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고철 백두산 여행기 (2011년)
독고철 백두산 (2750m) 여행기
(2011.8.12.-2011.816)
근 30년의 직장생활 중 해외여행을 다녀오겠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살다보면 그런 날도 오는 것인지... 8월15일이 광복절로 하루 쉬는 날이고 금요일인 12일은 회사에서 공동휴가 내주는 절묘한 타이밍을 잡아 마누라가 무슨 마음이 들어서인지 백두산 관광 상품에 덜컥 예약을 했다. 모처럼의 휴일을 방에서 보낼 일은 없는 것이기에 흔쾌히 따라 나섰던 백두산여행길이다.
2011.8.12 금요일 1일째 장마비
해외여행객 홍수시대에 사는 시대적 상황에 마추어 12시 출발 비행기였지만 넉넉한 마음으로 일찍 나서 9시30분 공항에 도착했다. 이번 여행은 가이드 및 운전사 팁 50불, 발마사지 20불 다 더해서 1인당 약 71만원의 상품이었다. 비행기는 중국의 남방항공이었고 좌석을 배정 받으며 대략 함께 갈 사람들과 눈인사를 나누었다. 우리일행은 두 팀으로 나뉘어 있었고 1팀 9명, 2팀 10명으로 총 19명이었다.
중국 비행기라서 그런 것인지 출발예정시간인 12시를 30분이나 넘겨 비가 쏟아지는 하늘로 출발했다. 늦장 출발도 여행을 시작하며 그리 유쾌한 일이 아닌데 목적지까지 45분 비행시간이라던 멘트와는 달리 도착예정시간에서 30분이나 지나도록 대련공항으로 내려갈 낌새가 보이질 않았다.
중국비행기는 알아들을 수 없는 중국어 안내 방송만 계속했고 중국인 스투디어스는 무슨 일인지를 묻는 승객들에게 미안한 웃음 한 번 주지 않았다. 통역으로 나선 고향가는 조선족 아줌마의 도움으로 목적지인 대련공항은 안개 때문에 착륙이 불가하여 텐진공항으로 간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텐진공항에도 비는 하염없이 내렸다. 시간이 지날수록 사람들이 짜증을 내기 시작했다. 중국인들이 시끄러운 사람들이라는 통염이 무색하게 한국인들의 수다는 70%정도의 중국인 승객들 입을 다물게 했다.
그 중에서도 중고등 학생들 단체 한국인들은 정도가 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살아야 한다는 가장 기본적인 문제에 있어서, 가정교육에 문제가 있는 것인지? 학교교육에 문제가 있는지..... 중학생이나 대학생이나 남녀 구분 없이 하나 같이 시끄럽고 무질서함을 바라보며 같은 한국인으로써 부끄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짜증 속에 시간이 흘러 대련공항에 오후 4시에(현지 시간 5시) 도착했다. 45분 만에 갈 수 있는 곳을 4시간 걸려 간 셈이었다. 27살이라는 조선족 가이드를 따라 34인승 버스에 오르자 함께 여행할 19명의 일행들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있었다. 부부나 가족으로 온 사람들이 대부분이었고, 혼자서 여행길에 나선 사람도 3명 있었다.
대련에는 사비성이(비사성) 있었다. 랴오둥 반도 최남단에 위치한 삼면이 바다인 고구려의 전략적 요충지였던 성이란다. 예정대로라면 사비성을 둘러보아야겠지만 이미 하루 일정을 비행기에서 보낸 우리 일행은 대련에서 단동으로 향하는 고속도로에서 차장 밖에 비춰진 어둠이 깔리기 시작한 사비성을 보는데 만족해야했다.
