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전한 사랑" 3부
3. 안개꽃 청춘
그를 따라 용산 버스터미널에서 제부도행 버스에 올랐다.
이글대는 태양! 아스팔트를 따라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한적한
시골을 향하는 버스 안에서 우연히 만났다는 한 무리의 민우 친
구들 통기타 소음에 묻혀 흥얼거리며 4시간쯤 달려 바다가 보이
는 들녘에 다다랐다.
학창시절에는 공부에 시달려 시원한 바다를 한 번도 본적이 없
었고 졸업을 하고서는 집안일에 묻혀 바다를 생각해 본 적도 없
었다. 그러고 보니 바다란 TV에서나 보았지 실물로 마주 하기
는 난생 처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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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이 구름을 타고 낮게 깔리어
잿빛 바다에 고개를 묻었다.
바닷속 답답함에 고개 들어 하늘 보니
물결에 실린 나는 뭍이 저 만치이고
가고파도 못 가겠네 내 고향 뭍으로
손에 잡힐 듯하여 휘저어 보아도
보고 싶어 슬퍼할 멀기만 한 그대
잿빛 바다에 바람이 인다.
생각나는 대로 수첩에 끌적 이는 나를 두고 민우가 다가왔다.
"은영아! 바다에 네 마음을 보여 주렴. 바다를 찾는 사람들에게
바다를 찾는 이유를 물으면 아무리 힘들게 괴롭혀도 싫은 내색
한 번 않고 받아주는 덤덤함이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구릉이 끝나는 곳에 바다와 끝도 없어 보이는 갯벌이 있었다.
외출 할 일이 없어 아빠가 사다 주셨던 한 번도 입어 보지 못했
던 하얀색 투피스에 하얀 스카프, 멋진 리본이 달린 밀집모자와
하얀 샌달을 끌며 엄마의 썬그라스를 낀 채 버스에서 내렸다.
버스 안에서 민우의 친구들이 가끔 내게 시선을 주는 것은 느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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었지만 그 들만의 놀이에 열중 하는 듯 내게는 그리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버스에서는 특별히 민우와 이야기를 한 적도 없
고 운전사 옆 좌석에 홀로 앉아 밀집모자로 얼굴을 가린 채 창
밖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으니 말을 붙여 볼 엄두가 나질 않았
겠지.
게다가 나는 햇빛 한 번 제대로 본 적이 없는 창백한 얼굴로 슬픈
눈을 하고 있었으니 가끔씩 음료수를 가져다주는 민우 외에는 누
구도 말을 붙여 오는 사람이 없었던 것은 당연한 일인 것 같았다.
바다의 비릿함이 온몸을 감싸고 8월의 정오 햇살이 미간을 간지
럽히며 멍울진 가슴에 더운 김이 서리 듯 빼곡이 담겨지는 시골
길 정취가 두 눈에 들었다.
한가진 길 한 귀퉁이에 우리를 내려놓은 버스가 매연을 뿜으며
먼지 속으로 사라질 무렵 "얘들아! 가자!" 하는 민우의 외침을 들
으면서 그들의 꼬리를 따라 바다가 갈라진 시커먼 뻘 위로 난 작
은 길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야~야야 저 망둥이 좀 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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썰물 때 미처 빠져 나가지 못한 망둥이들을 향해 좋아라 소리치
며 내달리는 그들을 바라보며 걱정 없는 발랄함과 청춘의 굵고
격한 숨소리에 내 온 몸까지 살아 굼틀거린다는 느낌을 받았다.
"야! 임마! 소개 좀 시켜라. 어디 소속 모델이시냐?"
"이 자식이 점잖은 척은 혼자 하더니만 저런 숙녀가 있었구먼."
뭍으로부터 10분쯤 걸어 바다로 향했을까? 앞서 나가던 민우의
친구들이 뒤따르던 나의 귀에까지 들릴 정도의 큰 목소리로 민
우를 닦달하자 민우가 못이기는 채 친구들을 불러 모았다.
"자식들! 모두 이리 모여봐!"
"자! 그럼 지금부터 개인소개를 이 제부도로 향하는 바닷길 한복
판에서 성민우가 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공짜는 없으니까 오
백원씩 내세요."
친구들이 투덜거렸지만 모아진 이천원을 청바지에 꽂아 넣으며
그는 링 아나운서 맨트로 우리들을 소개 했다.
"오늘의 사내들을 오른쪽부터 소개 하겠습니다. 청코너 키 176
체중 68키로그람 소속 아랍어과~ 선비처럼 살다 가겠노라는
곽방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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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방근이 친구들 중앙으로 나서자 친구들은 박수장단에 맞춰
동물농장이라는 노래를 불렀다.
“닭 장속에는 암탉이 꼬꼬댁 꼬꼬댁 마루밑에는 강아지 월~월~
으르릉 월~월~ 개울가에는 오리가 괙꽥~ 꽥“
동물 울음 흉내를 내던 그는 신이 나던지 수탉의 기상 찬 날개짓
에서 강아지의 장난스러운 울음과 으르렁 대는 표정, 목을 쭉쭉
앞으로 뽑아 대고 꽉~꽉 오리소리까지 장단에 맞춰 장난스럽게
한판 춤을 추었다.
노래를 마치자 언제 그렇게 장난꾸러기였냐는 듯한 얼굴로 턱이
맞닿을 만큼 가까이 다가오는 그의 얼굴을 피해 달아나려 했지만
어느 새 잡힌 손등에 그는 엄숙한 표정으로 키스를 하며 말했다.
“저~ 아직 애인이 없으시죠. 내 애인이 되 주세요.”
무섭기도 하고, 장난스럽기도 하고, 무시당하는 것 같기도 했지
만 그들이 나쁜 친구들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아 미소로 답했었다.
"청코너 키 174. 58키로그람 소속 영문과~ 섹시한 여인과 로맨스
가 꿈이라는 ~ 이용정~~~"
주름이 깊고 험하게 늙어 보이는 이용정이 작은 눈을 더욱 가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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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며 중앙으로 나서서 혀를 날름거리며 능글스런 표정을 짓자 친
구들이 알았다는 듯 일제히 박자를 맞추었다.
“꿍짝꿍짝 꿍짜짜 꿍짝~ 오늘도 걷는다만은 정처 없는 이 발길.
지~나온 자국마다 눈물 ~~~~"
노래가 끝나자 주머니 속에서 영양갱을 꺼내 무릎을 꿇은 채 두
손으로 받쳐 들고 "낭자~ 이제 이 사람은 꿈을 이루었소. 이 갱을
드시면 잠에서 깨어나 드디어 사내중의 사내 이용정과 사랑에 빠
지게 될 것이요." 키득거리던 나는 그의 갱을 두 손으로 받아들었다.
"청코너 키 176. 75키로그람 소속 일어과~ 사업가가 되겠다는
김경백~~~"
엄숙한 표정의 그는 우리들 앞으로 나서며 이렇게 말했다.
"주여 이 어리석은 양들을 굽어 살펴주소서. 험한 파도와 난관이
있을 지라도 생을 찬미 하며 살 수 있도록 허락........"
개구쟁이 친구들이 기도를 간단히 하라고 "아멘"을 반복했지만
그럴수록 김경백은 들은 척도 않고 열과 성을 다해 기도를 열심히
하였다.
"마지막으로 청코너 선수는 나와 동성동본인 아저씨로써 키 1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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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m 65키로그람 소속 독문학과~ 교수가 꿈이라는 어벙이 성연동
~~~"
쑥스러움에 고개를 하늘로 향하고 손을 들어 흔들며 싱겁게 중앙
을 한 바퀴 돌더니 내게로 다가와 악수를 청했다.
"그럼 지금부터 챔피온을 소개 하겠습니다."
이 친구들은 평상시 이 짓을 즐겼는지 아니면 사전에 연습을 했
던지 손발이 척척 맞으며 4명이서 주먹으로 불어주는 빵빠레가
바다 한복판의 길에서 울려 퍼졌다.
빰빰빰 빰빠바~ 빰빰빰 빰빠바~ 빠라빠라빰 빠라빠라빰
"홍코너 키 170. 체중 50키로그람 소속 신의 아마조네스~
챔피온 조은영~~~"
다섯 친구들이 인디언처럼 소리를 지르며 목례로 인사를 하고
있는 나와 민우를 가운데 두고 빙빙 돌면서 주술을 외우는가 싶
더니 갑자기 엄숙한 모습으로 무릎을 꿇고 민우와 나를 향해 두
팔을 뻗으며 외쳤다.
“저희들의 동정헌납을 받아 주옵소서.”
민우는 여전히 장난스럽게 웃고 있었고 나는 그들의 뜻을 몰라
민우 뒤에 엉거주춤 숨어 어리둥절해하며 어쩔 줄을 몰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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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말하는 동정헌납은 "허락이 없으면 동정을 절대로 버리
지 않겠다."라는 피의 맹세라는 것인데 무릎을 꿇고 있던 곽방근
이 갑자기 배낭으로 달려가는가 싶더니 칼들을 찾아 하늘을 향해
뽑아들고 순식간에 결연히 팔뚝에 대고서는 손목을 자르는 듯 했다.
너무 짧은 순간의 비장한 얼굴로 하는 행동들이었기에 말릴 틈도
없었고 팔을 붙잡고 고꾸라지는 그를 향해 그들이 비명을 지르며
한꺼번에 몰려들었다.
무슨 일인지를 몰라 손으로 입을 가린 채 어쩔 줄을 몰라 했지만
그 순간도 잠시 일을 낼 듯 험악한 인상으로 쓰러졌던 곽방근이
언제 그랬냐는 듯 밝은 미소와 함께 막걸리병을 들고 내게 다가와
사정없이 잔을 받게 하고는 가득이 술을 따르며 주술처럼 외쳤다.
"마님! 저희들의 동정을 거두어 주셨으니 아랫것들로 받아 주시
옵소서."
잔을 받아들고 나를 놀리고 있는 어처구니없는 이들에게 화도
났지만 진지한 그들의 얼굴들을 바라보며 낮은 목소리로 인사했다.
"조은영이에요. 민우와는 초등학교 동창이고 학교는 현재 가정사
정으로 휴학중이에요. 잘 부탁 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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묻지도 않은 학교 이야기를 괜히 했다 싶었지만 그래야 내가 떳떳
할 것 같은 생각에서였다.
바닷물이 들기 시작 하는지 파도가 점점 높아지고 제부도로 향하
는 작은 바닷길에는 낄낄대는 우리 여섯 사람만이 막걸리 잔을
부딪치며 바람을 맞고 있었다.
"이제는 가야 할 것 같은데...."
민우의 말대로 주변이 시커먼 뻘뿐이었던 것 같았는데 어느 새
바닷길에 파도가 와 닿으며 물보라를 일으키고 있었다.
"거기 학생들 빨리 섬으로든 뭍으로든 나오세요. 앞으로 15분 정
도면 바닷길이 닫칩니다. 학생들! 빨리 그 곳에서 나오세요."
섬에 파견된 파출소에서 확성기를 통해 경고 방송을 하고 있었다.
"야! 빨리 튀자."
여섯명이 섬을 향해 뛰었다.
눈 깜짝 할 사이에 바닷길은 물 속으로 서서히 잠겨 가고 있었고
낮은 곳은 길 위로 바닷물이 신발을 잠길 만큼 넘나들게 되자 옷
차림새도 그랬지만 옷을 끌며 허둥대는 나를 허락도 없이 민우가
둘러업고 섬을 향해 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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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착한 섬에는 경찰관 한 명과 함께 봉사 활동을 나온 친구들 한
무리가 우리를 맞이하고 있었다.
"학생들 객기는 집에서나 부려야지 그러다가 무슨 일을 당하면
어쩌려구 그래?"
경찰관 아저씨가 화 난 얼굴로 우리 일행을 나무랬다.
"죄송 합니다." 하며 자리를 피하는데 민우는 나를 내려놓을 생
각이 없었다.
"야~! 나 내려 줘~"
주변 친구들의 눈총을 받으면서도 민우는 나를 내려 놓칠 않았다.
조금은 모래가 다져 진 곳에서 그의 등을 벗어나며 되돌아 본 바
닷길은 언제 길이 있었냐는 듯 중간 중간 흔적이 만을 남기고 잿
빛 바다가 그 위를 덮고 있었다.
일행들과 나지막한 언덕위에 송림이 우거진 교회로 향하며 지난
목요일 서울 집에 전화를 했다가 엄마로부터 나에게 연락이 왔다
는 소식을 듣고 그 동안 잡아 두었던 조개를 담아 우리 집에 왔었
다는 것하며, 내일이면 봉사가 끝나는 날로 오늘밤이 이 곳에서의
마지막 밤이었는데 오늘 용산터미널에서 이 곳으로 놀러 오는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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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리의 친구들을 만나게 되었다는 것이 그가 말하는 며칠 동안의
스토리였다.
간단히 봉사대 여학생들과 인사를 나누고 들어간 숙소에는 마루
바닥에 개인당 두 장의 군용모포와 옷가지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
었다.
"이 곳을 쓰세요."
우선 편한 옷으로 갈아입어야겠다고 생각 하고는 청바지와 긴팔
셔츠로 옷을 갈아입는 동안 남아 있던 친구들이 점심을 준비 했
다.
민우가 다른 곳에 가서 텐트를 치라고 그리도 말리는데 오늘 만
난 4명의 친구는 동정주를 바친 마님을 곁에서 지켜 드려야 한
다고 목소리를 높이면서 목사님께도 허락을 받았다며 교회 마당
에 부득부득 짐을 풀고 텐트를 쳤다.
꽁치 통조림이 들어간 김치찌개로 늦은 점심을 해결하자 식권증
과 함께 모처럼의 여행에 피로가 몰려 왔는지 잠을 자고 싶었다.
모포를 두 겹으로 해서 가운데 몸을 넣고는 친구들의 두런대는
이야기 소리에 스르륵 잠이 들었다가 소란스러운 소리에 잠을
깼지만 두 눈을 감고 뜨거운 커피 한잔을 생각했다.
모기향 타는 냄새... 모닥불을 피웠는지 솔가지 타는 냄새도 났다.
누군가 이마에 조심스럽게 손을 짚는 것을 느끼며 본능적으로
담요를 몸에 감으며 일어나 앉았다.
"괜찮아? 너무 깊이 잠들어 있어서 깨우지 않았어. 배고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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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우의 물음에 나는 어린아이처럼 고개를 가로 저었다.
교회 앞마당에서는 모닥불을 피워 놓고 8시부터 시작된 동네
주민들과 내일 떠나는 봉사대의 환송식이 진행되고 있었다.
잠시 자리를 비웠던 민우가 돌아와 뜨거운 커피를 내게 주었다.
"좀 마셔 봐. 훨씬 몸이 가벼워 질 꺼야."
커피를 마시는 동안 민우가 조심스럽게 등 뒤로 다가와 목과 어
깨를 주무르기 시작했지만 거부감 없이 그에게 어깨와 팔을 맡
겨 두었다.
얼마간 시간이 지난 후 우리가 모닥불 주변으로 조용히 숨어들
자 두 사람의 시간이 못 내 의심스러웠던 친구들이 비양거림이
시작되었다.
이용정이 벌떡 일어나며 외쳤다.
"마님 돌쇠라고 다 돌쇠가 아니옵니다. 이 사람 이용정! 얼굴은
삭아 영감이라고 놀림 받지만 마음과 정열만은 용광로처럼 불
게 타 옵니다."
신성일 버전으로 말을 마친 이용정이 갑자기 내 곁으로 달려와
서는 민우를 강제로 밀어내고 강제로 나와 팔짱을 끼자 이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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싶은 오늘 만난 새 친구들이 나에게 떼를 지어 달려들며 양팔과
양다리를 껴안은 채 물귀신처럼 달라붙었고 나는 영문도 모르는
비명을 질렀다.
“아악~ 엄마야~ 아저씨 나 좀 살려주세요.”
하지만 모닥불가에 모여 있던 그 누구도 혼이 빠질 듯 놀란 나
를 제외하고는 재미있어 웃고 있을 뿐 구해줄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야! 임마 빨리 해 버려! 빨리 박아. 한 번 더 해!"
카메라 후레쉬가 터지고 일생중 일그러진 추억 속에 사진은 그렇
게 탄생 되었다.
괘씸한 생각을 했었지만 이상하게도 여기 모인 14명의 친구들이
약속이나 한 듯 나만을 위한 자리를 만들어 가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초면에 무어라 할 수도 없었고, 그 저 이런 곳에 오면 이
렇게 하 것인가 보다 하고 어색하게 웃어넘기고는 있었지만 그 순
간만큼은 또래의 젊은 그들과 나는 정말 행복해 했었다.
밤 10시가 되어 환송식이 끝나자 동네 이장님은 마을 앞 갯
벌에서 그 날 만큼은 내일 돌아 갈 때 가져 갈 만큼의 바지락조개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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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도 좋다는 특별한 말씀에 너 나 할 것 없이 환성을 지르며 가벼
운 옷차림에 후레쉬와 호미, 비닐봉지를 하나씩 꿰어 차고 해변
으로 달려 나갔다.
동네주민 한 분이 조개 잡이에 정신이 팔리면 밀물이 드는지도 몰
라 사고를 당한다며 함께 갯벌까지 와서 조개 잡는 방법까지 알려
주었다. 우선 후레쉬를 비추면 조개 숨구멍이 보이고 호미로 깊이
한 번을 떠내고 뻘에 구멍이 난 곳에 손가락을 넣어 보면 딱딱한
조개의 껍질이 손끝에 닫게 된다고 했다. 그러면 그냥 잡아 비닐
봉지에 넣으면 그만이라고 했다.
