 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중 세면장은 서울과 같이 시설이 좋았다. 샤워부스와 TOTO수전류, 동서요업 변기에 헤어드라이기, 대형거울까지 갖추었고 걱정과 달리 수건 (대형2장,중형2장), 화장지, 비누, 샴프, 린스, 빗, 면봉까지 있었다. (서울 준비물 : 휴대화장지, 치약, 칫솔, 면도기, 스킨 등)
셔틀버스를 타고 온정리로 나와 저녁식사를 했다. 특이하게 느껴진 것은 온정리에 관광특구를 만들고 그 내부에서는 관광객들이 과한 통제로 인한 공포감을 느끼지 않도록 조치를 한 모양으로 조금씩 긴장을 늦출수 있었다.
저녁 7시반에 식당으로 갔다. 현대에서 운영하는 대형 부페식당은 1200여명의 식객들이 이미 쓸고 가서인지 저녁 주메뉴가 불고기라고 되어 있지만 남아 있는 것이라고는 고추와 상추, 깻잎뿐이었다. 다들 10$이나 받고 이런 대접을 받는다며 불만들을 토로했다. (다음날 우린 그곳 뷔페가 얼마나 좋은 곳인지를 깨달았지만 ....)
저녁 자유시간을 이용해 사들인 오갈피술을 먹었다. 일행 중 한 사람이 흰 저고리에 김일성 뺏지를 달고 거리 가판대에서 조개등을 구워 파는 아가씨에게 마음을 빼앗겨 피문어구이, 노가리구이를 과하게 사들인 덕분에 훌륭한 안주가 되어 주었다. 가판대 아가씨가 밝게 웃으며 그 친구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내일 또 오시라요."
호텔로 돌아와 이곳저곳 호텔 내부를 돌아보았다. 우선 2층에도 로비와 마찬가지로 금강산 벽화가 한쪽 벽면을 장식했고 북쪽 아가씨들은 대부분 2층에 많다는 것....북한에서 운영하는 부페식당과 민족식당이라는 요리집이 있다는 것....호텔 밖에는 금강원이라는 (25$/인) 한식당도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 때 정전이 일어나고 칠흙 같이 어둠속에서 "동무 어카네. 나 무서워 죽가서."하는 어린 여성들의 애교 띤 목소리가 들려 왔다. 하기사 남쪽도 경상도, 전라도, 강원도, 충청도 사투리가 있는데 그냥 이북 사투리로 들어주면 되지 하고 흐믓하게 웃었다.
어둠속에서 준비해 간 비상후레쉬를 켜고 옆방과 연결되어 있는 (칸막이가 없었음) 호텔방 바란다에 일행들이 모여 앉았다. 달빛이 조금은 있어 줄만 하건만 먹구름에 가린 반토막 금강산은 그 모습이 여전했다. 남쪽에서 준비해 간 소주 10개, 맥주 5캔과 안주를 꺼내 놓으며 호텔에서 귀빈들에게나 준다는 과일바구니와 고급포도주를 더하여 반딧불 조차 없는 암흑의 세계에서 후레쉬 불에 의지하며 북쪽에서의 첫날밤을 보냈다.
3. 첫 번 째 아침을 맞다.
지난밤 자정을 넘겨 잠자리에 들었건만 이른 아침인 6시부터 부산스런 소리에 잠을 깼다. 부지런한 친구가 간밤에 배란다에 벌려놓은 뒷처리를 시작하면서 나는 소리였다. 미지근한 물로 샤워를 하고 부페가 준비된 호텔 2층으로 갔다. 조식은 현대가 운영중이었고 아침으로는 김치, 고사리, 생선튀김, 오이무침, 흰죽과 먼 건 된장국 등이 부폐식으로 나왔고 후식으로 안흥찐방이 나왔다.
참고로 숙박과 아침은 관광사 비용에 포함 되었고 점심과 저녁은 매식을 해야 하며 (부페 10불/인)앞에서 말한 금강원 (25불/인), 모란각의 냉면 (10불)이 있지만 부페를 이용하는 것이 가장 원만한 것 같다.(온정리의 훼밀리 마트에서는 곱배기 컵라면이 1불이면 됨.)