가이드 말로는 대련시에 (중국식 발음 : 다렌) 500만명이 살고 있으며 중국정부에서 북쪽의 홍콩으로 개발하겠다는 의지가 있다고 했다. 부산이 350만명 인구이니 대련이라는 도시는 결코 작은 도시가 아님을 느낄 수 있었다. 2000여년 전에는 고구려의 전략적 요충지요, 일본의 만주국 수도가 심양이라면 일본의 대륙 침략 발판 항구였을 그곳은 동북3성을 개발하려는 중국정부로써도 중요한 역할을 가진 전략도시라는 생각이 들었다.
대련과 단동을 연결하는 고속도로로 들어섰다. 이동해야 할 거리가 서울과 부산의 거리인 450km 보다 조금 먼 500km 로 끝이 없어 보이는 광활한 대지에는 옥수수가 바다를 이루고 있었다. 시속 100km가 제한 속도이고 중간인 250km 지점에 휴게소 1개소가 있는 고속도로는 통행료가 우리 돈으로 6만원인 관계로 고속도로를 달리는 차량은 가뭄에 콩 나듯 했고 대부분 차량들은 일반 국도를 이용한다고 했다.
놀라운 것은 500km를 달리는 동안 터널이 없었다는 점이다. 즉 500km 구간에 바다와 같은 대지에는 산이 없었고 텐진에서 베이찡을 향하는 평원보다 더 드넓은 평원이 그곳에 있었다. 옛 고구려 선인들이 이 땅을 가지고 있었기에 이곳에서 생산된 풍요로운 물자를 바탕으로 중국과 큰 전쟁을 할 수 있었고 한편 이 곳을 지키려고 결사적인 전쟁을 마다하지 않았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튼 500km를 5시간 동안 달려 목적지인 단동에 도착했다.
단동하면 신의주와 연결된 중국의 국경도시이고 우리나라 텔레비전에 비춰지는 단동시는 그리 커 보이지 않는 낙후된 중국의 지방도시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내 눈에 비춰진 단동은 그런 하찮은 도시가 아니었다. 인구 250만명의 대도시이며 이는 우리나라의 대구만한 도시였다.
중국인들답게 허세로운 높은 건물과 상가들 네온사인이 거리에 가득하고 외제차량이 넘쳐나는 도심의 풍경이 있었지만 도로변 빌딩 뒤로 들어가면 아직은 겉으로만 개발된 오래된 도시로 시내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의 수준은 우리와 15년에서 20년쯤 뒤떨어졌다는 느낌이었다. 아무튼 우리가 생각하는 낙후된 중국의 변방도시는 아니었다.
단동과 달리 강 건너 신의주는 단 한 개의 불빛도 없었다. 전력 사정이 어렵다는 증거라고 했다. 어둠이 내린 압록강변의 별3개가 그려진 숙소에 도착했다. 서울집에서 아침 7시30분에 출발해서 단동의 숙소에 밤 11시가 다되었으니 16시간만에 도착한 셈이다. 차에 시달린 몸을 단동의 압록강변을 걸으며 풀어보고 싶었지만 북한과 다리 하나 두고 있는 늦은 밤거리의 낯선 산책은 아무래도 석연치 않아 잠자리에 들었다.
2011.8.13 토요일 2일째 장마비
둘째 날 일정은 단동을 출발하여 국내성이 있는 집안까지, 그 곳에서 다시 백두산을 가기 위해 통화까지 8시간을 버스로 이동하는 여정이었다. 7시에 버스에 올랐다. 단동시의 압록강 철교가 있는 곳에서 미군 폭격으로 끊어 진 다리와 (북한 쪽으로 끊겨 있었음) 가끔 텔레비전에서 김정일이 중국 간다며 화면으로 나오는 새로 건설된 철교를 사진에 담으며 강하나 사이로 너무도 초라한 북녘 땅의 배고픈 사람들을 생각했다.
압록강 철교
단동시는 압록강 하구에 위치하여 강폭이 2000m가 된다고 한다. 그러나 강을 넘어 탈출한다고 해도 중국말을 전혀 할 줄 모르는 조선 사람들은 이곳 사람들에 의해 신고 되어 다시 끌려가기 때문에 이쪽으로 탈북을 시도 하는 사람은 없다고 한다.