일행들은 썰물이 쓸고 간 드넓은 뻘밭으로 조개를 찾아 어둠 속
에 점차 혼자들이 되어 갔다.
밀려나는 파도소리와 호미질소리 밖에 없는 밤 바닷가의 호젓함,
그곳에서 조개잡이에 온 정신이 팔려 시간이 얼마나 가는 줄도
모르고 오직 점점 익숙해져가는 조개사냥과 가끔씩 허리를 펴며
수평선과 맞닿은 별들의 잔치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무리지은 많은 별들을 한꺼번에 보았던 기억이 없었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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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수평선 위에 붉은색 야자수를 그리고 그 위에 노랗고 하얀
별들이 찍혔다. 잘은 모르지만 별자리를 찾아 은하수의 속으로
빨려가 별과 별을 이어가며 전갈자리, 사자자리를 찾아다녔다.
"아그~하~ㄱ 아이~ㅇ 허~억 캭~"
깜짝 놀라 돌아 본 등 뒤에는 붉은빛이 가득한 얼굴에 뻘 흙을
뒤집어쓰고, 혀를 길게 뺀 귀신이 금새라도 덥칠 듯이 나를 향
해 괴기한 소리를 지르며 잡아먹을 듯 달려들었다.
"엄마야~ 아~ㄱ 아~ㄱ"
엉겁결에 뻘 바닥에 주저앉아 비명을 지르며 어찌나 놀랐던지 잡
았던 조개를 몽땅 귀신에게 내던지고는 도망치듯 먼 바다를 향해
달아나며 바보처럼 울음을 터뜨렸다.
한참만에야 놀래게 했던 달빛 어둠 속의 귀신이 곽방근이었던 사
실을 알고 되었고, 그 때까지도 친구들과 쪼그리고 앉아서 배꼽을
잡고 웃고 있는 그에게 능청을 떨며 다다가 보란 듯이 등 뒤를 떠
밀어 버리자 그는 개구리가 사지를 뻗듯 뻘 바닥에 얼굴을 처박으
며 비명을 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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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까지 귀신장난을 하느라 양말을 머리에 쓴 그의 얼굴이 진득
한 시커먼 뻘로 범벅이 된 채 뭐라고 내뱉는 입에서는 말 대신 뻘
이 뛰어 나왔다. 우스워서 도저히 못 참겠다는 사람마냥 그는 친구
들과 아예 뻘 탕에 뒹굴며 웃다가 예고 없이 나를 향해 달려와서는
온 몸에 뻘 칠을 하기 시작했고 나는 그를 피해 비명을 지르며 다
시 도망을 쳐야했다.
둥근달이 떠오르며 거칠 것 없는 해변에서 그렇게 조개잡이가 끝나
갈 무렵 우리는 모래사장으로 돌아와 편을 갈라 기마전을 하게 되면
서 말은 당연히 사내들의 차지였고 기수는 여자들의 몫이 되었다.
"야! 이 자식아 내가 말을 한다니까?"
"넌 안돼. 임마! 하체가 좋은 내가 해야 해."
처음부터 심판으로 민우를 몰아낸 오늘 만난 친구들이 서로 말이
되겠다고 싸움질을 하고 있었지만 좀처럼 결론이 나질 않자 내게
선택권이 주어졌다.
"마님! 어떤 말을 타시겠나이까?"
착해만 보이는 성연동에게 손가락을 가르켰다.
"으~허허허 자식들! 아무나 말을 하는 줄 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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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해서 성연동이 말이 되고 좌측은 김경백, 우측은 이용정이
성연동의 어깨에 손을 얹고 팔뚝과 어깨로 말안장이 되어 엉덩이를
받쳐 주었고 곽방근은 기수인 나의 엉덩이를 뒤에서 밀어 주는 역할
을 맡았다.
"으~히히히 오늘은 평생 못 잊을 밤이여. 왠 냄새가 이렇게 좋지?
꿈이 아니라면 밤 새워 이러고 있고 싶다."
오늘 만난 친구들의 야지를 받으며 처음에는 조금 쑥스러웠지만
이내 기분이 하늘을 찌를 듯 상승되어 적진을 향했다.
"기선을 제압해야 한다! 돌~격!"
"아~ㄱ 아아~ㄲ 이야호~"
상대 기수는 나와 동갑이었지만 키는 160cm가 못 되는 외소한
여학생으로 우리 전차의 화이팅에 사기가 꺽인 듯 잠깐의 접전으
로 손 쉽게 승리를 할 수 있었다. 우리들은 신들린 듯 소리를 지
르며 서로를 끌어안고 한 몸이 되어 날 뛰었다.
우리 전차에서 상대 전차를 향해 외쳤다.
"한 번 더! 한 번 더! 한 번 더!"
그러나 민우의 시작 소리와 함께 적진으로 향하던 우리 전차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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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흥분한 나머지 적에게 도달도 못하고 말들의 다리가 뒤엉켜
넘어지면서 중도에 나뒹굴었다.
얼굴과 머리카락, 온몸에 여지없이 모래로 범벅이 되어 누구랄 것
없이 배꼽을 잡고 깔깔대고 있었지만 응큼스럽게도 네사람 모두
자신의 신체 어딘가 한 부분을 내게 꼭 접촉시키고 있는 것을 한참
지나서야 나는 느낄 수 있었다.
앞으로 넘어지는 통에 성연동은 종아리 사이에 머리를 박은 채 양
손으로 나의 허벅지를 잡고 있었고, 이용정은 오른쪽 허벅지를 가
늘게 떨리는 손으로 껴안고 있었다. 김경백은 언제 잡았는지 왼쪽
팔을 두 팔로 껴안고 있었고, 곽방근은 한쪽 엉덩이에 비스듬이 뺨
을 대고 있었다.
“에잇 지금 뭐하는 거야.”
그들에게 벗어나 모래를 그들에게 사정없이 퍼부으며 남아 있는
웃음을 깊은 해변의 밤하늘에 쏟아냈다.
봉지에 잡아 온 조개로 조개탕을 끓이는 모닥불 주변에는
한여름이었지만 바닷가 밤이슬과 펌프로 뿜어 올린 찬 지하수로
샤워를 마치고 한기에 잔뜩 움츠리고 있는 우리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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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를 몹시도 기다렸다는 듯 곽방근이 선두가 되어 배낭 속에서
신문지로 싼 병들을 꺼내 놓자 약속이나 한 듯 친구들이 주섬주섬
술병들을 꺼내 놓기 시작 했다.
이용정의 소주 2병을 꺼내놓으며 보인 흡족한 미소를 시작으로
금새 소주 6병과 맥주 2병, 막걸리 몇 통이 모닥불가에 모여졌고
모닥불가에는 함께 온 5명의 남학생과 먼저 와있던 4의 남학생
그리고 여자로써는 홍일점으로 내가 앉아 있었다.
쏟아 부을 듯한 하늘에 별들과 들 물로 기세 좋게 밀려오는 파도
소리 그리고 풀벌레 소리에 장단 맞춘 모닥불 튀는 소리를 들으
며 갓 잡아 끓인 조개탕으로 한기를 쫓으려 했지만 모래가 지금
거려 숫가락으로 휘휘 저으며 뽀얀 국물을 떠 마시던 여름밤은
그렇게 깊어만 갔다.
인사치례로 받아든 맥주 몇 잔 외에 그 많은 술들이 젊은 사내들
을 못 당하고 바닥을 보이기 시작했고 기타 반주가 흐르는 어둠
속에서 젊은이들은 목청껏 함께 노래를 불렀다.
그 중에서도 양희은이 부른 “이루어 질수 없는 사랑”이라는 노래
를 부를 때 맥주 몇 잔의 취기가 오른 탓인지 분위기에 취한 탓인
지 까닭모를 눈물을 울컥 쏟을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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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우가 조용히 다가와 맥주 한 잔을 가득 따르고는 어깨에 겉옷을
걸쳐주었다. 능글스러운 면이 있지만 강한 리더쉽과 인정 많은 남
자..... 노빈은 민우와 비슷한 면이 많은 친구였지만 내성적인 성격
에 자신을 너무 절제하다가 어느 순간 폭발해 버리는 성격이라면,
민우는 진실성이 결여 되 보이고 바람둥이 같이 가벼워 보이면서도
쉽게 대 할 수 없는 남자다운 면모가 있었다.
어쩌면 제부도에서의 추억은 민우가 사전에 나를 위해 각본으로
진행하고 있는 연극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사실에 관계
없이 그 순간만이라도 행복하다고 느낄 수 있어 얼마나 다행인지
몰랐다.
친구들이 잠자리를 찾아 나설 즈음 모닥불도 꺼져가고 있었다.
"텐트 한 번 구경해도 되요?"
그들이 쳐 놓은 군용 텐트 안에는 스리핑 백이라는 것이 들어 있었
고 야영을 위한 살림살이로 가득 차 있었다.
"누워 봐도 되요?"
"물론이지요."
스리핑 백 속에 들어가 지퍼를 잠그자 밖으로는 얼굴만 빼곰히
나오고 온 몸을 그 속에 숨길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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짓궂은 곽방근이 퀴퀴한 냄새가 풍길 것만 같은 입술을 앞세우고
장난스럽게 소리를 지르며 나를 향해 돌진하려 하자 다른 친구들
도 저마다 입술을 내밀며 내게 달려드는 듯 했다.
물론 나는 비명을 지르며 그들을 피해 스리핑 백 속으로 숨어 버
렸지만 그들의 장난스러움에 놀란 가슴과 분한 마음에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짓궂은 그들의 전송을 받으며 모닥불가로 돌아온 나는 낮잠을 자
두어서였던지 잠이 오질 않았다. 그냥 혼자라는 것이 자유롭다는
생각도 들었고, 집에 있는 아빠, 엄마, 동생들의 생각과 1년 반 동
안 내가 살아왔던 시간을 밤하늘 가득한 별무리와 다시 타오르기
시작한 모닥불 곁에서 생각해 볼 수 있는 시간이 있어 너무 좋았다.
“엄마는 괜찮으실꺼야. 아빠와 동생들도 잘 이겨내고 있잖아?
정작 문제는 항상 볼 부은 사람으로 살아가는 내가 문제인 게지.“
가족들 누구 하나에게 화를 낼 처지가 아닌 것도 내가 힘들어 하
는 부분이었다.
모닥불가에는 민우와 나만이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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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친구들과의 술이 과했던지 아니면 새벽이 가까운 시간에
피로를 참지 못했던지 모포를 귀까지 감싸고 두 눈만 내 놓은 채
깊은 잠에 빠져 있는 듯 했다.
“민우야 자는 거니?”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자신의 츄리닝을 벗어 내게 입혀주고 꺼져
가는 모닥불에 나무를 올리며 둘도 없는 머슴처럼 곰살맞게 굴
더니만, 두 무릎을 깍지 낀 양팔위에 고개를 묻고 있던 나와
마주 앉은 지 십분도 채 안되어 고개를 끄덕이더니 끝내 모로
쓰러져 잠에 빠져 버렸다.
섬에는 다 그런지 짙고 습한 안개가 순식간에 주변을 감쌌다.
모닥불이 아니면 무서워 잠시도 숨을 쉴 수 없을 것 같은 적막
함에 곁에서 잠을 자며 지켜주는 민우의 고른 숨소리, 마주한
텐트에서 그 날 만난 친구들의 낮은 숨소리만 들렸다.
“노빈이 이 자리에 함께 있으면 좋았을텐데......”
노빈에게 당한 진한 키스로 결국 병원까지 갔어야 했던 사건이
생각났다.
“아가씨 무엇엔가 심하게 빨렸구만.” 하며 무심하게 말씀하시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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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 선생님에게 홍당무가 된 얼굴을 들 수가 없었던 일을 생각
나서 웃음이 났다.
“은영아 내게 사랑한다고 말해 줄 수 있겠니?”
버드나무가 늘어진 낡은 벤취에서 침묵하던 노빈이 했던 말이다.
“무엇이든 네가 원하는 것은 다해줄 수 있어.”라고 말하고 싶었
지만 볼 부은 나는 그를 외면하며 침묵했었다.
모닥불이 구름을 사르고 아무도 존재치 않는 둘만의 공간에서
서로를 가르는 얕은 불빛에 부끄러움을 숨기며 사랑 고백을 받
았으면 멋졌을 것 같은데, 그의 사랑고백은 예상치 못한 사고와
같이 내게 다가 왔고, 아무런 준비가 없는 상태에서 마치 한 순
간 꿈 같이 스쳐지나가 버렸다.
그는 흐트러진 옷을 만져주며 나를 일으켜 세우고 다시는 보지
못할 사람인양 으스러지게 끌어안고는 이렇게 말했다.
“은영아 난 너를 정말 사랑해. 앞으로 너 외에는 결코 사랑하지
않을 거야.“
아무 의미 없는 그 말이 진짜처럼 들리기도 했다가 그냥 나를
달래기 위한 얕은 수법 같기도 했지만 분명한 것은 나도 모르게
그를 깊게 사랑하고 있었다는 것을 느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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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 오랜 시간은 아니었지만 나는 그가 원하는 사람이 되기로
했다. 마음속으로 그만을 사랑하고 그 외에는 누구도 사랑하지
않기로 다짐을 하며 그가 원하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생각했
다.
새벽으로 가는 시간을 아쉬워하며 꼬박 밤을 새우다가 안
개 속에 밝아오는 이른 아침을 맞았다. 하루 밤 동안에 나는 1년
반의 짧지 않은 세월을 정리하면서 나의 모습을 작게 혹은 크게
만들어 가며 아침이 되어 갈수록 의젓해진 자신을 느낄 수 있었다.
이슬에 젖은 담요를 벗어버리고 모닥불에 마른 솔가지를 더 얹자
밤 새 가늘게 타오르던 불꽃은 생기를 찾으며 짙은 안개를 몰아
내면서 밝은 불빛에 선잠이 깬 민우가 기지개를 폈다.
"잘 잤니? 왜 좀 더 자지 않고?"
"집을 떠나선지 잠이 오질 않아. 그만 자고 나랑 놀자."
귀를 몇 차례 당긴 후에야 두 눈을 굳세게 감고 우거지 상을 쓰는
민우를 잠 밖으로 끌어낼 수 있었다.
“그만 좀 해라. 지금 새벽 4시반이다. 잠 좀 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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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님한테 말버릇 좀 봐라? 사실은 나 화장실 가고 싶단 말야.”
“그냥 저 텐트 뒤에 가서 적당히 해결하면 되지 꼭 내가 화장실
까지 해결 해줘야 하냐?“
“어쭈 너 정말 마님한테 이러기냐?”
볼 부은 그와 함께 후레쉬를 들고 화장실을 갔다.
“귀 막고 10m 떨어져서 천정에다 후레쉬 비춰.”
사실 무섭고 낯설어 함께 오긴 했지만 소변 볼 때 소음을 생각하
면 그와 그런 곳에 함께 있을 수 없었지만 거미줄이 엉킨 어두운
화장실의 두려움을 피해 갈수 없었다.
"오늘은 돌아가는 날이니 한 아홉시까지는 잘 꺼야. 심심하면 나
하고 바닷가 산책이나 할까? “
화장실을 다녀오면서 민우가 말했다.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황량한 바닷가를 민우와 둘이 걸었다.
매력은 있었지만 언제나 장난 같이 내 곁에 있는 이 사람...바닷
물이 들면서 모래가 쌓여 있는 곳까지 파도가 오르는 아침나절
얕은 바닷가에는 기러기가 날았다.
두꺼운 옷이 없던 나는 새벽 바닷바람에 오돌오돌 떨기 시작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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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민우가 입혀 주는 파카로 몸을 감싸며 그가 노빈이었으면 좋
겠다는 생각을 했다.
"은영아!"
"응"
"우리 뜻이어 가기 하자."
"너부터 해 봐."
"사랑이란 받는 것이 아니고 주는 것이다."
"음~ 사랑중에 가장 아름다운 것은 짝사랑이다."
"사랑에는 정신적 육체적 사랑이 있다."
"사랑은 자신도 모르게 찾아왔다가 상처만 남기고 간다."
"사랑은 상대가 있는 것이다."
"사랑은 내 마음과 같은 것이다."
날이 밝아오는 6시쯤 확성기를 통해 이장님의 방송 시작되었다.
"제부도 주민 여러분 잘 주무셨습니까? 간밤에 서울 외국어대
학생 봉사팀의 환송행사에 참석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오늘은
바지락 공동 생산이 있는 날로써........."
"은영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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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우리 처음 만났던 곳 기억나니?"
"신설동 천둥과 번개?"
"그래. 그 곳에서 너와 나는 운명남 운명녀로 정해졌던 일도 기억
나니?"
"웃기는 애들이야. 자기들 마음대로라니까!"
"너희 집을 드나들면서 노빈이와 너, 우리 셋이 친구로 지낸다는
것이 힘들다는 것을 알았어. 물론 노빈이가 군에 간 사이에 네게
이런 말을 한다는 것이 남자답지 못하다고 느껴지지만 너를 좋아
하는 내 마음을 멈출 수가 없었어.