오늘 목표인 구룡폭포와 상팔담을 향해 마음을 설레이며 1200여명이 움직이는 거대한 차량 행렬은 단체행동원칙에 따라 1200여명 모두가 버스에 타야만 출발하고, 버스가 모두 관광지에 도착해야만 하차해서 관광을 시작했다. 익숙지 않은 모든 것을 단체 활동의 기다림으로 통제하는 것 같았다.
도착한 주차장에서 우리는 또 다른 이해하기 힘든 희한한 문제에 봉착했다. 대소변에 관한 문제로 "안 나오더라도 짜야 합니다."라는 안내원의 말에 따라 1200여명의 사람들이 긴 줄을 늘어뜨리고 턱없이 부족한 화장실 순서를 기다려야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일단 산에 오르면 딱 2곳에 화장실이 있는데 한 번 사용료가 4불(약5000원)이라니 설사가 아니면 참는 수밖에 없는 일이고, 돈 아끼려고 지정장소가 아닌 곳에서 방뇨를 하다가 붙잡히면 금강산관광이고 뭐고 불미스런 일이 있을 터라, 피난민의 풀죽은 얼굴을 한 그 많은 사람들이 줄을 이루고 누구하나 불평 없이 화장실 차례를 기다리는 모습을 보며, 적어도 이곳에 온 1200여명은 불평불만을 선동하고 데모하는 사람들은 한 명도 없나보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돌을 깔고 사이사이에 흙을 섞은 시멘트로 채운 너덜 길을 타고 금강산으로 들어갔다. 1200여명이 함께 움직이니 선두에 서지 않으면 길바닥에서 노인들의 틈에 주저앉을까 싶어 걸음을 빨리했다.
상팔담이 보이는 산등성이 (이곳이 최대로 오를수 있는 정상이었다)
주차장에서 상팔담까지는 2시간 남짓 걸리는 것 같았다. 구룡폭포까지는 노인들도 가능한 너덜길이고 (설악동에서 비선대쯤 올라간다고 생각하면 된다.) 그 곳에서 상팔담까지는 약 30분이 걸려는데 어느 산에나 있기 마련인 깔닥고개를 연상하면 된다.
금강산 구룡폭포
용이 늘어져 있는 것 같다는 구룡폭포, 상팔담은 폭포가 떨어지는 8개의 담소가 있는 것을 말하며 그것을 높은 곳에서 한 눈에 볼 수 있는 봉우리가 상팔담이라는 목표였다. (해발 약 800m 라고함) 그저 설악의 십이선녀탕보다 조금 넓고 큰 폭포가 8개소 연이어 담소를 이룬 바위계곡이라는 평이면 틀림없을 것 같다. 상팔담 정상에 서서 부풀었던 기대를 덤덤하게 돌리며 간간이 1000M가 넘는 금강산의 고봉들이 구름사이로 나타났다 사라졌지만 생각했던 금강이 아니었기에 실망이 컸다.
"금강은 좀 크고 아기자기한 설악이다." 그런 생각으로 정리하고 사람이 넘쳐 나는 너덜 길을 바삐 걸어 하산을 했다. 운동화라고 못 가는 것은 아니지만 울퉁불퉁한 돌바닥 길이 대부분이니 등산화를 신고가야 무릎이며 발바닥의 편안함과 미끌림에서 안전할 것 같다.
4. 삼일포와 교예단
1시가 다되어 하산을 했다. 상상했던 금강산의 모습이 아니었기에 실망스러고 1200여명의 사람들이 복닥이는 산길은 그다지 행복하지 않았다. 배까지 고프다는 생각에 1200여명의 하산을 기다리며 주차장 가판대에서 삼겹살과 소주를 한잔 할 수 있었다. 단체 버스대열에 몸을 맡기고 관광기점인 온정리로 돌아와 이쪽에서의 라면 맛은 어떨까를 궁금해 하며 훼밀리마트에서 왕사발면으로(한국산) 점심을 해결했다.