이른 아침이지만 단동 강변을 따라 조깅하거나 낚시를 하는 이곳사람들의 얼굴과 복장에서 느껴지는 여유로움 수준은 남한의 중소도시의 사람들과 행색이 비슷한데, 헐벗고 굶주려 거지 행색을 하고 있을 북한 사람들이 탈북을 하여 이곳에 도착한다 한들, 인간적으로 따뜻이 대해 줄 거라는 생각은 같은 민족도 아니고 다른 민족간에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라는 단정을 하며 신의주, 의주, 위화도를 끼고 국내성이 있는 집안으로 가는 중국의 압록강 강변길을 달렸다.
국내성까지 약 260km를 6시간 동안 달렸다. 단동을 출발해서부터 대평원이 사라지고 압록강을 끼고 높고 낮은 산들 사이로 간간이 평지를 대하는 우리나라 산골의 시골길 같은 도로를 달려 오후 1시 국내성에 도착했다.
중국도 압록강이라고 표시한다
압록강에서 모터보트로 북한국경을 돌아보는 관광
북한의 만포시와 압록강을 접하고 있는 국내성은 기원전 4세기 환인의 졸번성에서 개국한 고구려의 (개국 BC37년 - 멸망 AD688년 : 기간 725년) 두 번째 수도로써 4백여년 동안 내가 출발한 대련에서 서족으로 만주를 지나 두만강이 바다를 접하는 곳까지, 북쪽으로는 시베리아 벌판까지, 남쪽으로는 한강의 이북까지 그 넓은 만주땅을 호령하던 강성한 대국의 고구려의 수도였다.
지금은 25만명의 인구에 광개토태왕릉, 장수왕릉등을 포함한 12000여개의 무덤들과 함께 살고 있는 우리나라 경주와도 같은 고도였지만 현재 이 땅에 살고 있는 주권세력인 중국인들에게 타민족의 역사를 잘 보존해달라고 한다면 같은 입장에서 우리는 어떤 답과 행동을 하게 될지 생각해 보게 된다.
장수왕릉
장수왕릉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컷다. 왕릉 주변에 커다란 돌은 석묘를 누르는 역할로 이것을 제거하면 참하가 일어나 석묘가 기울고 붕괴될수 있다고 한다.
말로만 듣던 광개토태왕비를 보았다. 자랑스런 선조의 자취를 보며 민족과 조국이라는 두 단어가 가슴에 와 닿았다. 광개토태왕릉과 장수왕릉을 돌아보며 시끄럽게 쏼라대며 물건 파는 중국인들을 탓하기보다는 이 광활한 땅과 자원을 빼앗긴 역사의 현실과 나의 삶만을 열심히 살아온 것에 대한 작은 미안함이 마음을 아프게 했다.
가이드 말에 의하면 고구려는 중국과의 전쟁을 고려해서 졸번성이나 국내성 같은 매우 추운 산악지역에 수도를 건설하고, 적이 수도까지 쳐 들어오면 겨울이 올 때까지 산성으로 천도하여 끈기와 추위를 주 무기로 침략자들과 싸움을 하는 전술을 썼다고 했다.