한동안 의식적으로 너와 노빈이를 피하며 마음을 정리 하려고
많이 노력해봤지만 그럴수록 너는 내게 어떤 의미로든 다가왔고
이젠 더 이상 너를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어.“
바다를 함께 바라보며 앉았던 민우가 쑥스러운 듯 일어나 밀려오
는 파도를 향해 돌을 던지며 시선을 피했다.
"왜 그런 말을 하는 거야? 난 너나 노빈이 모두 친구 이상으로 생
각해 본적이 없어. 잘 아는 일 아니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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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영아! 단정 짓지마. 나도 내 감정이 이렇게 까지 복잡해 질 줄
몰랐어. 하지만 지금 순간 제일 중요한 것은 내가 너에게 정식
으로 사랑하고 싶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점이야."
전혀 예상 밖의 고백을 들으며 금방이라도 달려들 것만 같은 민
우의 이글거리는 눈길을 피하면서 둘만이 있는 이른 아침의 바닷
가에서 행여 노빈 같이 그도 달려들면 어쩌나 싶은 생각에 빨리
이 순간을 피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 교회로 돌아갈래."
그의 옷을 조용히 벗어 곱게 접어 모래위에 놓고는 함께 걸어왔던
송림을 향해 걸었지만 그는 나를 붙잡지 않았다.
"난 이미 노빈에게 모든 것을 허락한 사이인데, 여자가 몸과 마음
을 허락한다는 의미가 이런 것일까? "
"성민우!"
나는 한 번도 그를 연인으로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는 언제나
장난처럼 좋아한다고 고백했고 내게 어떤 의미 있는 눈길이나 관
심을 주지 않으려고 노력 했던 사람이다.
"고요하고 쓸쓸한 아침 바다 분위기 탓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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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에서는 아침을 준비하는 부산한 움직임이 있었지만 텐
트 주변에서는 낮은 코고는 소리가 깔려 있었다. 장난끼가 발동한
나는 하루 동안 친해져 버린 그 들의 텐트 문을 열어 머리를 디밀
고는 큰소리를 질렀다.
"돌쇠야! 아직도 자냐?"
그리고는 과감하게 그들이 감고 자는 담요를 잡아당겼다.
곽방근과 김경백이 펜티 차림으로 잠을 자다가 기겁을 하고 담요
를 내 손에서 빼앗아 몸을 감싸고는 술이 덜 깬 쾡한 눈으로 겁
에 질려 나를 바라보았다.
"아니 마님보다 늦게 깨는 돌쇠가 어디 있어요? 그리고 충성주
에 동정주까지 마시게 해 놓고 이렇게 아침을 굶길 꺼에요?"
내친 김에 옆 텐트로 가서 이용정과 성연동의 담요와 스리핑 백
을 열어 제꼈다.
"돌쇠야! 일어~~~ 아이고 엄마!"
그대로 숙소로 도망질을 해 버렸다. 스리핑 백 속에 이용정이 노
펜티 차림에서 급히 손으로 중요 부분을 가리며 나와 눈이 마주
쳐 버렸기 때문으로 한참이 지나 아침식사를 하면서도 나는
그를 향해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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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다 봐 버렸으니까 책임지세유! 난 몰러~"
이용정의 능글스러운 이 말의 의미는 나, 이용정, 성연동 세 사람
만 아는 비밀이었지만 웃음을 참지 못한 성연동의 발설로 봉사대
전원이 배꼽을 빼고 웃어 버렸고 그 후로 이용정은 영감에서 노펜
티로 별명이 바뀌어 버렸다.
해가 올라오고 10시반경이 되자 몇 시간 후면 돌아 갈 서울길을
생각하며 모두 바다에 뛰어 들기로 하면서, 나는 준비해 간 수영
복이 없어 핫펜티 청바지에 긴팔 면셔츠를 입었다.
바람을 불어 넣은 비치공으로 피구를 하며 비키니 수영복의 다른
여학생들도 있었지만 굳이 남정네들은 다른 여학생들보다 10cm
정도나 더 크던 나를 대상으로 일부러 공을 맞춰 죽이지도 않고,
이리 펄쩍 저리 펄쩍 뛰도록 공을 빗 맞추었고 그 때마다 나는
숨겼던 하얀 이를 들어 내놓고 숨이 넘어 갈 듯 깔깔 웃다가 주저
앉기를 반복하며 짜릿한 쾌감으로 연신 비명을 질렀다.
게임이 끝나 갈 무렵 다섯 명의 돌쇠들이 약속이나 한 듯 숨 넘어
가는 비명을 지르는 나의 사지를 붙들어 머리 위로 올리고는 허리
춤 깊이까지 바다로 들어가서 파도를 향해 냅다 던져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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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를 처음 만나는 행사치고는 너무 고약해서 물에 빠지는 순간
너무 놀라 콧구멍으로 무자비하게 들어오는 짠물을 허우적거리며
실컷 들이마셔야 했다.
물에 젖은 셔츠는 가슴의 작은 돌기까지 들어내고 있었고 두 손
이 얼굴을 쓸어내리기에도 바쁜 나에게 그들 중 몇몇이 짓궂게
얼굴에 물을 끼얹으며 아주 기분이 좋은 듯 웃었다.
장난인줄은 알았지만 매운 듯한 바닷물에 헛구역질을 하며 처음
에는 엉겁결에 비명을 지르고 시간이 지나면서 장난처럼 웃다가
급기야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민우가 달려와 나를 감싸 안으면서 체면도 없이 놀란 가슴을 민
우에게 기대어 안겨서 서글피 울었던 것 같다.
결국 야속한 그들을 원망하며 울면서 숙소로 돌아와 샤워를 마
치고 나서, 생각 할수록 약이 올라 복수에 이를 갈았지만 함께
웃자고 한 일을 가지고 계속 화를 낼 수도 없었다.
하지만 어떻게든 그들을 골탕 먹여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토라진 내 눈길을 피하며 힐금힐금 눈치를 보던 그들이 점심이 준비
된 교회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눈여겨보며 여학생들의 도움을 받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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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란한 틈을 타서 그들의 벗어놓은 신발 한 짝씩을 추려 나 혼자만
알만한 장소에 꽁꽁 숨겨놓았다.
늦은 점심을 라면으로 간단히 때우면서 그들은 나의 흐믓하고 고소한
의미 있는 미소를 전혀 눈치 못했다. 바보들 마냥 내 미소가 자신에게
관심이 있어 보내는 메시지로 느낀 것인지 그저 좋아 자기들 끼리 웃
고 장난치느라 정신이 없었다.
"어~어 신발 어디 갔냐?"
"야 임마! 니 신발을 왜 나 한테 물어?“
우리는 물때에 맞춰 뭍으로 나갈 준비를 했다.
봉사대를 보내고 3일간 더 머물겠다던 민우 친구들이 점심을 먹고
나서 갑자기 함께 서울에 가겠노라 기를 쓰고 텐트를 걷으며 부산을
떨었다.
마을 주민들의 환송 속에 뭍으로 향하는 바닷길로 접어드는 14명의
일행 중 5명은 영락없이 한 쪽 신발이 없는 부자연스러움으로 일행
을 따랐다.
나에 대한 심증은 있었지만 물증이 없는 상태이고 더우기 나를 울
리기까지 한 장본인들이라 그저 처분만 바라는 눈치였지만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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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에게 동정의 눈길 한 번 주질 않았다.
바닷길을 15분쯤 걸었을까(?) 섬에서 출발한 오토바이편에 목사
님은 약속한 대로 신발을 실려 보내 주었다.
"하나님이 그대들에게 내리는 신발이요."
그들은 동시에 검지손가락을 나에게 향하고 무슨 말인가를 하려
다가 싸늘한 미소의 나를 보고는 "에이 가자. 야~야~야 빨리 가자."
하며 길을 재촉했다.
용산 시외버스터미널에서 민우가 바닷길에서 친구들에게서 걷었
던 돈으로 막걸리를 사는 것으로 해단식을 가졌다.
민우가 데려다 주겠다고 했지만 지하철을 타면 된다고 하고 용산
역에서 지하철을 기다리며 싫지 않게 나를 울렸던 그들이 정겹게
느껴졌다.
신설동에서 내렸다. 내가 어릴 적부터 엄마 손을 잡고 걸었던 낯익
은 거리였다. 하루 하고 반나절의 외출이었지만 나를 감쌌던 소외
감, 허망함, 부러움, 욕정등 그 모든 것에서 조금은 자유로워지는
것을 느꼈다.
"아빠! 엄마! 다녀 왔어요. 얘들아! 언니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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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힘이 솟는 것을 느끼며 민우에게 고맙다는 생각을 했다.
그 날부터 달라 진 일이 생겼다.
첫째 한 달에 한 번의 일요일은 자유시간으로 갖기.
둘째 노빈이 떠난 빈 자리에 4명의 돌쇠가 더 생겨났다는 것.
셋째 이 친구들이 떼를 지어 우리 집으로 쳐들어 와서는 제 집
인양 아무 때나 고기를 구워 먹으며 놀다 간다는 점이었다.
폐쇄된 공간에서의 개방은 우리 집에 조금은 숨통을 터 주었고
집안 분위기도 밝아지면서 동생들의 입가에 웃음이 피어나니 굳
이 싫다고만 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되었는데 아빠도 엄마도 그런
것을 감안해 과하지 않는 범위에서 그 친구들의 집안 출입을 허
락 하셨다.
나로써도 한 달에 한 번이지만 기분을 전환 할 수 있는 기회가
되면서 웃음을 되찾을 수 있었고, 나의 운명에 대하여 수직벽 대
하는 가혹한 절망감이라는 사고에서, 내 자신이 살아 숨쉬는 삶
의 의미를 주변의 상황과 조건에서 긍정적으로 희망적으로 생각
하고자 하는 반전의 변화가 생겨났다.
"그래 어차피 가야 할 길이고 나 하나만의 문제라면 부모님과 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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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들을 위해 산다고 하자꾸나. 평생 봉사하는 성직자들도 있는
데 대학 그것은 기회가 되서 가면 되는 것이고, 결혼 까짓 것
안 하면 어때?"
마음이 안정감을 찾으며 동생들과 엄마에 대한 따뜻한 마음을 다
질 수 있었고 ,동생들에게는 인자한 언니엄마가 되어 가면서 긍
정적 생각은 소외된 집에서의 생활을 즐겁게 느껴지게 했다.
"나 아니면 누가 엄마를 간호하고 동생들을 보살펴 주지?"
다행인지 불행인지 학교가 가까운 점도 있었지만 새내기 돌쇠들
이 둘 셋씩 짝을 지어 우리 집을 방문해 주면 동생들은 그들을
좋아라 반겼고 그들과 장보기를 나서면 돌쇠들이 앞뒤를 따르며
나만을 위해주는 그 친구들 덕에 그나마 작은 행복을 느끼면서
살던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민우는 가끔 우리 집을 찾고 있었지만 제부도에서 받은 마음의
상처가 남아 있었는지, 성품 자체가 구속받기 싫어해서 인지,
남에게 자신의 감정 표현이 인색 하던 그와 새 친구들이 중간
고사를 끝내고 앞마당에 단풍이 들기 시작한 토요일 오후,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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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 햇살이 남아 있는 앞마당에서 모처럼 아빠를 비롯한 우리
7남매와 함께 모여 삼겹살을 구웠다. 12명의 식구이다 보니
장소가 좁았고 숯불을 2개나 피웠지만 돌쇠들은 어린 동생들
을 껴안고 자리에 앉아 시중을 들어야 하는 불편을 감수해야
했다.
"자 한 잔씩 따라라! 으~ㅁ 은영이도 한 잔 받고....."
곁에 있던 김경백이 잽싸게 술잔을 주고는 거품이 반은 되도
록 맥주를 따라 주었다.
"그렇지 은희도 고3이니 어른으로 쳐야지. 이름이 뭐라고 했지?"
"예. 저는 성연동이라고 합니다."
"그래 성군 우리 셋째에게도 술을 한 잔 권하게."
"각자의 행복을 바라면서 건배!"
아들이 8남매중 막내 밖에 없으신 아빠는 그들이 오는 날이면
언제나 기분이 좋아 보이셨다.
그들이 가방을 하나씩 옆에 꿰어 차고 "아버님! 안녕하셨어요?"
하고 우리 집으로 들어서면 집안은 젊은 사내들로 가득 채워 듯
했고, 어린 여자아이들 목소리가 판치던 공간은 우렁찬 사내들
의 목소리로 가득했는데 아빠는 그것을 무척이나 즐거워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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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님 술 한 잔 받으시지요!"
이용정을 시작으로 해서 곽방근, 김경백, 성연동, 성민우까지 5잔
이 연거퍼 아빠께 집중되고 오랜만에 크게 웃으시던 아빠는 이 친
구들 때문에 언제나 대취 하셔서 중간에 자리를 뜨셔야 했다.
"야! 이놈들아! 여자만 있는 집이라고 허튼 짓 말고 즐겁게 들 놀
다 가거라." 하시면 다섯 사내가 일어나며 "예! 아버님 편히 주
무십시오."라고 힘차게 외쳤고, 아빠는 뒤도 안 보시고 안방으로
향하시며 손만 흔들어 보이셨다.
10월의 해넘이를 맞이하며 동생들은 젊음 그 자체만으로도 유쾌
했던지 끝을 내자는 언니엄마의 말을 따라 주지 않았다. 어둠이
시작되고 오싹한 가을의 기운을 느끼고 서야 자리를 정리하는데
이용정이 씩씩하게 나서며 앞치마를 하고는 설거지를 자청했다.
"한가지만 물어 볼께. 은영씨! 나 괜찮지? 나랑 애인하면 이런
거 내가 매일 할께."
옆에서 석쇠를 털던 곽방근이 이용정의 머리를 석쇠로 내리치면
내 뱉었다.
"야! 이 자식아. 넌 놀러 가면 맨 날 손가락 하나 까닥 안 턴 놈이
입술에 침이나 바르고 거짓말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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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자식이 니가 봤냐? 봤어?"
설거지 중이던 거품이 잔뜩 일은 스폰지를 곽방근의 얼굴로 집
어 던졌다. 석쇠에 맞은 이용정이 머리를 손으로 쓸어내리면서
검뎅이가 얼굴 위에 시커멓게 줄지어 묻혀졌고, 곽방근은 비누
거품이 머리 위에 상투 마냥 솟아 있는 모습들을 보며 서로 상
대를 손가락질 해 가며 낄낄대는 그들을 보며 옆에 있는 사람
들이 더 신이 나서 배꼽을 잡고 웃었다.
커피를 한잔씩 마시며 밤공기에 몸을 맡겼다.
"은영아 너 다음주 쉬는 날 아니니?" 민우가 물었다.
"은희가 고3인데 집안일 하라고 할 수 없잖아!"
"그래? 괜찮으면 함께 가까운 산이나 바다로 캠핑이라도 가려
했는데."
곽방근이 난데없이 튀어나왔다.
"캠핑! 기가 막힌 곳을 내가 소개해 줄께. 강원도 마석에 가면
천마산이 있는데 정코스 말고 평내쪽으로 돌아가는 길이 있거든.
계곡을 타고 산을 조금 오르면 작은 식수댐도 있고 텐트를 칠만
한 공간도 충분하더라. 물론 나도 함께 가야겠지?"
"야! 우리 여름에 갔던 제부도 어때? 조개도 캐고 밤중에 해변도
걷고 모닥불을 놓아 가을의 별빛을 불사르며 으~~ 쥑일것 같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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않니?" 김경백이 그 큰 눈을 껌벅이며 바다로 가자고 했다.
"언니! 산이든 바다든 아빠한테 허락 받고 하루 다녀와~ 집안 일
은 내가 하루 있으면 되지." 은희가 거들었다.
"언니는 고3이잖아! 넷째도 내년이면 고2에요. 언니들 마음 푹
놓고 조은경에게 맡겨 주세요. 은희언니는 둘째언니가 갈 수
있도록 아빠한테 허락만 받아 주면 돼."
"여기 모인 인간들은 다 가는 거지? 그런 거냐?"
이용정이 물었다.
"조은영, 곽방근, 김경백, 성연동, 성민우 그리고 나 이용정. 그
런데 말이다. 다른 친구들은 함께 가면 안되니?"
"그거야 능력껏 하면 되는 일이고 텐트만 더 준비 하면 되는 것
아니니?" 김경백이 답했다.
"자 자 그럼 마님을 모시고 가을의 정기를 마시러 출발하는 캠핑
에서 모든 것을 알아서 준비할 위원장으로 성민우를 추대합시
다."
자기들끼리 일사천리로 결정을 내리고 나는 꼼짝없이 다음주
토요일과 일요일 그들과 함께 캠핑을 떠나야 하는 것으로 결정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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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꺼운 안경을 고쳐 쓰며 성연동이 나섰다.
"야~야 그만들 뭉개고 아직 7시 밖에 안되었으니 미성년자들에
게는 미안하지만 우리 나이트에 가서 오랜만에 몸이나 좀 풀자."
갑자기 이용정의 눈에 생기가 돌며
"호~오 나이트에 가자 이거지? 물론 네가 쏘는 것이고?"
지난 학기 장학금을 받은 성연동은 기회를 보아 한 번 쏘아야 하
는 입장이었는데 다들 모이기가 쉽지 않으니 나이트로 지금 가
버리자고 했다.
나보다 더 들뜬 동생들의 성화에 옷을 갈아입고 방문을 나서자
친구들이 "응~야~" 탄성을 지르며 나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동생들의 부러움 속에 우리들은 청량리에 있는 부림호텔 나이트
클럽으로 직행했다.