오후 스케줄은 자유관광시간으로 삼일포 관광과(10불/인) 온천관광, 써커스를 예술로 승화시켰다는 교예단 공연이 옵션의 하이라이트라고 했다. 교예단 표는 뒷좌석이 특석인데 이유는 공중곡예를 관람할 때 목을 제끼지 않고 볼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일반석 주세요" (25불/인)
"일반석 다 나갔수다. 특별석 밖에 없시오."
표파는 아가씨의 말을 믿기 어려웠지만 싸울 일이 아니었기에 특석 (30불/인)을 예매했다. 막간을 이용해 삼일포를 돌아 보았다. 경포대나 화진포에 비해 낫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단지 안내원아가씨의 즉석 노래 "반갑습네다"란 노래가 그중 기억에 남았다.
삼일포로 그다지 멋스러워 보이지 않았다
써커스 공연 출연진 시작 인사
공연을 마치고 고별인사하는 단원들
600명 관람석이 꽉 차고 보조의자까지 사람들로 붐볐다. 가끔 북한소식이라는 프로에서 보았던 숨 넘어 가는 간드러진 목소리를 가진 여성사회자가 눈꼬리 웃음을 치며 사회를 보면서 거의 로봇에 가까운 서커스가 펼쳐졌다. 출연 배우들은 북한에서는 특권층으로 대접 받는다고 한다.
간혹 인간의 한계를 느끼는 모습에 안쓰러운 박수를 보내고 있었지만, 예술을 보는 눈이 어두워서인지 멋있다, 잘한다, 훌륭하다는 감탄사보다는 인간의 한계를 시험하는 듯한 광경에 시간이 지날수록 식상함이 느껴졌다. 그래도 한 번쯤은 보아야 할 추억거리다. 그래야 자기 기준으로 판단을 할 수 있는 것이니까.
5. 민족식당에서
낮에 사발면으로 점심을 때운 탓도 있었지만 저녁은 낯선 이곳에 와서 순수 이쪽 사람들이 운영한다는 식당에서 현지요리를 먹어보기로 했다. 사들인 들쭉술을 품고 기세 좋게 들어설 때부터 나설 때까지 아무도 찾지않는 ‘민족식당’이라는 요리집에 발을 디딘 것이다.
그때까지 일행이 만난 사람들은 안내양을 제외하고는 버스기사를 비롯해 모두 연변사람으로 대화도 잘 통하였고 자본주의의 서비스 정신을 조금은 이해하고 있는 듯 부드러운 면모를 보이고 있었다. 그러나 ‘민족식당’의 분위기는 처음부터 일행을 당황스럽게 했다. 우선 서로 상대가 무슨 뜻으로 이야기를 하는지 내용을 정확하게 이해할 수 없었고, 양쪽 다 자기들이 살아 온 방식대로 상대의 이야기를 해석하고 단정해 버렸다.
아무튼 우리는 메뉴라고 쓰여진 비닐 덮힌 안내판에서 돼지 앞다리찜과 명주조개 4접시, 남새 (채소: 고추2, 양파 1/4쪽, 마늘3쪽) 1접시, 무우가 아주 조금 들어간 물김치 한 종지씩을 받아 들고, 맥콜 맛의 이북맥주 4병을 마시면서 저녁으로는 명태국 4그릇과 밥 9공기를 추가로 주문해서 먹었다.
주메뉴였던 돼지 앞다리찜은 푹 삶은 고기를 두께 5cm 정도로 썰어 굵은소금을 찍어먹는 요리였는데 나 같이 입이 적은 사람은 도저히 한 입에 들어갈 수 없도록 만들어 나왔고, 의외로 모든 음식이 싱거웠다. 남쪽 같으면 이런 음식을 사먹지 않았을 텐데 하며 기가차서 웃노라면 멀리서 살짝살짝 훔쳐 지켜보는 그녀들도 아주 흡족해 하며 따라서 미소를 보냈다.