국내성에서도 적게는 3개월 길게는 36년간을 국내성 배후의 환도산성으로 천도하여 전쟁을 하였다고 한다. 하기사 수십만의 중국군대와 싸워야 한다면 평야보다는 천혜의 산악요지에 있는 성이 적격이며, 수십만의 군사가 먹는 것과 추위를 걱정해야 한다면 겨울 전쟁환경이 열악한 곳에서 장기전으로 싸우는 것이 유리할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환도산성을 버스로 돌아보며 색다른 광경을 접했다. 성곽의 희미한 자취만 있는 산성의 하단 평편한 곳에 그 곳에서 싸우다가 전사한 장군들의 무덤이 나란히 세월의 비바람을 맞고 있는 광경이었다. 적과 전쟁에서 살아 남은 군사들은 항상 자신들과 함께 했던 장군들의 무덤을 보며 자신도 자랑스럽게 조국을 위해 싸우다가 죽으리라는 의지와 각오를 다지는 그런 의미가 있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백두산으로 가기 위한 그날의 숙박지는 통화시였다. 국내성에서 통화까지는 4시간이 걸렸다. 오후 4시 국내성을 출발해서 통화시에 있는 식당에 도착한 것은 저녁 8시가 다되어서였다. 어제에 이어 오늘도 10시간의 버스 여행이 계속된 셈이다.
비를 몰고 다니는 것인지 서울을 출발해서 오늘까지 계속해서 오락가락하는 빗속에 있었다. 내일은 비가 오지 말아야 할텐데......그래야 백두산에 오르고 천지를 보게 될 것 아닌가? 다들 피곤해서인지 늦은 밤 통화시를 구경하겠다고 나서는 이가 없어 10시쯤 잠이 들었다.
2011.8.14 일요일 3일째 장마비
아침 5시 30분쯤 통화의 거리로 나섰다. 일찍 일어나는 습관도 있었지만 장거리 버스여행의 단조로움과 오늘 오르게 될 백두산 천지를 위해 준비운동 겸 가벼운 산책을 하기 위해서였다.
통화는 대련이나 단동, 집안(국내성)에 비해 무질서가 너무 심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도로의 중앙선이 있으나 필요하면 어떤 곳에서든 U-turn하기 일쑤이고 신호등도 지키는 사람이 많아 보이질 않았다.
심지어 어떤 택시는 도로 한가운데 차를 세워 놓고 세차를 하고 있었지만 오가는 차들이나 사람들은 그를 탓하는 이가 없는 것도 신통했다. 나와 관련 없으면 말할 이유가 없다는 중국식 무관심과 타인의 무질서에 대해 관대한 대륙적인 기질... 그런 것 아니겠나 싶었다.
이른 새벽부터 런닝까지 벗어 젖이고 거리를 활보하는 남자들을 여럿 보았다. 심지어는 호텔 엘리베이터에서 그런 차림으로 빤히 쳐다보는 중국인 호텔투숙객을 만나면 시선을 어찌해야 할지 난감했다.
중국에서는 여름에 웃통을 벗고 다니는 것과 공항이나 엘리베이터안, 장소 불문하고 담배를 피워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또 차량들이 이동할 때 다른 차량을 만나면 경적을 계속해서 울리는 이유는 상대가 자신을 인식하고 알아서 피해 가라는 신호인 셈이다. 이런 무질서에 도로포장 상태가 좋지 않고, 보통의 도로와 달리 노견이(보행자를 위한 공간) 없는 이곳 도로는 교통속도 표지판처럼 시속 40km를 초과해서는 위험해 보였다.
운전기사들도 이점을 잘 알고 또 하루에 운전을 최소 8시간에서 10시간 이상해야 하는 기사들은 절대 과속하거나 위험한 운전을 하지 않았다. 중국인의 대륙기질인 만만디가 통하는 운전이기도 했다.
“무질서 속에 질서” 이 몇 마디가 딱 맞는 통화시의 아침이었다.
백두산을 보아야 한다는 일념으로 6시30분 버스에 올랐다. 11시30분쯤 식사를 했다. 장대비가 창밖을 적신다. 이렇게 힘들게 와서 천지를 못 본다면 너무 억울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중국측 배두산 출입구
모형도에서 붉은선이 천지로 가는 길이다.