수아와 함께 몇 번 찾았던 나이트였지만 근 2년 동안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익숙치 않았던 곳에서 고고음악과 어두운 조명, 맥
주 몇 잔이 오가면서 가만히 있어도 머리가 흔들리고 나도 모르
게 흥얼거리며 스테이지에서 뼈 없는 물건 마냥 흐느적거리는
인간들의 춤사위에 시선을 빼앗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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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영씨! 우리 모두 함께 나가서 춤추자."
이용정이 나서서 나와 친구들을 스테이지로 끌고 갔고 잠시 자리
를 비웠던 김경백이 한 무리의 여자들을 데리고 나타나 테이블을
늘리는 것이 보였다.
김경백을 제외한 네 명의 친구들이 나를 가운데 두고 신나게 흔들
기 시작하면서 조명과 함께 부끄러움이 웃음으로 바뀔 즈음 몸이
후끈 달아오르며 그 날 만큼은 정말 신나게 흔들고 싶다는 생각에
낯설지 않은 그들과 신나는 시간을 보냈다.
한 차례의 고고 타임이 지나고 부루스 곡이 흐르면서 테이블로
돌아온 나는 김경백으로부터 친구들을 소개 받았다.
"이 쪽은 내 여친(여자친구) 주혜리씨, 그 옆은 이용정의 여친 민
인순씨, 그 옆은 성연동의 여친 서혜정씨, 마지막으로 곽 방근의
여친 구현옥씨. 이 쪽은 남친들이 다 이야기해서 알겠지만 우리
들의 영원한 마님 조은영씨입니다. 인사들 하세요."
가볍게 목례를 하면서 민우의 여친이 궁금했다.
"민우씨의 여친은 어디 계신가요?"
"아예 벌써 왔다고 하던데....얘들아! 너희들 그 친구 못 보았니?"
구현옥이 나섰다.
"민우씨! 경백씨가 오늘은 민우씨 여친를 소개시켜 준다고 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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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말 않고 쫓아왔는데 설마 오늘 거짓말을 한 것은 아니죠?"
이용정이 분위기를 잡으며
"자~자자 오늘 온다고 했으니 오겠지요. 우리 짝 있는 사람은 다
들 나가서 한 번 신나게 흔들어 봅시다."
모두들 짝을 맞춰 스테이지로 향하고 어둠과 사이키 조명, 시끄
러운 스피커 소리와 함께 그들은 곧 사람들 속에 섞여 버렸다.
"은영아! 한 잔 하자."
옆에 앉아 큰소리로 민우가 건배를 제의 했다.
"여친 어디 있어? 온다고 했다며? 물론 장난 아니게 멋지게
생겼겠지? 진짜 보고 싶다."
"온다고 했으니까 곧 올 꺼야."
술이라고는 취 할 정도로 마셔 본 적이 없었지만 스테이지를 바라
보며 그가 권하는 대로 맥주를 들이켰다.
"민우야! 우리 춤 한 번 출래?"
멋쩍어 하는 그의 손을 잡아끌고 스테이지로 나가 처음으로 둘만
의 어설프고 낯 설은 춤을 추었다. 부르스로 음악이 바뀌면서 그와
할 줄도 모르는 부르스를 추기 위해 기다렸다는 듯 그의 어깨 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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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손을 얹으며 밝게 웃었다. 잠시 멈칫거리던 그는 오른 손으로
내 허리를 조심스럽게 감싸 안으며 웃고 있는 나에 반하여 굳어 버
린 얼굴로 무엇인가를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깊고 검은 낯 선 그
의 눈을 보며 민우의 눈이 그렇게 생겼는지 처음 자세히 보았던 것
같다.
"나도 모르겠어. 왜 이렇게 허전한 느낌일까?"
노빈이 떠나고 난 자리는 언제나 허전함으로 가득차 있었지만
참지 못할 그리움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아침안개 자욱한 바닷가
에서 나를 사랑한다고 하던 민우의 고백을 듣고서도 그리 혼란
스러운 일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었다.
하지만 그 날 민우에게 허리를 안기운채, 말 없는 두 눈에서 그의
작은 숨결을 느끼면서 그에게 여자친구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 너
무 싫다는 생각을 했다.
“맥주를 너무 많이 마신 탓 일께야.“
알콜 탓이라고는 하지만 사내의 땀 냄새가 코끝을 타고 허파에 담
기며 조금씩 움직일 때마다 와 닿는 그의 가슴, 온기가 전해 오는
오른손 손끝을 따라 전율이 흐르는 듯 했다.
“남자란 모두 이런 흥분을 상대에게 주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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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락도 없이 그의 어깨에 무거워진 머리를 살짝 얹으며 두 눈을
감고는 그가 하는 대로 조용히 그를 받아 주었다.
"나! 성민우~ 당신을 사랑해 가야 할 것 같습니다."
어깨에서 잠든 듯한 나는 잠꼬대 같은 민우의 속삭임을 귓가에
가득 담으며 눈을 잠시 떳다 감았을 뿐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낮
은 음성으로 답했다.
"장난하지마~아. 그러다가 나를 진짜 좋아하는 줄 알고 오해하
면 어쩌려고? 난 민우를 좋아해 본적이 없어. 아하~ 여친이 왔나
보구나!"
고개를 들며 장난스럽게 그의 어깨를 '툭'하고 치는 순간 파고드
는 그의 입술, 피 할 겨를도 없이 나는 입을 꼭 다문 채 민우의 기
습적인 키스를 받아야 했다.
당하는 순간부터 양 주먹으로 그의 등짝을 때리고 있는 나에 반해
그는 너무 우악스럽게 허리를 움켜쥐며 입술을 탐하면서 다른 한
손으로는 고개를 뿌리치지 못하게 목을 힘 있게 잡고 있었다.
친구들이 모인 테이블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기에 망정이지 그들
이 보면 어쩌려고, 그의 여친이 보면 어쩌려고 하는 생각을 하면
서도 키스의 달콤함에 후끈 달아오름을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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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 동안 지속된 그 순간을 모면하는 방법을 생각하다가 무릎을
들어 그의 아래를 힘껏 올려 차 버렸다. 외마디 비명을 삼키면서
두 손으로 사타구니를 움켜쥐고 어쩔 줄 모르는 그를 몸에서 밀쳐
낼 때 마침 음악은 고고로 바뀌고 사람들이 함께 어울려 시끄러운
춤판이 이어지면서 민우의 사나운 꼴은 그들 속에 묻혀 버렸다.
테이블로 돌아와 맥주로 목을 축였다.
"야! 성민우 너! 오늘 운 좋은 줄 알아!"
민우는 대답대신 맥주잔을 들어 미소로 건배를 제의 하며 함께
들기를 권했다.
그 날 민우의 여친은 끝내 나타나질 않았다. 우리들은 10시를 조
금 넘어 나이트를 빠져 나와 서둘러 집으로 향했다.
다들 여친을 집까지 데려다 주고 가야 한다며 헤어지는데 여친이
없던 민우는 나를 집까지 책임지기로 하고 길 건너 버스정류장까
지 함께 걸었다.
"여친이 안 나와서 섭섭했겠다? 한 번 보고 싶었는데...... 그런데
너 한 번만 더 이상한 짓 하면 다신 안 볼꺼야! 알겠지? 내가 뭐
여친 대신해서 키스 해 주는 여자냐?"
"그럼 여친한테는 키스해도 되는 거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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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없이 따르던 민우가 말했다.
"그런 것은 본인들 끼리 알아서 해야지 내가 어떻게 알아? 내가
그렇게 우습게 보였니?"
멋 적어 하는 그와 가을이 익어 낙엽진 거리를 걸으며 그에게 여
친이 있다는데 내가 왜 이리 허전 한 것인지를 반문했다.
버스에 올라 11시가 다 되어서 용두동에 내리자, 아빠와 은희가
버스 정류장을 서성이다가 반갑게 맞아 주었다.
"아빠 추운데 뭐 하러 나오셨어요? 은희야! 너는 동생들 어떻게
하고?"
"음... 민우가 같이 왔구나. 아무렴 그렇게 해야지. 민우 너는 어
서 집으로 가 보거라. 집에서 많이 기다리실 께야."
민우를 보내고 우리 세 부녀는 나이트에 가서 춤을 추는 이야기
를 화제로 뚝방길을 유쾌하게 걸었다.
"언니! 내가 아빠 한테 다음주 언니의 캠핑을 허락 받았어."
"그 녀석!"
아빠가 "그걸 못참고"하는 표정으로 은희를 돌아 보았다. 은희는
고3이라 대학을 가야 한다는 이유로 일체의 살림에 대해 신경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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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지 못하게 했는데 그런 점에서 항상 은희는 나에게 미안해 했
다. 자기가 대학을 가면 집안일은 1년 동안 자기에게 맡기고 나는
복학하여 학교를 다니라며 그 때부터 입버릇처럼 말하던 착한 동
생이었다.
키가 159cm로 크지 않은 은희의 어깨를 보듬어 안고 동생들이
사가지고 오라던 고구마 채 튀김을 사 들고 집으로 향했다.
"아빠! 다음주에 친구들과 캠핑을 다녀와도 되요?"
"여자는 몸가짐을 잘해야 한다. 은영이는 우리 집 기둥이니 잘
처신 할 테고, 은희 말대로 네 희생 이 너무 크구나."
처음으로 아빠가 나의 지난 2년을 혼자만의 희생으로 보신다는
말씀을 하셨다.
"그런 말씀마세요. 엄마만 불편하시지 않으면 우리 집은 행복한
집이잖아요? 아빠! 저 시집 안가고 아빠랑 동생들이랑 살래요."
자그마한 아빠의 어깨에 응석을 부리듯 뒤에서 매달렸다.
"행여 그런 말 말아라. 내년에는 너도 학교에 복학 해야지. 그리
고 옛날부터 얌전한 고양이가 먼저 부뚜막에 오른다고, 시집 안
가겠다는 딸년이 제일 먼저 간다더라."
"언니! 올 해 꼭 합격해서 집안일 거들 테니까 복학 준비해."
"복학? 얘! 은희야! 입에 침 바르고 말해라. 네가 밥을 할 줄 아
니 반찬을 할 줄 아니? 너를 믿고 집안일을 맡겼다가는 우리 식
구 굶는 것은 불을 보듯 뻔 한데 그런 말씀 말고 우선 합격증부
터 받아 오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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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에게 매달려 걸으며 나이트에서의 일들이 뇌리에 스쳤
다. 예상치 못했던 그의 입술과 거짓 같은 고백....."나! 성민우는
당신을 사랑해 가야 할 것 같습니다."
노빈과는 첫키스의 의미로 지금 생각해도 그렇게 달콤하고 감미롭
고 흥분이 가득한... 심장이 녹을 듯한 키스를 했었는데 오늘 민우의
키스는 굳게 다문 입술을 혼자 애타게 탐 하다가 순간적으로 힘껏
걷어차이는 것으로 끝을 냈었다.
큰 키에 민우가 사타구니에 두 손을 모으고 비비 트는 폼은 다치
지 않았나하고 조금 놀랐지만 낄 낄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곽방근과도 함께 부르스를 췄었다.
"곽방근씨! 성민우의 여친은 아직 안 나타났어요?"
"왜 궁금하십니까? 은영씨와 비슷하게 늘씬하고 거의 천사표의
마음을 가진 아가씨인데....... 은영씨 질투 하는 것 아니요?"
"그렇게 보였어요? 천만에요. 나는 민우같이 자기가 제일인양 거
만 떠는 돈키호테 같은 사람은 좋아하지 않아요."
"은영씨! 민우는요. 은영씨가 생각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에요. 우
리 친구들 아니 학교의 리더로써 카리스마를 함께 갖추고 모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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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포용 할 줄 아는 그리고 꼭 한 여자만을 사랑하는 순정
파, 그런 만화주인공 같은 친구이지요."
"가재는 게 편이라고 민우는 대변인 친구 하나 잘 두었네요. 그나
저나 여친 얼굴이라도 한 번 보아야 되는데......"
"민우의 말대로 제부도에 민우의 숨겨진 애인이 있다고 해서 갔
었는데 돌아오며 나에게도 저런 숨겨진 애인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했었습니다."
"아~ 그럼 제부도의 여학생들 중에서........."
한 참을 생각했지만 민우와 그런 사이로 보이는 여학생 누굴까?
혹시 민우의 애인이 나란 뜻일까? 말도 안돼. 이제까지 동창회
에서 민우를 만나서 알고 지낸 세월이 벌써 1년하고도 8개월이
흘렀는데 민우가 기껏 내게 한 말이라고는
"은영아! 나! 운명남! 너는 운명녀? 우린 정혼한 사이라는 것 알지?"
그것도 아주 능글거리면서 언제나 노빈과 내 사이에 고춧가루를
뿌려 왔던 그였는데 .......
김경백이 부르스를 추자며 스테이지로 나를 끌었다.
"자기 여친하고 추지 왜 나하고만 춤추자고 해요?"
"은영씨! 사람이 밥만 먹고 삽니까? 쌀밥이 있으면 보리밥, 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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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 고기도 좀 먹어야지요."
능글맞게 혀로 입술에 침을 바르며 금방 뜯어 먹을 듯이 지긋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에이 느끼해. 김경백씨! 눈 크게 떠 봐요. 느끼한 눈 말고..."
김경백이 한술을 더 떠서 눈을 감고 입술을 앞으로 내밀었다.
음악이 끝나 갈 때 김경백이 말했다.
"저기 은영씨 남친 아니에요? 그 친군 은영씨 없으면 못 산다고
하던데........."
그가 가르킨 곳에서 민우가 다른 여친과 춤을 추고 있는 모습을
보며 갑자기 식은땀이 흐르고 김이 새 버리는 것을 느꼈다.
이 친구들이 제부도를 함께 간 것도, 그 곳에서 공주마마 같이
떠받들어 진 것도, 우리 집에 들락거리는 것도, 모두 위선이었
다는 이야기인데 그 모든 것이 계획된 놀음이었고 값싼 동정
이었단 말인가?
동생들과 어울려 고구마 채 튀김을 먹으며 무차별 질문 공
세에 건성으로 대답하다가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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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음거리 밖에 안 되었다는 생각을 하면서 밤 새 뒤척이던 나는
민우가 학교에 가기 전인 이른 시간에 전화를 걸어 저녁 시장을
함께 보자고 연락을 넣었다.
어떻게 화풀이를 해야 할지 하루 종일 고민하다가 늦은 오후에
민우와 장보기를 나섰다. 민우는 좋게만 보일리 없는 나를 위해
이유도 정확히 모른 채 비위를 맞추려 애를 쓰는 것 같았지만 어
느 순간 민우도 화가 났는지 우리는 그 날 장을 보며 서로 말 한
마디 하질 않았다.
늦가을의 저녁은 그 새 어둠이 내리고 돌아오는 길에 민우에게
단단히 따지겠다는 심정으로 노빈과의 추억이 담긴 정릉천 뚝
방길을 앞장 서 걸었다.
"민우야! 너 왜 이렇게 사람이 비겁하니? 계획된 네 노름에 놀
아나는 내 모습이 그리도 보기 좋든?"
민우는 미소 지을 뿐 말이 없었다.
몇 년 동안 누구에게 해 보지 못한 화풀이를 속사포로 민우에게
한 동안 쏟아 내고 있었지만 민우의 표정은 달라 보이질 않았다.
"은영아! 이제 좀 풀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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쑥스러운 듯 장바구니를 들고 웃고 있는 민우를 보며 화가 난
나는 그의 가슴을 주먹으로 마구 때리다가 눈물을 흘리며 그에
게 안겨 버리고 말았다.
"여~어 경치 좋구만..... 형씨 거기 우리도 같이 끼어봅시다.
아가씨가 우는 것을 보니 형씨가 몹쓸 짓을 했구먼. 그럼 되나?
우리가 알아서 대신 해 줄테니 저기 가서 좀 쉬고 있어!"
우리 두 사람을 불량배 셋이서 둘러싸는가 싶더니 민우가 비명
지르며 머리를 감싸 안고 쓰러졌다.
"사람 살려! 사람 살려! "
입안에서 맴도는 비명을 지르다가 왼쪽 볼에 엄청난 충격을 느
끼면서 한 곁으로 나딩굴었다. 너무 아프고 정신이 없어 우는 것
도 잊은 채 땅바닥에 주저앉아 볼을 부여잡고 눈앞에서 벌어지
는 민우의 처참한 모습에 비명을 지르며 악을 썼다.
순간 검은 그림자가 욕지거리를 하며 달려들면서 정신없이 따
귀를 때렸다. 너무 무섭고 아파서 내 입에서는 비굴하게도
“살려주세요.”라는 말만 되풀이하고 있었지만 그림자는 주저
없이 옆구리를 발로 걷어 차버렸고 나는 쓰러져 뒹굴며 고통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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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을 헐떡였다.
그 들은 정신을 잃은 듯한 민우와 나를 뚝방에서 개천으로 끌고
내려갔다. 기절을 한 듯한 민우를 두 사람이 끌어갔고, 남은 한
사람은 한 손으로 머리채를 휘어잡고 아무런 이유도 없이 주먹
질을 하며 발길질도 쉬지 않았다. 정말 그 날은 그렇게 소리 낼 줄
모르는 벙어리로 죽는 줄만 알았다.