그래도 그녀들 나름대로 최선의 서비스를 하려고 노력을 하고 있었지만 손님의 입장에서 조금이라도 불평을 하면 적개심에 불타 금새 태도를 바꿔 싸움하자는 듯한 말투로 돌변하는 그녀들을 보며 달라도 너무 많이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가씨 돼지고기니 새우젖과 쌈 싸먹을 야채 주문 할 수 있을까요?" 하면 "우리 공화국에서는 그런 것 없읍네다." "그래도 무엇이든 줘야지 너무 하잖아요?" 하면 대뜸 그녀는 파란 고양이 눈을 뜨며 훈계조로 이렇게 말했다. "북조선에 와서 요리를 먹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줄 알아야 하는 것 아닙네까?" 매니저인 듯한 그 아가씨와 더 이상 대화 할 일이 없었다.
실소를 하며 들쭉술에 맥주를 부어 술만 마시다가 앞다리찜을 반쯤 남기고 식당을 나왔다. 바가지인지 실제 가격인지 모를 240불이란 종이쪽지를 받아들고 팁을 얹어 계산을 치르다가 또 다시 무안을 당했다.
"선생님 우리는 그런 것 안받습네다. 내일 관광에나 보태쓰시라요." (참고로 이쪽 식당은 달라만 받는다) 같은 민족 같은 말을 쓰고 살아도 너무 오래 동안 갈라져 살면 이렇게도 의식과 문화가 달라지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기분 전환차 호텔 1층 로비에 있던 현대에서 운영하는 라이브 카페로 갔다. 남쪽에서 마시던 생맥주잔이 돌아가고 커피등을 시켜먹었다. 필리핀 여자2명과, 키보드를 치는 1명의 남자로 구성된 그룹이 우리 또래 사람들이 즐겨 부르는 노래를 어눌한 한국말로 잘도 조잘댔다. 약간은 주눅든 사람들이 모여들어 술기운에 용기를 얻었는지 일부 사람들이 악단 앞에 작은 스테이지에서 막춤을 추기 시작했다. 어느 순간 눈치만 살피던 많은 아저씨 아줌마들의 묻지마 흥겨운 춤판이 벌어졌다. 그런 모습이 내가 살던 곳에 자유로운 모습이다라는 생각을 했다.
6. 만물상을 향하여
나머지 코스는 선택으로 만물상과 해금강이 있었다. 하늘의 조화인지 아침결 온정각에서 비로써 금강산 전체를 보는 행운을 잡았다. 커다란 산채가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아래 돌덩이로 조각된 듯 육중한 몸체를 드러내고 있었다.
장님 코끼리 다리 만지 듯 이렇게들 말했다.
"백운대하고 비슷하거여."
"오색약수 뒷 계곡의 형쯤 되는 것 같다."
"도봉산 자운봉 형쯤 되는 것 같다."
"바닥부터 정상까지 소나무가 듬성한 돌산이야."
모두가 금강산이 왜 좋다는 것인지를 알 수 없다는 표정들로 시큰둥하게 비로봉을 바라보고 실망스런 한마디씩을 했었다.
온천지구를 끼고 돌아 금강의 진수에 빠졌다. 아름드리 미인송 (미끈하게 하늘 향해 쭉 뻗은 소나무들 - 잔가지가 없는 것은 겨울에 폭설로 다 부러져 몸체만 하늘 향해 솟아올라 있다.)숲을 지나 섬섬옥수의 계곡을 굽이져 오르는 길가에는 왜? 금강산을 사람들이 천하 제일경으로 칭송하는지에 대한 답이 들어 있었다.
금강산 찾아가자 일만이천봉
볼수록 아름답고 신기하구나
철 따라 예쁜 옷 갈아입는 산
이름도 아름답다. 금강이라네
금강이라네.
1000m 정도의 가까머리 돌산이 절벽을 이루고 그 위로 산의 정상들이 하늘로 치솟았다. 간간이 걸칠 듯 매달린 소나무들과 천년을 말없이 버티고 선 고봉들이 군살 하나 없는 자태로 창가에 매달려 바라보는 산을 좋아하는 우리들을 단숨에 압도해 버렸다.
"우와~ 우와~" 말보다는 감탄사만으로 금강산을 만났다. "이래서 금강산이구나." 설악의 계곡이라면 불끈 솟은 가파른 봉우리의 절묘한 조화.... 금강의 일만이천봉중 극히 일부 봉우리를 눈으로 확인하며 우린 한순간에 압도되어 버렸다.