12시 40분 백두산(중국 장백산) 공원 입구에서 공원관리소에서 운영하는 버스를 타고 천지로 향했다. 가이드는 일인당 우리 돈으로 6만원이나 받는 중국당국의 고가 입장료에 불만이었지만 우리나라에 그린벨트가 없었으면 어찌 되었겠는가를 생각해 보면 아주 잘 한 일이라는 개인적인 생각이다.
백두산 전용 버스
백두산으로 향하는 길가에는 책 또는 텔레비전에서 보던 끝이 보이지 않는 자작나무 숲길이 이어졌고 거짓말 같이 장마비로 가득하던 하늘의 구름이 백두산을 중심으로 서서히 거치기 시작했다.
백 번 올라가서 두 번 천지를 본다고 해서 백두산이라는 우스개 말이 있듯이 천지는 아무에게나 쉽게 자태를 보이지 않는다고 한다. (백두산이란 산 정상부가 희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실제 정상에 올라 흰 부분을 자세히 본 결과 백설이 아닌 돌과 화산재 색깔이 회색인 것을 확인했음)
자작나무 숲
멀리 백두산이 보인다
평야지대에서 백두산 자락에 이르자 화산재 탓으로 나무가 자라지 못했다.
2011.8.14 오후 1시20분 백두산 정상이(2750m) 지척인 버스 종점에 도착했다. 주변 장마구름이 백두산을 향해 달려오고 있으니 서둘러 천지를 보라는 가이드의 흥분된 목소리와 함께 2시40분까지 되돌아오라는 주의를 듣고 나무계단으로 된 1960개의 계단에 발을 디뎠다. 한 계단을 18cm으로 계산하면 350m 전후의 수직높이이고 경사를 25%로 본다면 약 1400 ~ 1500m쯤 되는 거리를 30분 만에 뛰어 올랐다.
아무생각이 없었다. 가슴이 멍하여 말을 할 수 없었다. 그냥 한 동안 한숨만을 깊고 어두운 천지를 향해 토해내며 내가 그곳에 서 있음에 감사해 했다. 일행들이 하나 둘 도착했다. 그들도 나와 같은 깊은 감동으로 왔다는 기쁨보다 천지를 보았다는 기쁨에 앞서 침묵의 시간이 필요한 듯싶었다.
한라산 백록담의 40배라는 천지는 남북 길이 4.85㎞이고, 동서 길이는 3.35㎞이다. 천지의 수면은 해발 2194m이고, 깊이는 평균 204m이다. 압록강 · 두만강 · 송화강의 발원지이며 지하수가 샘솟아 40%, 강우에 의해 60%가 호수물에 근원이 된다는 백두산 천지의 기막힌 광경은 그리 오래도록 우리를 행복하게 두지 않았다.
북한과 중국 국경
중국쪽에서 먹구름이 떼 지어 몰려오는 것이 보였다. 천지와 함께 한 20여분 만에 그토록 신비하고 아름답고 장쾌한 백두산 천지는 구름과 안개속으로 빠르게 사라져 갔다.
서서히 안개가 천지를 가리운다
가이드 주의사항 중 ‘독도에 일본인이 가서 일장기를 흔들며 만세와 함께 일본국가를 부른다면 한국사람들이 어떻게 할까요?’ 중국에서는 바로 공안들에게 잡혀가 며칠 구류살고 벌금으로 4-5백만원 내고 국외로 추방된다고 한다.
이곳 백두산은 우리 한민족의 영산이기도 하지만 청나라를 세워 중국을 통일했던 본거지가 심양인 여진족의 영산이기도 하며 현재 중국령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않된다는 섭섭한 이야기였다.
내려오는 길에 금강대협곡등 몇 군데 관광을 하였으나 천지의 장엄함에 마음을 빼앗겨 그리 관심이 가질 않았다. 16시 백두산 서파관광을 마치고 공원 입구로 돌아왔다. 드높던 하늘은 먹장구름으로 덮여가고 끝내 장대비로 쏟아졌다.