배를 맞아 호흡이 멎는 것 같은 순간을 맞으며 새우처럼 허리를
굽히고 숨채기를 하는 나를 낄낄거리며 지켜보던 그림자는 거칠게
웃옷을 벗겨나갔다. 반항하고 싶었지만 그의 무자비한 손놀림과 발
놀림이 너무 무서워 그의 더러운 손길을 허락 할 수밖에 없었지만
이대로 모든 것을 허락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림자가 잠시 방심 하는 틈을 타서 있는 힘을 다해 무릎으로 그자
의 사타구니를 걷어 차 버리자 그 자는 비명과 함께 사타구니를 붙
들고 옆으로 나뒹굴었다.
찢겨진 웃옷으로 가슴을 가리고 죽을힘을 다해 뚝방길로 오르는
계단을 향해 뛰었지만 길목에서 민우를 끌고 갔던 두 사람에게
머리채를 잡히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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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년이 누구 고자 만들 일 있나~ "
있는 힘을 다해 몸을 뒤틀었지만 다시 배를 얻어맞고 앞으로 꼬
꾸라지며 정신이 혼미한 나에게 두 사람이 다가와 다리 한 쪽씩
을 붙잡고 사납게 바지를 벗겨 버렸다.
나뒹굴던 그 자가 바지를 내린 채 내게로 다가오는 절망적인 순
간이 다가오자 아빠와 동생들 그리고 노빈의 얼굴이 떠올랐지만
무기력한 나는 더 이상 버틸 힘도 없었다.
온 몸을 뒤틀며 멍한 상태로 입안에 재갈이 물린 나는 소리 한
번 지르지 못하고 울고만 있었고 펜티의 한쪽이 사납게 찢겨져
나가는 것을 느끼면서 가슴에서 다리사이로 몸을 넣은 자의 느
끼한 미소를 마지막으로 의식을 잃어가며 눈을 감아버려야 했다.
"아~악! 허~억 으~~악"
어둠 속에서 비명을 울려 퍼졌다. 희미한 의식 속에 구속된 몸이 자
유로워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자들은 누군가에 의해 쫓기면
서 비명 지르는 것을 잠시 볼 수 있었지만 아무런 느낌도 들지 않
았다.
내가 정신이 들었을 때는 민우가 나를 꼭 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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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어떻게 된거야? 으~ㅇ 민우야! 나 어떻게 된거야?"
"은영아! 아무 일도 없었어. 정말 아무 일도 없었어."
알몸이던 것이 생각나 움찔 했지만 바지와 웃옷이 입혀져 있었고,
가슴과 배가 심하게 아프고 볼이 부은 상태로 입술이 터져 피가
좀 흐르고 있었지만 아직 경험해 보지 못했던 그 일이 있었지 없
었는지의 확신도 없이 온 몸이 다 쑤시고 아파 왔다.
왈칵 서러움이 복받쳐 민우의 목을 끌어안고 눈물을 쏟았다.
"민우야! 나 어떻게 해?"
"정말 아무 일도 없었어. 어서 이 곳을 빠져 나가자."
그의 목을 끌어안고 있던 내 얼굴에 끈적한 액체가 묻어났다.
"이게 뭐야. 민우 왜 이렇게 되었어?"
민우의 머리에서는 계속해서 피가 흐르고 있었고 금한 김에 내의
를 찢어 상처를 누른 채 큰길가로 서둘러 나와 가까운 병원을 찾
았다.
민우는 왼쪽머리뼈가 함몰되고 22바늘이나 꿰매었는데 과다출혈
과 뇌진탕과 오른쪽 갈비뼈 세대에 금이 갔다는 진단을 받았고
나는 타박상과 찰과상으로 가벼운 치료만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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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정도면 앰브란스 타고 오는데 이 친구 정신이 멀쩡하네."
의사 선생님이 한 말이었다.
"선생님 환자는 괜찮겠지요?"
"친구인 모양인데 밤길들 조심하지 않고 그만하길 다행이에요.
저 친구는 정신을 잃고 들것에 실려 병원에 와야 정상인데 정신
력이 굉장한 친구야. 목숨과는 관계없겠지만 출혈도 심했고 머
리뼈가 함몰된 상태로 뇌진탕 끼도 있으니 며칠 지켜봅시다."
그 으슥한 곳을 무엇 하러 앞장서 가서는 이 모양을 만들었지?
머리와 가슴에 붕대를 칭칭 감고 누워 있는 그를 바라보며 미안함
으로 고개를 들 수 없어 침대에 두 손을 포개 놓고 머리를 조아리
고 있는 나의 머리를 민우가 가볍게 쓰다듬었다.
"어서 가 봐라. 집에서 걱정 할 꺼야."
민우 뒤 편의 유리창문에는 입안이 찢어져 잔뜩 부운, 오른쪽 눈
가에는 시퍼렇게 멍이 든 추한 여자가 붕대로 전신이 감겨진 민
우를 가슴 아프게 바라보고 있었다.
"민우야! 너희 집에 뭐라고 전화해야 하니?"
"그냥 불량배들하고 시비가 붙어 싸움을 했다고 말씀 드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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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거운 마음으로 민우의 집과 우리 집에 전화를 넣자 그의 엄마
와 우리 집에서는 아빠가 병원으로 달려 오셨다.
민우의 엄마는 의사를 만나고 들어서면서부터 곱지 않은 눈으로
나를 보시는 듯 했고, 그런 모습을 보며 내 험했던 얼굴은 더욱
더 심하게 일그러졌다.
"어떻게 된 일이니? 의사 선생이 너는 괜찮다고 하더라만......"
병원에서 돌아오는 길에 아빠가 물으셨다.
"장보고 오다가 불량배들과 시비가 붙어 세 놈과 싸움질을 하다
가 그렇게 되었다."고 얼버무렸다.
"그만 하길 다행이다. 내일부터 장 보는 시간을 낮 시간으로 옮기
고 가능하면 동네 아줌마들과 함께 가거라."
내 얼굴이 심하게 일그러져 있었고 옷차림새도 앞 단추가 거의
없는 형편없는 상태였지만 아빠는 그 부분에 대해서 한 마디 말
씀도 없으셨다.
집안일을 동생들에게 시켜 놓고 방에 이불을 깔고 누우면서 혼자
있고 싶다며 동생들한테 오늘만 다른 방에서 자라고 했다..
잠바와 웃옷을 벗으며, 오늘 일을 아는지 모르는지 브레지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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찢겨진 채로 그 자들에게 유린당한 가슴이 처량하게 늘어져 있
는 왼쪽 가슴 밑에 멍든 자국과 등 쪽으로 생긴 상처들을 살펴
보았다.
손가락으로 상체의 이 곳 저 곳을 누르며 다친 곳이 없는지 살피
면서, 민우가 아무 일도 없었다고 했지만 혹시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 생각하면서 겁에 질린 채 통증이 계속되던 그 곳으로
손을 옮겼다.
그 자들에게 펜티를 찢기운 기억이 있으니 부끄럽게도 민우가
옷을 입히며 모든 것을 다 보아 버렸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며
창피함에 눈물이 났다. 바지를 벗으려 했지만 펜티가 없던 탓에
자크에 체모가 끼어 하는 수 없이 연필 깎는 칼로 체모를 끊어가
며 힘겹게 바지를 벗어 내렸다.
보기 싫게 잘려 나간 체모 사이를 이 곳 저 곳을 살펴보았지만
기억이 없으니 상상만으로 단정해 버릴 수도 없는 일이었다.
허벅지며 무릎 그 아래 정강이 할 것 없이 시퍼렇게 멍들어 있
는 곳들을 살피며 더운 물을 수건에 적셔 그 자들이 더럽혀
놓은 부분들을 밤을 잊은 채 치를 떨며 닦고 또 닦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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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금이 해제된 새벽 모자를 깊게 눌러 쓰고 썬그라스를 낀 채
목욕탕으로 달려갔다. 지난밤의 흔적을 깨끗이 씻어버리고픈
욕망으로 온 몸을 피부가 벗겨지도록 닦아 냈다.
사납게 멍이 든 눈 주위에 계란을 쪄서 미지근하게 하여 비비
면서 하는 일 없이 오전을 보내다가 은경이의 귀가에 맞춰 민
우가 입원하고 있는 병원으로 달려갔다. 전날보다는 한결 밝
아진 상태인 것 같았지만 붕대를 감고 있는 모습이 안쓰러워
눈물이 핑 돌았다.
"야~ 은영이 안대하고 썬그라스 끼고 무슨 영화라도 찍냐?"
나는 대꾸 없이 민우에게 다가가 손을 잡아 주며
"민우야! 다 나 때문이야. 내가 그 곳으로 가지만 않았던들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 미안해. 민우야!"
그 당시 나는 집에서 살림만을 해서 그런지 조그마한 일에도 감
동 받고, 아주 작은 슬픔에도 울음을 참지 못하는 울보였는데 그
날도 누워 있는 민우에게 엎어져 눈물을 쏟아 냈다.
"야~앙 분위기 좋고.... 음~메 좋은거~"
학교를 마치고 이용정, 김경백, 곽방근, 성연동과 여친들이 문을
열고 들어 와서는 한 마디씩 거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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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우씨 뇌진탕에 갈비뼈가 나가 정신이 들락날락하며 꼼짝 못하
고 누워 있는 줄 알았는데 숨겨 놓은 애인과 이런 모습일 줄은
몰랐어요! 우리 학교 친구들이 민우씨의 이 모습을 전하면 며칠
씩 학교 안 나올 애들이 많을 텐데 걱정되네요."
밝은 모습으로 구현옥이 말했다.
"그런데 왜 은영씨가 안대에 썬그라스를 끼고 있는 거죠?"
성연동의 말에 일제히 시선이 내게로 쏠리면서 눈물을 흘리던 나
는 닦을 엄두도 내지 못한 채 그 들이 있는 입원실을 나와 집을 향
해 달렸다.
"은영아! 은영아!"
민우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멈추고 싶지 않았다.
다음날 저녁
"아빠! 주무세요?"
"안 잔다. 왜 그러니?"
"저 말씀드릴 것이 있는데요."
"너! 병원에 가고 싶어 그러지? 지금이 아홉시이니 한 시간만
다녀오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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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을 준비하며 별도로 쌓아 둔 김밥과 밑반찬을 챙겨 들었다.
"어떠니? 민우야!"
머리를 붕대로 감고 조그마한 얼굴이 보일뿐인 민우는 인상을
쓰며 아프다고 엄살을 부리고 있었지만 한눈에 장난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많이 아프구나. 그런 줄도 모르고 먹을 것을 준비해 왔는데
오늘은 그냥 가지고 갈께. 미안해.“
장난스럽게 등을 돌려 병실문을 향하는 나를 황급히 잡아 세운
것은 민우의 화급한 목소리였다.
"아아~아 나! 다 나았어. 여기까지 와서 그 무거운 것을 비우고
가야지 어딜 들고 간다고 그래?“
그는 침대에서 몸을 세우려다 또 한번 크게 인상을 쓰며 비명을
질렀다. 아직 성치 않은 몸을 움직이려다 아픔을 참지 못하는 비
명이었다. 침대로 달려가 그가 다시 누울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불빛 아래 검은 안경을 쓴 여자와 붕대에 감긴 사내는 누가 먼저
랄 것 없이 상대의 모습에 낄낄거리며 두 손을 마주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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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식 먹어도 괜찮아?”
“그럼 그렇지 않아도 출출해서 죽는 줄 알았다.”
괜찮을 것도 같았지만 그는 고집스럽게 손과 팔을 쓸 수 없다며
먹여주길 바랬고, 그의 행복한 미소를 바라보며 잠시지만 나도
기쁨을 느낄 수 있었다.
식사가 끝나갈 무렵 조심스럽게 그에게 물었다.
"그 날 일을 말 해 줄 수 있겠니? 하나도 빠짐없이......"
"지난 일인데 잊어버리고 살자. 정말 너는 아무 일도 없었어."
"아니. 난 알아야 돼. 알고 싶어."
잠시 머뭇대던 민우는 이내 결심한 듯 차분히 그날 있던 일들을
말하기 시작했다.
"그 날은 네가 무척 화가 나 있었던 것 같았어. 도무지 곁을 주지
않던 네가 하루 종일 나에게 화를 내고 있었지만 그럴수록 좋기만
한 나는 언제나 처럼 조용히 네 곁에 있었지.
장보기가 끝나고 어둠이 내리면서 토라진 상태에서 집으로 향하던
너는 갑자기 정릉천변으로 발길을 빨리 하더군. 돌쇠가 별 수 있니?
빠른 걸음으로 따라 갈 수 밖에..... 이 대목에서 나는 조은영에게
깊이 사과해야 할 점이 있는데 받아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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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 봐. 들어보고 결정할 께."
"사실 제부도 일과 나이트 사건은 너를 위하고픈 조그마한 나의
배려라고 생각했었거든. 그냥 너를 기쁘게 해 주고 싶은 마음...
그런데 네 입장에서 생각을 한 번쯤 해봤어야 하는 것을 잊었어.
사과 할께. 하지만 성민우의 마음만은 알아주면 좋겠어.“
사실 괜한 자존심 투정이었지 나이트클럽을 다녀와서 나는 벌써
그를 이해하고 있었다.
“자신을 잘 모르겠지만 은영이 너 같이 착한 마음과 미모의 사람을
만나기란 정말 어려운 일이지. 동창회에서 너를 처음 대하는 순간
너는 내게 없어서는 안 될 사람이라는 것을 느끼면서 네게 빠져
드는 나를 느꼈어. 그리고 언제가 부터 널 사랑하고 있다고 생각
하며 살아 왔............."
손가락으로 눈을 감고 이야기하던 그의 입술을 가로막았다.
"쉬! 그런 말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잖아?"
그의 쇳물처럼 달아오르던 눈빛이 사그라질 무렵까지 한 동안 내
손가락은 그의 입술에 있었고 멎어버린 시계바늘처럼 정체된 눈
빛을 말없이 주고받았다.
민우 엄마가 돌아 오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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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영이라고 했던가?"
"네"
"도대체 어찌 된 거야? 우리 민우도 그렇고 아가씨 성치 않은 얼
굴을 보니까 무슨 큰일을 당한 것 같은데 자세히 좀 말해봐."
"엄마! 길을 걷다가 불량배들과 시비가 붙었고 은영이가 말리는
사이 그 곳을 피해 나올 수 있었다고 몇 번이나 말씀드려요?
은영이 덕분에 이만 한 줄 아세요."
"그래 이 녀석아! 아무런 문제가 없으면 좋지. 문제는 네 머리가
신통칠 않다는데 있어요."
놀라서 바라보는 내 시선을 향해 민우가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아니 괜찮아. 두개골이 상하면서 약간 뇌를 건드린 모양이야.
의사 선생님이 괜찮다고 했어."
십분 전 열시의 시계를 보며 병원을 나서면서, 평소 가지도 않는
정릉천변을 그날따라 무엇 하러가서 이런 변을 당해야 하는지?
또 나 때문에 많이 다친 민우에게 어떻게 보상을 해야 할지 난감
하기만 했다.
다음날부터 나는 하루 중 한 가지 일과가 추가로 더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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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에서 민우가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나 병원 밥 먹다가 가죽
이 뼈에 붙어 죽을 것만 같다. 은영아! 야참 좀 갖다 주라.“
하며 해대는 전화 때문이었는데 그를 위해 야참을 만들고 나르는
재미는, 글쎄 당시 나를 어떤 포만감으로 들뜨게 했던 것 같다.
다음 날 도시락을 싸 들고 9시 조금 넘어 병실에 도착해보니 민
우가 혀를 빼고 숨 넘어 가는 표정을 지으며 나를 맞았다.
그 날부터 엄마 대신 친구들이 병간호를 하기로 했다며 오늘 당
번인 곽방근이 "오메 큰 일 났네. 성민우 오늘 죽나 보네." 아직
붕대로 전신을 감고 있는 민우의 두 팔을 잡고서는 "야! 민우야!
내가 지금부터 인공호흡 할께. 코를 잡고 마우스대 마우스 알지?"
곽방근이 금새라도 입술을 훔치려는 듯한 폼을 잡았다.
"아~악 사람 살려! 이 자식은 잘해야 일주일에 한 번 이빨 닦는
데 아이고....."라며 베개로 머리를 감싸고 침대에 몸을 묻었다.
"은영씨! 이 친구, 병원 밥은 나를 다 주고 지금까지 굶었어요."
후후 웃으며 도시락을 꺼내 펼쳤다.
그날은 유부초밥과 계란말이 돼지고기 볶음을 조금 해 갔다.
"아이고 맛있는 거! 은영아! 옆구리가 아파서 그러는데 밥 좀 먹
여 주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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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놀고 있네. 정말 눈꼴이 셔서 더는 못 봐 주겠다."
곽방근이 산책을 딱 한 시간만 하겠다며 병실을 나갔다.
밥을 다 먹도록 민우의 강한 시선에 나는 몸 둘 바를 몰랐다.
"보지마~아! 보지 말라니까~안! 에이 이 놈이~ "
그의 다리를 꼬집어 비틀었다.
"아이고 나! 죽는다. 사람 살려!"
밥을 다 받아먹은 민우가 엄살을 부리면서 물까지 한 사발 받아
들이 킨 그에게 전날 못 다한 이야기를 해 달라고 졸랐다.