주차장에서 만물상을 향해 선두로 뛰어 올랐다. 바위 계곡 삼악산 입구를 들어서는 기분으로 나아가다 보면 만가지 형태를 지닌 병풍 같은 산을 마주 하게 된다. 오르는 시간은 40분 밖에 되지 않지만 (800m까지는 버스로 이동하고 100여m만 가파른 계단과 산길로 이루어져 있다) 길이 험하고 좁아 인파를 피해 날듯이 선두에 서서 정상을 향해 달려갔다.
이래서 일만 이천봉이라고 한다
금강산의 만물상이다
"으흠 이런 모습을 한 산이 세상에 존재 할 수 있다니....." 신음이 절로 났다. 그 크기나 위세에 적당할 것 같은 송곳처럼 솟은 봉우리를 접하며 우리는 또 한 번 감동에 빠져야 했다. 그래서 이 아름답고 웅장하고 섬세한 금강을 옛 선인들은 천하제일 명산으로 꼽을 수밖에 없었고 중국인들도 천하명산임을 부인치 않았으리라.
선두그룹으로 올랐기에 그나마 만물상을 오래도록 바라 볼 수 있었다. 깎아지른 절벽에 현대가 신설 했다는 철계단을 사람들이 개미떼처럼 달라붙을 즈음 나는 하산을 했다. 돌아보고 또 돌아보고 나는 금강의 아름답고 신기한 봉우리들을 머리 속에 차곡차곡 그려 놓았다.
전날 민족식당에서 맛을 본지라 마지막 점심은 온정리 현대 부페식당에서 해결하기로 했다. 맛보기 냉면과 홍어무침, 탕수육과 나물들..... 나의 투덜거림을 들었는지 아니면 11시 반의 이른 시간에 개시로 음식을 받아서인지 전 날 민족식당의 호된 식사신고 탓인지 정갈하고 푸짐한 식사가 모든 일정을 끝낸 우리들을 흡족하게 했다.
7. 남으로 가는 길
2004.8.29 12시50분 ...오전내 기다리던 우리는 남으로 향하는 버스에 올랐다.
"고향이 어디요?"
"멀리서 왔수다. 만주~"
"그렇구먼. 그래 재미있어요?"
"그냥 돈 벌라구 왔수다. 2년에 한 번 집에 가면 아새끼래 아저씨라 부르디 않을까하오."
"그럼 소속이 현대요?"
"기렇수다. 한달에 월급을 얼마나 받을 것 같습네까?"
"글쎄"
"40만원. 수당 합하면 70만원"
"남쪽에서는 최소 150은 된다던데..."
"기래도 만주보다 났디요."
정각 2시 남으로 향한 첫버스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올 때와 똑 같은 출입국 관리소를 거쳐 변함없는 모습의 산과 들과 마을들을 지나 아카보 소총을 어깨에 메고 요란한 분위기를 조성하는 인민군 최종 검문소를 지나쳤다.
왠지 다시는 못 올것 갔다는 생각에 옆에 곤히 잠든 친구들과 달리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인적하나 없는 거리며. 들이며 낯 섫은 사람들...미소가 멈춘 굳어있는 사람들... 통일을 하자며 온 몸으로 말하는 남쪽사람들은 이런 모습들을 어떤 시각으로 보았으며 느꼈는지 궁금했다.
금강산을 왜 보아야 하는지를 깨달았다면 그 못지않게 이쪽의 사람들과 함께 어울리자고 노력을 해도 많은 어려움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자기 노력만큼의 풍요로운 삶을 살수 있는 자본주의가 있다면, 배급받은 집과 곡식으로 불필요한 노력을 할 필요 없다는 그 곳 사람들의 의식을 과연 변화 시킬 수 있는 것일까?
북으로 향하는 또 다른 남쪽 관광차량들을 향해 바톤을 타치 하듯 손을 흔들며 행운을 빌었다.
"잘 들 다녀 오시구래."
2004.8.29 금강산을 다녀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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