돌아오는 길 교통사고 등이 있어 통화시에 도착한 것은 밤 11시30분이 되어서였다. 아침 6시30분부터 일정을 시작했으니 17시간의 하루여정이 끝난 것이다. 하지만 일행들은 이런 장마날씨에 특별히 천지를 맑게 보게 된 것만으로도 고통을 감내할 수 있고 정말 행복하였노라고 말하고 있었다.
기원전 4세기 환인의 졸번성에서 개국한 고구려 (뒤에 산은 오녀산 산성)
2011.8.15 4일째 장마비
이제는 간 만큼 돌아가야 할 시간만 남았다. 통화에서 8시에 버스에 올랐다. 단동을 향해가며 주몽이 고구려를 건국한 환인의 졸본성과 오녀산산성 보는 것을 목적으로 3시간 동안 여행을 하고, 다시 단동으로 4시간 이동하는 여정이다.
통인에서 단동까지 500km를 7시간 동안 이동했다. 창밖은 변함없이 굵은 빗줄기로 시선을 흐렸고 다들 피곤해서인지 깊은 잠과 짧은 잠을 계속잤다.
낯익은 단동이 눈에 들어왔다. 그래도 돌아가는 길의 반을 왔다고 생각하니 다들 없던 힘이 생기는 눈치였다. 시속 100km으로 달릴 수 있는 단동-대련간 고속도로 500km를 빗속에 굳세게 달려 대련의 호텔에 도착한 것은 밤 10시였다. 오늘 하루는 관광 없이 꼬박 14시간버스만 타고 이동한 셈이다.
몇몇 사람들이 마음을 맞춰 밤 늦은 대련의 어둠을 즐겼다. 늦은 시간 사람들이 모여앉아 있는 곳은 꼬치장사들이 있는 곳으로 그곳에서 1개에 우리 돈으로 170원하는 양고기꼬치와 240원하는 새우꼬치, 240원하는 닭목아지 꼬치, 고추꼬치를 푸짐히 주문했다. 한 손에 담배를 피워 물고, 가끔 가래침을 바닥에 뱉으며, 행주인지 걸레인지 모를 헝겊에 쓱쓱 손을 닦는 중년 요리사의 밝은 얼굴을 지켜보며 이국의 요리 맛에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2011.8.16 화요일 5일째 장마비
만나면 이별이라고 중국을 떠나야 할 날이 밝았다. 아침 비행기시간을 맞추려고 호텔을 6시10분에 나섰다. 식사로 빵 1개와 삶은 계란 1개, 우유 1개를 지급받고 안개로 50m 시계가 되는 않는 거리를 달려 공항으로 향했다.
7시 30분 출국심사대를 통과해 8시 출발 비행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백두산 천지가 어렵게 우리에게 행운을 준 것에 반하여 귀국의 어려움은 쉽게 끝나질 않았다.
안개와 비로 연착을 계속하던 비행기는 9시간을 대기한 끝에 오후 5시가 되어 우리를 비행기로 인도했다. 정확히 45분을 날아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언제나 귀국 길에 느끼는 것이지만 이렇게 깨끗하고 아름답고 정스러운 나라는 세상에 없는 듯 싶다.
천지의 장엄함이 쉽게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다. 장마비 와중에도 우리에게 천지를 허락해준 백두산 산신령님께 감사드린다. 이 행운이 나와 함께 한 모두에게 오래도록 간직되길 바란다. /끝. 2011.8.18
첨언
1. 참고로 식사는 한식으로 보통사람이면 문제가 없으므로 별도의 반찬 필요없음.
2. 일회용 화장지와 물티슈 준비.
3. 백두산 정상은 8월 중순 경우 가을 등산복 정도 복장이면 오케이.
(최적 방문기간은 5월부터 9월까지라고함)
4. 등산화, 운동화 모두 오케이.
5. 치약, 면도기, 충전기(다국적용) 준비.
6. 장거리 이동에는 목베개가 아주 유용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