"어디까지 했더라? 아무튼 네가 어두운 정릉천변으로 걸어가고
있었고 나는 그 뒤를 따라 갔었는데, 어느 순간 네가 나를 마구
때리며 자신을 값 싼 동정심으로 놀렸다고 하며 막 울면서 나의
가슴을 진짜 아프게 쥐어박다가 갑자기 내게 안겨 들었어. 나는
얼마나 가슴이 뛰던지 너의 풍만한 몸을 느끼는 순간.........."
"쉿"
오른 손 엄지와 집계손가락으로 그의 입술을 집계로 집듯 집고서
"감정 표현은 자제하고 다음 계속하세요." 라고 말했다.
"그렇지만 그 순간은 그리 길지 않았어. 왠 놈들이 둘러 싸는가
싶더니 머리에서 불이 번쩍 했고 계속해서 구두 발로 채 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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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을 느끼다가 그만 정신을 잃었지.
정신을 차리니 뚝방 아래 하수도 물이 흐르는 도랑에 머리를
쳐 박고 있더군. 다행이 하수도가 흘러 얼굴에 닫는 통에 정신
을 차리게 되었고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전혀 낯선 곳이었어.
그러다가 네 비명에 주변에서 급한 대로 몽둥이를 하나 주었지.
은영아! 내가 검도를 좀 했다는 말을 했던가? 몽둥이 하나면
몇 명은 거뜬하게 해 치울 수 있지."
"그래서 어떻게 된 거야?"
나는 치부에 가까워질수록 슬픈 눈으로 민우의 눈을 피하면서,
다시는 생각하고 싶지도 않은 순간들이 악몽처럼 눈앞에 어른
거렸지만 정작 중요한 부분에 대해서는 아무런 생각이 나질 않
았다.
"아무 일도 없었어. 은영아! 그 이야기 이제 그만 하기로 하자."
"아니 난 다 사실대로 듣고 싶어. 계속해줘."
이야기를 들으며 더 이상 그를 바라 볼 수 없어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침대 모서리에 고개를 묻었다.
"어둠 속에 한 놈이 네게 달려드는 것이 보였어. 그자의 옆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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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향해 일격을 가했지. 놈은 아 ~악 소리를 지르며 옆으로 나
뒹굴더군. 계속해서 앞 쪽에서 양팔을 잡고 있던 자의 어깨를
몽둥이로 내리치자 비명을 지르며 도망가 버렸고, 나머지 한 놈
은 다리를 잡고 있다가 기겁을 하고 도망치려다가 팔에 일격을 맞
고 어둠 속으로 달아나더군. 옆구리를 맞은 놈이 일어나는 것을
보며 등짝을 후려치자 놈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하천을 따라 죽
어라 도망 가버리는 것을 보고 네게로 갔던 거야."
나도 모르게 민우의 품으로 달려들어 서글픈 눈물이 쏟아졌다.
"의식을 잃고 누워 있더군. 급한 대로 손수건을 꺼내 입술에 묻은
피를 닦아 주면서 놀랄 것 같아 바지 그리고 웃옷을 차례대로 입
혀 주고는 무릎으로 받쳐 안고 있는 상태에서 네가 정신을 차렸어."
서서히 고개를 들어 민우를 보다가 고맙다는 나의 표현인지 모를
가벼운 키스를 그에게 하는 순간 노크도 없이 병실 문이 열리며
곽방근이 나타났다.
"두 사람.. 나 없는 사이 나쁜 짓 안 했지요? 암! 나쁜 짓 하면
못 쓰지. 그만들 속삭이시고... 은영씨! 집에 갑시다. 이 튼튼
한 돌쇠가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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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자식은 도움이 안 돼요. 넌 언제나 철들래?"
"꽃은 꺾어서 보는 것이 아니고 가꾸면서 보아야 아름답게 오래
도록 볼 수 있다는 것을 아냐 모르냐? 은영씨! 나랑 어서 갑시
다. 너무 늦었어요."
시계는 열시 반을 가리키고 있었다.
"민우! 나 갈께."
"은영아! 나 벌써 배가 고파진다."
돌아오는 길에 민우에게 괜히 미안하고 고맙다는 생각이 들었다.
손가락에 해 주던 가벼운 키스...그 전율에 온 몸을 떨었던 순간,
그의 이야기 속에 담긴 나에 대한 사랑? 진실? 웃긴다는 생각이
들었다.
민우가 입원해 있는 동안 나는 의무감 같은 마음으로 그에게 야
참을 매일 날랐고, 이제까지 알려고 노력하지 않은 성민우를 긍
정적으로 바라보게 되면서, 언제부턴가 그는 능청스러운 초등학
교 남자 동창에서 매일 보고 싶은 사내로 내 곁에 자리 잡아 갔다.
"다 나아 다행이다. 그 동안 고생 많이 했어."
많은 친구들의 축하를 받으며 한 달 동안의 입원 생활이 끝나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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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의 마지막 토요일날 그는 퇴원을 했다.
"은영아! 네가 해 준 야참 덕에 빨리 나아 퇴원한다."
친구들이 야유를 보냈다.
"우~우 아~~~우"
병원 앞에서 그의 부모님과 함께 차에 오르는 민우를 친구들 틈
에 섞여 바라보며 모든 조건에서 나와는 상관이 없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해 겨울은 무척 추웠던 것 같다. 엄마는 더 이상 버틸
기력이 없어 보이는 듯 싶었고, 은희는 자기가 목표로 세웠던 미
대에 합격을 했다. 자연히 은희가 은수를 업고 집을 보거나 집안
살림을 돌보는 시간이 많아졌지만 내가 겪은 시간들을 똑같이
동생에게 남겨 주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제한된 집안 살림
외에는 손을 대지 못하도록 했다.
시간적 여유가 생긴 나는 토막시간이지만 민우와 극장구경도 할
수 있었고 함께 스케이트를 탈수도 있었으며 가끔 나이트에 가
서 신나게 춤도 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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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출입을 시작한 나이트클럽은 가끔 은희가 집을 지켜 주던
토요일 저녁이 오면 친구들이 없이 엄두가 나지 않던 그곳에 아
무렇지 않게 혼자서 드나들 수 있었다. 처음엔 맥주 한 잔을 따라
놓고 누구를 기다리는 양 얌전을 떨던 나는 어느 새 웨이터가 손
짓하는 상대를 보아가며 초면임에도 즐거운 마음으로 신나게 함
께 몸을 흔들었고, 고고춤을 멋지게 출줄 알게 되면서부터 손님
들의 부킹이 직업인 웨이터들에게 귀한손님으로 대접받기 시작
했다.
스테이지에 나서기가 무섭게 주변에 사내들이 모여들었고, 테이블
로 돌아와 앉기가 바쁘게 웨이터들이 달려와 부킹을 애원하면서
내게는 무료로 그곳을 출입해도 좋다는 지배인의 허락도 있었다.
어쩌다 몇 시간의 자유로움이었지만 나만을 위해 나만을 느끼며
나를 위해 달려드는 조명과 사람들 속에 온 몸이 땀에 젖도록 흥
겹게 놀았지만 나름대로 지키는 것이 있어 9시30분이 되면 바람
같이 그 곳을 빠져나왔고 어느 때부터인가 특별히 단골 웨이터들
이 쫓아 나와 택시를 잡아주며 배웅을 해주었다.
"아저씨 용두동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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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트의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아직 흥분이 가시지 않은 채
떠난 지 반년이 다 되도록 연락 한 번 없는 노빈이 생각났다.
가끔 그를 생각하면 첫 순정을 앗아 간 첫사랑의 님 같기도 하
고, 사춘기 아니 내가 가장 심리적으로 불안 했을 때 상상으로
나마 나의 친구, 애인으로 언제나 나와 함께 살았던 사람, 바로
그가 나 자신이었다는 생각을 했지만 "노빈을 사랑했었나?"
라고 물으면 쉽게 답을 내릴 수 없었다.
그가 떠나며 내게 남긴 말들이 기억났다.
"은영아! 난 너를 본 첫 순간부터 좋아하고 이제는 사랑하게 되
었어. 운명이라지만 너의 삶을 지켜보며 나는 언제나 너의 기
쁨이 되고 싶었고, 너에게 또 다른 슬픔으로 남고 싶지 않아 이
별이라는 말을 하고 싶지 않았어. 그렇지만 오늘 너를 마지막
으로 보지 못하면 영원히 후회 할 것만 같아 순결하고 아름다운
너에게 친구가 아닌 이성으로써 너를 사랑했노라고 고백하고 싶
었어."
165cm의 자그마한 키에 차분한 말투! 작은 입이 매력이던 노빈!
어디서 무얼 하는지 그렇게 보고 싶던 얼굴이었지만 세월이 흐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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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 "그가 나를 잊었구나." 하는 느낌으로 더 이상 나는 그의 소식
을 기다리지 않기로 했지만 가끔씩 외로운 밤이 오면 그가 내게
남겨 준 첫사랑의 감정을 영원히 잊을 수 없을 것 같았다.
사랑이란 무엇일까?
같이 있으며 즐겁고, 없으면 보고 싶고, 만지고 싶은 것이 사랑
이라고 하던데, 보고파 숨이 막히고 안타까워 애를 태우는 그런
것이 사랑이라 하던데... 그 날 바보 같은 그는 나의 허락을 받아
드리지 못했다.
"은영이니? 어서 와라!"
엄마의 그 말과 함께 구역질하는 소리가 들렸고 은희는 걱정스러
운 눈으로 은수를 업고 안 방 마루에 서성이고 있었다.
"언니! 엄마가 많이 아프신 것 같아!"
"옷 갈아입고....."
방으로 가 옷을 갈아입으며 생각을 했다. 2년 남짓한 엄마의 투
병기간 동안 누구 하나 정상적인 가족이 없었다. 아빠는 퇴직금
을 미리 정산 받아 턱 없이 모자라는 엄마의 치료비를 대고 있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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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월급으로는 우리 아홉명 가족의 교육비와 기본적인 식사를 해
결하는 수준이었다. 더욱이 금년에는 은희가 대학을 가는데 ......
안방으로 들어갔다.
이젠 살이라고는 찾아 볼 수 없는 나를 낳아 주신 엄마가 피를
토하며 계셨는데 의식이 있다 없다를 반복하셨지만 이내 엄마가
나를 알아 보셨다.
"은영아! 나 좀 가게 해 다오. 이제는 그만 나를 보내 다오."
철이 없어선지 초등학교 다니는 은애, 은정, 은미는 2년째 병석인
아픈 엄마에게 가능하면 가까이 가지 않으려고 했다.
"담배 한대 피고 오마."
곁에서 자리를 지키던 아빠가 애써 눈물을 감추며 밖으로 나가셨
고 대문 여는 소리가 들렸다.
곁에서 잠시 안정된 모습으로 눈을 감고 숨을 몰아쉬는 엄마의
손을 잡고 듣지도 못하실 엄마에게 낮은 목소리로 고해하듯 말씀
드렸다.
"엄마! 힘드시지요? 이제 그만 떠나세요. 엄마의 고통을 저도 이
젠 지켜보며 있기가 너무 힘들어요. 사랑해요 엄마! 그냥 잠자듯
편히 가세요. 아빠랑 동생들이 걱정이라구요? 맹세 할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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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계셔야 할 곳은 제가 언제나 지키고 있을 께요."
내 말을 들으셨는지 엄마의 두 눈에서 스르륵 눈물이 흘렀다.
다음날 아빠 친구분인 의사선생님이 다녀갔다.
"열흘이 힘들지 않겠나? 준비를 서두르게."
그렇게 5일이 지나고 언니가 미국에서 조카를 데리고 도착하자
엄마는 눈에 띄게 병세가 좋아지셨지만 언니와 내가 부산에 간
사이 한마디 말씀도 못하시고 은희와 은수만이 지켜보는 가운데
돌아가시고 말았다.
삼오제가 끝나고 아빠가 가족회의를 소집 했다.
"자 우리 가족이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해 이야기 하
겠다. 우선 은주는 아무 생각하지 말고 부산을 들러 사부인께
인사를 드리고 미국으로 돌아가거라. 사위가 오지 못한 것으로
보아 아직 그 곳에서 자리 잡지 못한 것 같으니 행여 그 곳에
가서라도 우리 집안 일로 다투는 일이 없도록 해라."
사실 그랬다. 언니는 미국에 간지 두 해가 되었지만 아직 영어를
자유롭게 구사하지 못하다보니 언니 가족이 할 수 있는 일은 청
소, 다림질, 접시 닦기등 단순 노동 밖에 없었고, 그것으로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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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연명하며 영어공부에 매달리는 아주 어려운 살림을 하고 있었
다.
언니는 무슨 말을 하려다가 마른 침을 삼키며 흐느끼고 있었고
동생들은 무척 긴장한 채 아빠의 다음 말씀을 기다렸다.
"아빠 생각으로는 은희가 휴학을 하고 1년간 집안을 맡으면 좋겠
고, 은영이는 신학기부터 복학을 하도록 해라."
나와 은희가 뭐라고 말씀드리려고 했지만 손을 들어 제지하시며
기회를 주시지 않고 다음 말씀을 이어 가셨다.
"우리는 이 집을 팔고 좀 작은 집으로 이사를 가야하는데 보아
둔 집은 방이 두 칸이니 조금씩 불편해도 그리들 알고 이사 갈
준비들을 하거라."
동생들은 며칠 전 엄마를 잃었고, 오늘은 우리가 12년을 살아온
이 집을 떠나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모두들 쾡 한 눈으로
아빠만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럼 그렇게들 알고 이사는 석 달 후가 될 께다. 나가 들 봐라."
동생들이 나간 후 나와 은희가 남았다.
"아빠! 대학은 은희를 보내 주도록 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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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 그러면 안돼. 더 이상 언니 자신을 버리면 다시없는 인생
의 기회를 놓치게 돼. 복학하더라도 언니친구들은 3학년이잖아!
나는 1년 재수 한다고 생각하면 되고 화실에 나가면 돈도 벌 수
있어. 그 보다 나는 아빠께 내일부터 화실에 나가 돈을 좀 벌면
이 집에서 그냥 살 수 없을까 하는 말씀을 드리려고 했는데....."
그렇게 이야기 해주는 은희가 예뻤다.
"아빠! 저는 며칠 전 엄마한테 맹세를 했어요. 아빠랑 동생들 걱
정 마시라고요! 엄마가 계셔야 할 곳은 제가 언제나 지키고 있을
께요.“ 라구요. 잠드신 듯한 엄마의 두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리며
내 손을 힘없이 잡아 주시던 엄마와의 약속을 져 버릴 수가 없어요.
그래서 저는 동생들이 다 결혼하고 떠날 때까지 아빠와 함께 살고
싶어요."
은희는 쓰러질 듯 내 품에 안겨 울어 버렸고 아빠는 담배 한대가
타 들어 가도록 말씀이 없으셨다.
"아빠! 엄마와의 약속을 지킬 수 있게 해 주세요. 아직 어린 동생
들에겐 엄마의 보살핌이 있어야 하고, 그 일은 은희보다 제가
더 잘 해낼 수 있다고 생각해요. 집 문제도 이사를 가는 것보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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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비를 줄이고 저도 함께 돈을 벌어 갚아 나가는 방법은 없을
까요?"
"언니말은 고맙지만 이젠 제가 우리 집에 힘이 되어야 한다고 생
각해요. 언니가 학교를 다니며 조금씩 도와주면 언니만큼은 못
해 도 저도 잘 할 수 있어요. 아빠!"
말없이 듣고 계시던 아빠가 고뇌에 찬 표정으로 우리 두 사람의
손을 꼭 잡아 주시며 나직이 말씀하셨다.
"은영아! 네게 너무 힘든 짐을 지우는구나!"
허락이 떨어지자 왜 그렇게 서럽던지 나는 아빠의 가슴에 안겨
대답대신 소리 내어 엉엉 울어 버렸고, 우리 세 부녀는 서로를
부둥켜안은 채 얼마 동안 일어날 줄 몰랐다.
엄마가 안 계시다는 것 외에는 우리 집에 평온이 다시 찾아
왔다. 슬픔도 잠시였고, 집안에 환자가 없다는 것만으로도 어둠의
그림자가 사라지면서 어린 동생들은 밝은 모습으로 각자 자기가
해야 할 일들을 찾아 해 나가기 시작했고 그 집을 떠나지 않기 위
해서는 모두가 바쁜 사람들이 되어야 했다.
우선 집을 담보로 은행에서 융자를 얻어 비싼 이자의 사채를 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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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은행 빚을 갚기 위한 방편으로 아빠는 퇴근 후 신설동 로터리
근처, 학원들이 많은 장소에 나와 둘이서 포장마차를 여셨다.
은희는 대학생활과 함께 저녁에는 화실에 나가 돈을 버느라 함
께 살면서도 얼굴보기가 힘들었고, 집안일은 고2였던 은경이가
두 말 없이 맡아 주었다.
은경이가 준비한 아침을 먹고 나면 낮 시간 동안 막내를 돌보며
남은 집안 살림을 하다가 저녁시간이 되어 돌아 온 은미에게 동
생들과 집안일을 다시 떠 맡겼다.
그 때부터 부지런히 경동시장으로 달려가 시장을 봐 오고, 퇴근
하신 아빠와 간단히 저녁을 들고난 후 두툼한 옷차림으로 보관소
에 맡겨 두었던 포장마차를 움직였다. 가끔씩은 언제부터 기다
렸을지 모를 주차장 골목길 저 만치서 민우를 비롯한 제부도 친
구들이 창피 한 줄도 모르고 달려와 아빠와 나를 밀어내고 리어
커 끌고 가서는 개시를 잘해야 한다며 숨겨 둔 한 무리의 친구들
까지 동원해서 매상을 올려 주는 일이 심심치 않게 있었다.
처음에는 "어서 오세요. 무엇으로 드릴까요? 또 오세요!"소리가
그리도 힘들고 어려웠지만 석 달째 접어들면서 단골손님도 생기
고 제법 자리를 잡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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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와 딸!"
우리 포장마차의 간판 이름이었다. 남들도 다 파는 꼼장어, 고추
장 돼지고기볶음, 오뎅, 개조개, 물오징어, 홍합 외에도 신설동이
학원가라는 생각해서 계란을 풀어 식빵에 입혀서 버터에 굽고,
양배추를 채 쳐서 올리고 난 뒤 그 위에 설탕을 한 숟가락 뿌린
"마미 샌드위치"는 어느 새 학원가에 입소문이 퍼져 저녁시간부
터 끝날 때까지 나는 거의 "마미 샌드위치 주세요" 소리에 묻혀
살아야 했다.
그렇게 3월부터 시작한 포장마차는 1년 지나며 아빠와 내 손의
피부가 거칠어진 만큼 비례해서 은행에 꽤 많은 돈을 저축 할 수
있게 해주었다.
밤 11시가 가까워 평소와 같이 일을 마치고 함께 집으로 향하던
아빠가 푸근한 얼굴로 말씀을 하셨다.
"은영아! 우리 오늘 집에 가면서 남은 재료를 가지고 가서 아이
들 하고 밤참이나 먹고 자자."
지난 1년 동안 파는 물건은 절대 드시지 않던 아빠 말씀이 믿어
지지 않아 "아빠 내일 팔아야 하잖아요?" 라는 물음에 "음~ 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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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상의했어야 했지만 네 덕에 빚도 어느 정도 갚았고 마침
포장마차를 좋은 값에 사겠다는 사람이 있어 팔기로 했다."라고
말씀하셨다.
포장마차를 뒤에서 밀면서 서운한 생각이 들었지만 “아빠의 결
정이 그러하시면 두 말 없이 따라야지. 엄마가 계셨다면 그렇게
하셨을 꺼야."라고 생각했다.
어두운 마음이 조금씩 풀려갔지만 추운 날이면 허리 없는 몸빼
바지에 두툼한 상의, 머리에 마후라 를 두르고 고무장갑을 끼던
내 모습도 오늘이 마지막인가? 하고 생각하니 앞뒤 분간 없이 뛰
어 들었던 1년여의 세월이 괜한 슬픔으로 다가왔다.
밝지 않은 얼굴로 대문을 열고 들어서자 불문율처럼 은수를 제외
한 가족들이 아빠와 나를 기다리다가 반갑게 맞아 주는 우리 집 저
녁인사가 이어진 후 아빠 말씀대로 남겨온 재료로 음식상을 보아
온 가족이 마루에 모여 앉아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오늘은 아빠와 돌아가신 엄마의 27주년 결혼기념일이란다.
엄마는 좋은 곳에 가셔서 너희들이 행복하게 사는 것을 보시며
기뻐하실 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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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들 힘들게 생활하고 있지만 너희들 언니에게 정말 잘 해야 한다.
너희들이 언젠가 커서 깨달을 때가 있겠지만 우리들을 위한 언니
의 희생을 잊어서는 안돼."
나는 그 자리에 앉아 있을 수 없었다.
"물 좀 가져 올 께요."
부엌으로 향하며 마구 넘치는 21살의 눈물을 멈출 수가 없었다.
무거운 분위기가 지나고 웃음소리가 들리는 안방으로 주전자를
들고 들어서는 나에게 은희가 선물이라며 봉투 하나를 내밀었다.
"아빠께 드리려 했는데 아빠가 그 선물은 언니가 받아야 한다고
하셔서 언니한테 드립니다. 언니! 고맙습니다."
조심스럽게 열어 본 서류봉투 안에는 예상은 했었지만 등록금
면제에 매 학기 20만원씩 나오는 대단한 장학증서가 들어 있었다.
나도 은희도 아무 말 없이 그냥 서로 끌어안고 등을 토닥여 주었다.
"언니! 고마워. 살아가면서 언니의 은혜를 두고두고 갚을 께."
"기집애! 장하다. 언니는 네가 자랑스럽다."
동생들이 박수를 쳐주며 은희를 축하해 주었다.
"오늘은 참으로 좋은 날이구나. 아빠 엄마의 결혼기념일이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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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희가 장학생이 된 날이기도 하고, 우리 집의 은행 빚을 거의
다 갚아 버린 날이기도 하다."
아빠의 신나는 외침에 온 가족이 환호성을 지르며 기뻐했다.
엄마가 가신 후로 이렇게들 기뻐해 본적이 없었다.
아빠를 졸라 3일 동안 포장마차 인계를 뒤로 밀고 단골들에게
그 동안 고마웠다는 인사를 하며 포장마차와의 인연을 정리해
나갔다.
오랜만에 찾아 든 한가한 마음으로 은수와 함께 목욕탕을
갔다. 거울 앞에 선 나는 내가 보아도 겨울바람에 얼굴 피부가
벌겋게 상해 있었고 입술은 얇게 터져 껍질이 다 일어나 있는
거칠은 모습이었다.
"색시! 등 좀 밀어 주슈"
오십쯤 되어 보이는 아줌마의 청을 받아 정성껏 때를 밀어주고
아줌마에게 등을 맡기면서 검고 긴 머리를 앞으로 늘어뜨린 채
아무 생각이 없었다.
"색시! 얼굴을 보면 고생 많이 했고 나이도 좀 들어 보이는 애
엄마가 분명한데 늘씬한 키 하며 몸이 어찌 이리 곱고 탄탄해?
꼭 스무살 먹은 처녀 같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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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에 붓기가 있고 까칠한 얼굴피부와 손등, 아들로 보이는 녀
석을 데리고 목욕을 온 나는 영락없는 아줌마였다. 변명할 여지
마저 없어 보일 것 같아 붉어진 얼굴로 대답대신 "고맙다."는 말
외에 죄인인양 고개를 숙이고 숨죽여 있다가 사우나로 장소를
옮겼다.
정말 오랜만에 내게 주어지는 자유로움과 한가함에 빠져 땀에
흠뻑 온 몸을 적신 채 유리창 밖으로 은수를 지켜보며 지난 일
년간 아빠와 함께 끌었던 포장마차 추억을 되새겼다.
그 동안 우리 집은 이렇다 할 반찬거리도 없이 김치와 된장찌개
를 주식으로 고기는 아예 구경을 할 수 없었고, 우리 집을 지켜
야 한다는데 온 가족이 매달려 적은 돈이라도 절약하며 은행빚을
갚아 나가야 했었다.
용돈이라는 것은 아예 없었고, 가족을 위해 최소한의 생필품도
아껴 쓰고 있었지만 누구 하나 불평 없는 세월을 살았던 것 같다.
엄마가 돌아가신 후 집안을 꾸려나가야 한다는 강박 관념에 빠
진 나도 예외는 아니어서 자신을 돌볼 여유라는 것은 아예 잊어
버렸고, 화장품이나 심지어는 목욕탕에 가는 것 조차 마음에서
쉽게 허락하질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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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늘고 긴 손가락 끝으로 방울 지어 떨어지는 땀방울을 보면서
거칠게 일어난 손등을 못마땅하게 비볐다.
운동과 노동은 다르다더니 하루를 어떻게 보내는지 모르게 바삐
살았다고 하지만 날씬했던 몸매에는 군살이 덕지덕지 붙었고,
늘어진 볼 품 없는 아랫배는 사정없이 똥배가 되어 더부룩하게
솟아 있었다.
5kg나 불어난 체중 탓인지 가슴이 불어 1년 전보다는 상대적으
로 커져 있었지만 그런 대로 탄력이 있어보였고, 내 몸 중에서
가장 괜찮아 보인다는 생각도 했다.
늘어진 머리카락을 이마에서부터 두 손으로 쓸어 등 뒤로 제쳤다.
생머리를 어깨까지 기르고 다닌 것은 기억나지만 1년 전부터는
은희가 잘라 주는 머리를 고무줄로 감아 틀어 올리고 살았었다.
"아무려면 어때?"
기지개를 켜고 두 손으로 발을 감싸 안자 땀에 젖은 가슴이 허벅
지에 미끌리며 머리채가 앞으로 솟구쳤고 눈앞에 웃고 있는 엄마
의 모습이 보이는 듯 했다.
"엄마! 나 잘 하고 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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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은 때를 벗기고 목욕탕을 나서자 세상이 밝게 느껴졌다. 내친김에
미장원에 들러 머리를 자르고 큰마음 먹고 퍼머를 하고서 책상 위에
빈 병만 즐비한 화장품을 생각나서 기초 화장품을 몇 가지를 사며
샘플 루즈를 입술에 발랐다.
작년 겨울 나이트를 다니며 활기찼던 그 모습은 아니었지만 모처
럼 생기가 넘쳐난 모습으로 거리에 나서면서 포장마차를 밀고 갈 때
는 눈길 한 번 주지 않던 거리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을 느낄 수 있
었다.
어찌 되었든 대부분의 여자들은 남들로부터 관심을 받는다는 것을
행복한 일이라는 생각하는 것처럼 나도 오랜만에 자신감 넘치는 행
복이 찾아 드는 듯 싶었다.
"언니! 이쁘다. 정말 이쁘다."
포장마차를 끝내기 전날 재료를 사면서 오늘을 위해 넉넉히 사두
었던 돼지불고기 파티를 준비하던 중 제부도 친구들이 무리 지어
"섭섭파티"를 해야 한다며 우리 집에 찾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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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강도 되고 자기들만의 쫑파티를 위해 '아빠와 딸'에 갔다가 오늘
부로 주인이 바뀌었다는 말을 전해 듣고 집으로 왔다며 자기들이
준비한 먹거리를 봉지에서 꺼내 문 앞에 쌓았다.
"아가씨~~꼼장어, 꽁치구이하고 홍합, 소주 좀 주세요!"
"'아빠와 딸' 은 문 닫았으니 돌아들 가세요!"
대문을 닫아걸고 그들이 들어오지 못하게 문을 막고 버텼다.
동생들이 뽀르르 달려와 애원의 표정으로 대문을 열어주자고 하
였지만 양 측의 장난스런 싱강이는 계속되었고 능글스러운 친구
들은 대문 앞에서 자리를 잡고 기어이 집에 들어오겠다는 심보들
같았다.
"얘들아!"
아빠가 오셨다.
아빠를 따라 그들이 대문을 들어서다가 김경백이 두 손을 하늘
을 가리는가? 했더니 곽방근이 입에 손가락 여덟개를 물고 깨무
는 시늉을 하며 뒤로 나자빠지는 시늉을 하고, 이용정과 성연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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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집을 잘못 찾았나?"하며 밖으로 나가는 이상한 행동을 하자
동생들이 일제히 "오빠!"하며 달려들어 그들의 손목을 잡아 끌었
지만 정작 나는 뒷 편에 서서 뚫어지게 나를 바라보고 있는 민우
만을 시선에 두고 있었고 그 또한 나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빠와 딸"을 하며 민우는 일주일이면 3-4일은 일이 마칠 때까
지 함께 있다가 리어카를 보관소까지 밀어주곤 했었지만 지난 달
민우의 엄마가 다녀 간 후로는 한 달 동안 그를 볼 수 없었다.
애써 '시험 때니까!'하고 체념도 했지만 고된 가운데도 하루하루
그를 기다리는 마음이 커가는 나를 느낄 수 있었고 그가 보고 싶
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민우 왔니?"
"왜 민우만 보이셔? 하루아침에 쥬리엣이 되더니 눈에 로미오만
보이시나? 우리도 있는데...."
친구들이 입을 삐죽이며 나와 민우를 둘러싸고 놀려 댔다.
"자~자 우리 돌쇠들아! 그 동안 리어카 밀어주랴~! 매상 올려주
랴 ~애들 썼다. 오늘은 아버지가 한방 쏜다."
"예! 아버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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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정답게 비명을 지르는 산 닭 한 마리를 손에 들고 있었다.
아버지 뒤를 따르는 이용정 외에 곽방근은 축하 한다며 케잌을,
성연동은 소주와 막걸리를, 김경백은 삼겹살이 잔뜩 들어 있는
봉지를 동생들과 내게 들이밀었고 마지막 대문을 통과하던 민
우는 품속에서 검붉은 장미 한 송이를 꺼내 얼굴을 붉히며 내
손에 넘겨주었다.
그들이 버티고 앉은 조그마한 안방마루에는 웃음소리가 넘쳐 흐
렀다. 학교 다니며 술만 배웠는지 9시를 넘기면서 벌써 소주 7병
째를 비우고 있었지만 도무지 일어날 기색이 없었다.
"이 집에 언니엄마가 있다며?"
"네"동생들이 시원스럽게 답했다.
"그럼 이 집에 장가들면 언니엄마를 어떻게 불러야 하냐?"
"야! 임마 그냥 '언니엄마' 하고 같이 부르면 되지.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않는데 김치국물부터 마시고 있네."
"그래도 그런 말은 없으니 장모! 아니 언니장모!"
"그런 말이 어디 있냐?"
"작은장모! 그게 족보를 따져서도 괜찮을 것 같은데......."
"'작은장모'가 좋겠다. 그런데 곽방근! 너 누구 찍어 둔 친구라도
있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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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이자식아 요즘 세상에 찍는다고 되냐? 또 찍히면 어쩔래?"
곽방근이 키득거리며 답했다.
"오빠들 안녕하세요?"
열시가 다 되어 은희가 돌아왔다. 고3때 본 은희의 1년 후 모습
은 내가 생각 해 보아도 무척 변해있었다. 갑작스럽게 19살의 은
희가 화제의 주인공이 되면서 분위기가 달구어져 밤 열시 반이
되어서도 그들의 대화는 끝이 날 기미가 없어 보였다.
"자! 그만들 일어나지. 너희들 종강 했다고 너무 무리해서 마셨어.
그리고 이젠 집으로 갈 때가 되었어."
아빠가 먼저 일어나셨다. 그 들이 돌아가자 남은 자리를 치우면서
은희와 은경이가 내 앞을 가로 막았다.
"언니! 우리들이 할께."
동생들은 정말 오랜만에 곱게 치장한 나의 오늘 하루만이라도 설
거지통에 젖은 손이 아닌 편하고 즐겁게 보내길 바라는 마음이었
던 같다.
문단속을 하고 잠자리에 들며 낮에 대문 앞에서 보았던 민우의 심
장에 꽂이는 듯한 날카로운 눈매가 떠올랐다. 노빈을 사랑한다고
생각했던 19살의 첫사랑에서 21살이 되어버린 나는 어느 새 민우
를 그리워하며 사랑하게 된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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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나이트에서 민우가 입술을 훔치던 날, 힘차게 무릎으로
아래를 차 버리자 얼굴을 찡그리며 어쩔줄 모르고 아파하던 생
각에 미소 짓다가, 생각지도 못한 정릉천변 사건으로 그의 머리
와 갈비뼈를 다치게 했던 일들, 병원에서 그가 나를 향해 부리던
어리광들, 병원에서 그는 시커멓게 멍든 눈과 찢어진 입술이 훈
장처럼 남아있던 내가 준비해준 야참을 너무 맛있게 먹곤 했다.
제부도 교회마루에서 잠든 나에게 다가와 담요를 덮어주며 아기
에게 남기듯 이마에 가볍게 전해지던 촉촉한 그이 입술에 너무
놀라면서 두 눈을 굳게 감고 바르르 떨었던 기억들도 생각났다.
"아빠와 딸"을 하던 어느 토요일 저녁 민우와 함께 바쁜 시간을
보내던 우리 앞에 당황스러운 일들도 생각났다.
"잘들 논다.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 사내놈이 겨우 이런 짓을 하고
있냐?"
"엄마! 웬일이세요?"
"이 녀석아! 머리, 갈비뼈에 금이 갔으면 되었지, 하루 이틀도 아
니고 은영이하고 살기라도 할 거냐? 매일 도서관에서 공부 한
다더니 이 곳이 그 도서관이냐? 그리고 은영아! 초등학교 동창
이니 친구처럼 친하게 지내는 것 은 나도 이해 할 수 있지만 너
와 민우는 여러 면에서 어울리지 않는 그런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니?“
82
화가 단단히 나 있던 민우 엄마는 분을 새기려는 듯 한참 동안 말
문을 닫고 고개 숙인 두 사람을 노려보다가 결론처럼 말을 이었다.
"학생은 공부하는 때가 있는 것이고, 또 상대를 서로 보아가며
사귀어야 하는 것이니 민우나 은영이, 잘 생각해 봐라."
그 날은 마침 아빠가 일 때문에 늦게 오신다고 연락을 받고 혼자
서 포장마차를 할 수 없는 일이었기에 민우에게 연락을 해서 도
움을 받던 날이었는데 어찌 보면 크게 잘못한 것이 없던 나였지만
지난 정릉천변 사건도 있고 해서 고개 한 번 들지 못하고 멍청히
서서 당하고 말았다.
"엄마! 왜 그러세요. 오늘 제가 자진해서 은영이 도우러 온 거예
요. 그리고 엄마 말씀이 너무 지나치세요."
더 이상 소란스러워져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 들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오늘 민우에게 도와 달라고 했었는데 앞으로
는 그런 일이 없겠습니다."
라고 절망적인 얼굴로 대답하던 그 날이 생각났다.
의사인 엄마와 교수인 아빠, 그런 집의 외동아들, 그렇지만 아직
은 그를 사랑하고 있다고 생각해 보지 않았고, 그와 미래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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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해 본적도 없었는데 내세울 것 없는 내 처지여서 이런 식
으로 무시되어도 되는 것인지를 되물으며 그 날 저녁은 정말 우울
한 시간을 보냈었다.
당분간 집안일을 하면서 아무런 생각을 하지 않기로 작정했
다. 아빠도 정상적인 직장생활을 하시기 시작했고, 공부에 큰 관
심이 없던 은경이가 고2가 되면서 집안 살림의 반을 맡아 주었기
에 아침과 오전을 예전과 같이 보냈고 "아빠와 딸"을 시작하면서
빨래와 청소는 각자가 하기로 되어 있어 은수를 은경이에게 맡기
는 오후 시간에는 여유가 있었다.
언제 자라나 싶던 막내가 이젠 네살박이 꼬마가 되었고 6명의 누
나들이 극진히 보살펴 주지만 은수는 언제나 불만투성 이었다.
예를 들자면 어린 녀석이 자기도 사내라고 누나들과 목욕탕을 가
지 않겠다고 버티면서 꼭 아빠만 따라 다녔고, 무슨 일이든 누나들
에게 항상 이기려 들던 고집불통 녀석에게 동화책을 읽어주던 어
느 날, 대문 두드리는 소리에 낮잠에 빠지려던 녀석이 눈을 번쩍
뜨고 "누나! 아빠야! 아빠."하면서 신이 나서 내 손을 붙잡고 대문
으로 달려갔다.
84
"누구세요?" 대답이 없었다.
"누구세요?"
"나~! 하노빈"
온 몸에서 힘이 다 빠져나가는 것 같아 주저앉고 싶었다. 콩당 거
리는 가슴으로 맞이한 자그마한 키에 군복을 입은 그가 그 곳에
있었지만 한동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잘 있었어? 키다리 아가씨?"
"응 여긴 웬 일이야?"
마치 모르는 사람 마냥 건성으로 답했다.
"나 오늘 휴가를 받고 이리로 달려 왔어."
"들어와 차라도 한잔 하고 가."
"아니 조금 있다가 다시 올께. 집에 아직 인사 못 드렸거든."
노빈이 웃음을 뒤로 한 채 몇 번이고 뒤돌아 손을 흔들며 자기
집으로 뛰어가는 모습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소식 한 번 없이 무심히 살다가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 저리도
좋을까?"
첫사랑의 그리움으로 애타게 찾던 그였는데 기다림에 지쳐 버렸는
지 아니면 삶에 지쳐 버렸는지, 오래 전에 내 곁을 떠나며 그가 남
겨 준 애틋함 같은 것은 남아 있지 않았다.
85
21살의 늦겨울을 맞으며 "하노빈"이 보름 동안 휴가를 맞아 내
곁에 나타났을 때를 맞추기라도 하듯 김경백, 이용정, 성연동이 3
학년을 마치며 군입대를 하였다.
그들이 짧게 자른 머리로 아빠께 인사를 하던 날, 아빠는 자식을
군에 보내 듯 슬퍼하셨고, 그런 아빠를 보며 "이젠 늙으셨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송별 삼겹살 파티가 끝나 갈 무렵 아빠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
"앞으로 너희들 모두 우리 집 출입을 삼가 해 주었으면 한다."
이별의 아쉬움을 달래는 자리였지만 친구들과 동생들이 긴장하며
아빠의 다음 말씀에 귀 기울였다.
"이젠 어린애들이라고 보기엔 다 큰 처녀들이 많은 우리 집이니
동네 사람들 이목도 있고 해서 내가 너희를 부를 때, 나와 같이
있는 시간에만 우리 집을 출입해 주었으면 한다. 이 말이다."
동생들이 아쉬워했지만 아빠 말씀이 지극히 옳으신 말씀이니 감
히 이견을 낼 수 없었고, 우리 집은 은수를 빼고는 생리를 하는
처녀들로 불미스러운 일은 사전에 방지 하자는 말씀이라는 것을
모를 리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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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병 계급장을 달고 왔던 노빈이 보름만에 휴가를 마치고 돌
아갔다. 열아홉 그 시절의 열병 같던 사랑이라는 감정은 이상하게
도 남아 있지 않았고, 만나는 날부터 그가 떠나기 전 날까지 우리
는 지난 이별과는 전혀 다른 이별을 준비 했었다.
"은영아! 별 일 없었지?"
"으~응. 너는 어디 아픈데 없었니?"
작은 키에 퍼진 몸으로 귀까지 새까맣게 타 버린, 말없이 내 곁을
따르던 노빈은 예전보다 더 경직된 사람처럼 보였고, 지난 일을
생각하면 쑥스러움에 고개를 들 수 없었지만 그 동안 담았던 마
음속의 말을 확인해야겠기에 담담한 투로 내가 먼저 말을 꺼냈다.
"넌! 어쩜 소식 한 번 전할 생각을 안 했니? 그냥 그렇게 내버리듯
사라지더니 무슨 낯으로 내 앞에 나타나는 거야?
난! 그 동안 솔직히 말해서 네가 너무 보고 싶다는 간절한 마음도
있었고, 너를 사랑한다고 생각도 해 봤어. 하지만 얼마 가지 않아
너무 쉽게 모든 것을 너에게 허락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어.
철이 없을 나이였지만 네 행동으로 내가 너무 큰 충격을 받았을
것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튼? 또 내가 그렇게 너에게 농락되어도
된다고 생각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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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자처럼 고정된 시선으로 감정 변화가 없는 노빈의 눈을 대하
며, 담담했지만 따지는 듯한 나의 시선을 피해 그저 피식 웃기만
할 뿐 이렇다 할 답변이 없는 그가 너무 밉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깨에 메고 다니던 가방으로 얄미워 보이는 그의 얼굴과 어깨를
향해 사정없이 휘둘러 두들겼지만 고개를 숙이고 한치 피함도 없
이 매를 맞는 그가 더 이상 보기 싫어, 한 걸음에 집으로 달려와
사납게 방문을 닫아 버렸다.
"다시는 만나지 말아야지! 나쁜 놈!"
그는 다음날에도 장을 보는 시간에 자기 집 앞에 서성이고 섰다
가 잠시도 곁을 안주는 내 주변을 맴돌았다. 그를 떼어버릴 요량
으로 공중전화에서 1시간이 넘게 상대 없는 통화도 해 보았고,
시장을 몇 바퀴 돌며 필요 이상으로 시간도 끌어 보았지만, 그는
철저히 무시당하면서도 언제나 내 주변에 서성일 뿐 말이 없었
다.
그러다가 시장바구니가 무거워지기라도 하면 군말 없이 빼앗아
들었고, 밉다는 감정 밖에 없던 나는 시장의 그 많은 사람 앞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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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를 꼬집어 비틀고 구박을 하며 소리를 질러댔지만 속내를 아는
지 모르는 지 사람들은 우리를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렇게 1주일째를 맞으며 시장 보러가는 시간되면 그를 기다리는
나를 느끼게 되었다.
"은영아!"
열흘만에 노빈이 처음 입을 열었다.
"난 너를 단 한 번도 잊은 적이 없어. 난 네 영혼까지도 사랑하고
있는 것 같아. 너를 향한 나의 마음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변함
이 없어. 다만 우리가 하나로 맺어지기까지 시간을 극복해야 하고,
부모님의 허락된 축복받는 결혼의 그날까지 너를 지켜 주어야 한다
고 생각 했지만 욕망이 앞선 나는 너를 갖고 싶다는 마음을 자제 할
수 없었고, 그런 모습이 네게 실망을 주게 될까 해서, 부담스러운 약
속을 하게 될까 해서, 연락을 하지 않은 것뿐이야."
"소설을 써라! 연락하는 것과 욕망이 무슨 관계니?"
말문이 터진 노빈과 나는 장을 보고 돌아오면서 1주일째 서로 아
꼈던 말들을 거침없이 쏟아냈지만 내가 피해자라는 생각이 들어서
인지 일방적으로 그를 몰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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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정말 이럴래?"
"내가 뭘? 내가 뭘 어쨌다고... 정말 웃기고 있어."
그의 억센 손아귀에 팔목이 잡히면서 그에게서 빠져 나오려는 작
은 다툼이 어둠이 내리기 시작한 인적이 뜸한 거리에서 있었다.
그는 어두운 골목으로 나를 끌고 들어갔고, 나의 의지와 관계없이
입술을 빼앗으며 벽으로 몸을 밀어 붙이고는 아랫배를 밀착시켜
왔다.
그와의 어설픈 키스로 병원에서 혼 줄이 났던 기억이 되살아나
입술을 앞니로 말아서 깨물고, 조그마한 키의 그가 쫓아 다지 못
하도록 고개를 높이 들었지만 그는 미친 듯이 나의 목덜미에 키스
를 퍼부으며 굳게 닫친 나의 입술을 공략하려 들었다.
나는 그의 짧은 스포츠머리를 이리저리 밀어대다가 급기야 그의
뺨을 세게 후려쳤다.
"나 갈래. 다시는 내 앞에 나서지마. 난 너를 다시 보고 싶지 않아 "
도망치 듯 골목길을 벗어나려 하자 어느새 그가 달려와 양팔을
붙잡아 세우고는 거칠게 흔들다가 한 번도 아닌 세번씩이나 뺨을
후려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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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태어나 민우와 함께 겪었던 잊고 싶은 순간을 제외하고는
두 번째 남자의 손바닥에 나의 뺨을 맞기며 마치 예견된 일인 양
두 눈을 부릅뜨고 때리는 그의 눈을 노려보았다.
"난! 조은영을 사랑한다!"
나의 팔을 붙들고 마구 흔들던 바보 같은 그는 그 한마디 말을
남겨두고 길옆에 쌓아 둔 연탄재를 발로 세차게 서너 번 차고
나서 주머니에 손을 찌른 채 등을 보이며 혼자 걸었다.
두 손으로 뺨을 부여잡고 멍청하게 그를 지켜보던 나는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끼며 주먹을 불끈 쥔 채 그에게 달려들어, 돌아
서는 그의 얼굴을 향해 있는 힘을 다해 주먹을 날렸다.
두 번째 주먹질에서 손목이 잡힌 나는 더 이상 어찌 할 수 없는
입장이 되어 버렸지만 그의 코에서 피가 흐르는 것을 보며 유쾌
하다는 생각을 했다. 일그러진 그의 얼굴을 할퀴듯 달려들며 잡
힌 두 팔을 대신하여 사정없이 발길질을 하는 것만으로도 그 동
안의 체증이 확 가시는 것 같았다.
갑작스런 공격에 일격을 당하여 코피가 흐르고 광기어린 발길질
에 깜짝 놀라 어쩔 줄 몰라 하던 노빈이 어느 새 나를 어깨에 둘
러 메고 엉덩이를 세차게 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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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안 놔! 안 내려 줄 꺼야?"
그의 등을 꼬집고 후려치며 소리를 질렀다.
"너는 정말 매 좀 맞아야겠다. 철썩~ 철썩~ "
악을 쓰고 매달려 있던 나는 순식간에 그의 허리춤을 물어 버리
면서 내 몸이 길바닥에 내동댕이쳐지는 것을 알았다.
"아야야~ 아야야~ 야 !"
비명을 지르던 노빈이 내동댕이쳐진 나를 사납게 타고 앉으며
두 손을 붙잡고 부르르 떨고 있었고, 나는 그 기세에 눌려 약간
움찔해 하다가 코피가 범벅된 심각한 그의 얼굴을 보며 웃음이
터져 나옴을 참을 수가 없었다.
"은영아! 나! 코피 나잖아!"
그의 손을 잡고 일어나 서로 등을 마주 한 채 주저앉았다.
별들이 있는 밤하늘에 조금 전에 있었던 만화 같은 일들을 생각
하며 낄낄대다가 장난스럽게 그의 옆구리를 팔굽으로 쳐 보았지
만 그는 고목처럼 반응이 없었다.
"너 앞으로 나를 사랑한다느니 그런 시시한 말 하지마! 사랑을
너 같이 하다가는 눈도 멀고, 귀도 멀고, 나중에는 벙어리 까지
될 거야. 분명히 해 두자! 나를 사랑 한다는 그딴 말하면 다시는
너를 만나지 않을 꺼야."
92
고목 같이 앉아 훌쩍이던 그가 아주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 난 너를 어려서부터 너무 좋아했어. 너는 몰랐겠지만 철
들기 전부터 언제나 너를 지켜보며 마음속에 담고 살았고, 동
창회에서 오랜 기다림 끝에 은영이 네 앞에 내 존재를 보여 주
었을 뿐이야.“
"뭐 좋아한다고? 그건 네 생각이야. 그날 밤 둘만의 시간 속에서
난 이렇게 마음속으로 다짐 했었어. ‘이 사람이라면 어떤 일이든
후회 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어쩌면 그렇게 하는 것이
너를 사랑하고 있다는 나의 진정한 마음과 육신을 너에게 전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었어.“
"카~ㄱ 퇴"
노빈이 코피가 섞인 가래를 멀리 뱉었다.
아직 코피가 나는지 오른손으로 코를 부여잡고 왼손으로는 나의
손을 꼬옥 잡으며 힘을 주었지만 서로 등을 마주하고 하늘의 별
을 세 듯 고개를 젖히고 이야기를 이어갔다.
“네가 그렇게 떠나간 후 남겨진 작은 추억들을 가슴에 담고, 사
랑이란 굴레에서 얼마나 많은 갈등을 했는지 몰라. 어쩌면 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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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힘들지 않았는지 모르지만 몇 달을 오로지 너 만을 생각
하던 나는 그리움에서 사랑으로, 다시 너에 대한 실망감과 배신감
으로, 마지막으로 너에 대한 원망을 가득 품은 채 세월 속에 너를
묻어 버리기로 결심을 했어.“
그 때까지 노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단지 등 뒤로 잡고 있는
양 손에 힘을 주며 가벼운 신음만을 내뱉고 있었다.
"그 때 민우가 제부도를 가자고 하더군. 제부도의 바닷길을 걸으
며 난 이렇게 생각했어. '노빈은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그가 그립다. 아니 그냥 그가 나를 좋아하지 않아도 된다. 그냥
나 혼자라도 좋아 할 수 없는 것일까?' 연락 한 번 없던 너였지만
간직할 수만 있다면 잿빛 바다에 뛰어 들고 싶다는 생각도 했었어.
혼자라는 것과 책임질 일이 없는 고요한 바닷가에서 생각들을 정
리하며 첫사랑을 가져 간 너를 원망하지 않기로 마음을 굳히면서
말이야.“
"은영이 너 민우를 좋아하니?"
"왜~? 좋아하면 안되니?"
"그런 것은 아니고 민우도 참 좋은 친구야. 이번 휴가를 나와서
한 번 만났었는데 민우가 그러더라. 은영이 네가 좋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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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투하니?"
"질투? 네 앞의 지금의 모습이라면 질투 할 처지인지 모르겠다."
그가 담배를 피워 무는 듯 싶었다.
하고픈 이야기들이 많은 것 같았는데 그날 나는 조용히 그의 말
을 들으며 그에게 품었던 서운함만으로는 그를 미워 할 수 없는
나를 발견해 갔다.
엄마가 돌아가신 일 외에 "아빠와 딸"을 하면서 오늘을 맞이하
게 된 일이며 노빈이 모르는 나머지 부분의 이야기는 그에게 말
하지 않았다. 군으로 돌아가야 할 그에게 부담스러운 내가 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 담담하게 그를 대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노빈에 대한 나의
감정은 이미 정리가 되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갑자기 그의 얼
굴이 보고 싶어 몸을 일으켜 세우고는 꼿꼿이 앉아 흔들림 하나
없는 노빈의 초라한 짧은 머리가 딱해 보여 더듬듯 쓰다듬다가
가벼운 입맞춤을 머리에 하고 가슴에 보듬어 안으며 작은 소리
로 말했다.
"노빈아! 나 갈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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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피 자국이 선명한 노빈의 지저분한 얼굴과 언 듯 비치는 그의
눈물자국을 뒤로 한 채 골목길을 나왔다.
그리고 며칠간은 그를 볼 수 없었다. 궁금했지만 이번 기회에 그
와는 친구로서 감정 정리를 해야 할 시기로 노빈을 나의 첫사랑
에서 놓아 줄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대문을 두드리는 그를 만난 것은 그가 휴가를 나온 지 2주째 되
는 날이었다. 그를 알고 나서 처음 보는 술에 취한 모습의 그가
슬픈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나지막이 말했다.
"나! 내일 귀대 한다."
대문을 사이에 두고 그는 뚫어지게 나를 바라보며 무엇인가를 말
하려 했지만 나는 그를 바라보고 싶지 않았다.
"조심해서 잘 다녀 와."
그의 두꺼운 손이 내 목을 감싸고 짧지만 강한 입맞춤을 순식간
에 남긴 노빈이 저만치 뛰어가는 것을 보다가 대문을 닫아걸고
등을 기대고선 나는 이유 모를 안타까움에 문틈사이로 그의 뒷
모습을 지켜보아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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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부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