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전한 사랑" 2부
2. 그리움
아침을 준비하기 위해서는 2개의 사발시계가 필요했다.
첫 번째 시계가 유난을 떨며 새벽 5시 반을 알리면 행여 은수가
깨어날까 잰 몸으로 일어나 19살의 몸에 어울리지 않는 두툼한
몸빼바지와 패딩잠바 차림으로 바깥기온이 아직은 차다고 느껴
지는 3월 하순경의 아침을 맞았다.
앞마당에서 크게 하품을 하고 우선 보일러실로 들어가 연탄불
을 살핀 후 동생들이 쓸 더운물을 확인하고 아침 준비를 했다.
도시락은 아빠, 은희와 중학생인 은경, 초등학생인 은애, 은미까
지 5개를 준비하면 되었고 10명의 가족이 먹을 쌀을 씻어 물에
불리면서 반찬으로는 가장 자신 있게 만들 수 있던 김치찌개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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된장찌개를 1주일이면 2번 정도 번갈아 준비 했다.
환자인 엄마를 위해 소고기를 갈아 넣은 야채죽을 별도로 준비
하고, 계란말이와 김치, 멸치볶음과 가끔 콩나물 무침, 오뎅을
볶아 도시락에 넣어 주었다.
두 번째 시계가 7시를 알리면 은희와 은경이를 먼저 깨워 동생들
을 깨우게 하고, 그 틈을 타 앞마당 세면대에 커다란 대야를 준
비해서 더운 김이 솟는 물을 양동이로 퍼 날랐다.
아빠를 포함해서 막내를 제외한 8명이 세면대와 화장실 사용에
북새통을 이루는 시간 동안, 나는 잽싸게 아침상을 준비해서 마
루에 차려 놓았다.
통상 7시 20분부터 시작하는 아침식사는 아빠가 첫 수저 드시는
것을 신호로 해서 전쟁과 같이 진행되었다. 가족이 많은 집의 식
사 풍경은 어디나 다 비슷하지만 맛있는 반찬에 젓가락이 집중
되고, 식사하면서도 대화는 거의 없이 오직 맛있는 반찬을 많이
먹기 위한 쟁탈전이 있을 뿐이었다.
식사가 끝나면 "잘 먹었습니다."는 외침과 함께 마루에 준비해둔
플라스틱 큰 통에 자기가 먹은 빈 그릇을 담아놓고 학교 갈 준비
들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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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나는 가족들의 식사를 끝낼 때까지 옆에서 시중을 들어야
했고, 아직 어린 은애, 은미, 은정이의 가방과 준비물을 챙겨 주고
나면 아빠와 은희를 시작으로 해서 일곱째 은정이가 마지막으로
집을 빠져나갔다.
소량의 야채 죽을 쑤어 엄마께 드리고, 마루 한 귀퉁이에 팽개쳐
버리듯 쌓여 있는 설거지 그릇과 밥상, 앞마당에 어지러이 널려
있는 세숫대야, 수건, 비누곽등 거의 난장판인 집안의 정리를 시
작하기에 앞서 빈 접시가 그득한 밥상에 앉아 늦은 아침을 은수
와 해결하곤 했다.
초등학교 1학년이던 은정이가 귀가하여 은수와 놀아주는 오후에는
동생들이 벗어 놓은 빨래를 앞마당 세면대에 앉아 빨래판을 둥근
대야에 담그고 방망이를 두드려 가며 빨래를 했고, 그 일이 끝나는
오후 3시쯤이면 6학년과 5학년이던 은애와 은미가 학교에서 돌아
와 방청소를 도와주었다.
그리고 나면 저녁 먹을 때까지는 약간의 여유가 있었는데 그 시
간을 이용해 은수를 동생들에게 맡기고 오후 너 댓 시가 되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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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을 보러 다녔다.
휴일이면 엄마와 자주 다녀온 경동시장을 돌며 10명의 식구들
이 먹어야 할 찬거리를 준비하면서 시장 아줌마들이 불러주는
"새댁"이라는 말에 처음에는 쑥스러움에 얼굴을 붉혔지만 시간
이 흐를수록 아무 생각 없이 살아가는 하루와 새댁이라는 호칭
에 길들여져 갔다.
4개월째를 맞던 6월말 소꿉친구인 수아의 전화를 받았다.
수아는 우리 동네에 함께 살고 있었다. 우리는 같은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졸업했고, 고등학교 동안 잠시 떨어져 있었을 뿐 같은
대학, 같은 과에 함께 입학 할 수 있었지만 휴학을 한 나와는 달
리 수아는 신나는 대학생활을 하고 있었다.
가끔 동네에서 숏커트 파머머리에 부라운 계통의 투피스 정장 또
는 T-셔츠에 청바지, 약간의 화장기 있는 얼굴에 상큼한 향내가
은근한 그녀를 만나면, 반가워 두 손을 잡고서 대수롭지 않게 수
다를 떨곤 했었지만 돌아서 걸으며 현실의 나 자신을 그리 행복
하다고 생각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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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구한 날 하루를 이렇게 보내야 하는 것인지?
의사선생님은 엄마가 앞으로 2~3년은 더 사신다고 했지만, 나
는 그 때만해도 엄마의 병은 꼭 낫는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엄마의 병환은 차도가 있어 보이질 않았고, 언제 끝날지
도 모르는 막막한 상태에서 19살의 나이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반복되는 일들을 웃으면서 받아드리기엔 너무 철없는 나이였다.
"은영아! 잘 지내니? 엄마 좀 어떠시니? "
"수아구나. 잘지내니?"
"내일 뭐해? 저녁에 시간 있어?"
"잘 알잖아. 왜 그러는데...?"
"스트레스 푸는데 좋을 것 같아 전화했어. 초등학교 동창회가 있
는데 한 번 나와서 기분 전환 하지 않을래?."
나는 생각해 보고 답을 주겠다는 말로 전화를 끊었다.
무엇하나 쉬운 일이 없이 꼬박 묶여 있는 살림살이에 하루가 다
르게 힘들어하시는 엄마를 곁에서 지켜보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차라리 내가 대신 아팠으면 하고 생각하던 때였다.
게다가 엄마는 약물치료를 시작하면서 병세가 급속히 악화 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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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라 볼 정도의 야윈 모습으로 머리카락까지 빠져서 흉한 모습이
되어갔으며, 급기야 머리를 빡빡 밀어버리기에 이르렀고 조금만
드셔도 바로 토하기가 다반사였다.
“엄마는 정말 2-3년 밖에 사시지 못하는 것일까?”
불과 몇 달 전만해도 우리 가족은 세상에 부러울 것이 하나도 없
었는데 오늘의 우리 집은 가족간에도 서먹하게 눈치를 살펴야하는
분위기가 되어 버렸다.
스스로 선택한 길이라지만 이 무거운 분위기와 현실 속에서 내가
동생들과 헤쳐 나가야 할 일들을 생각하면 하나하나가 정말 돌아
버릴 것만 같은 시간이었다.
"은수야! 우리 아빠 마중가자."
"얘들아! 은수하고 아빠 마중 갈 테니 숙제 해놓고 책가방은 다
싸 놓아라. 졸리면 언니가 볼 수 있도록 마루에 쌓아 두고 양치질
과 세수는 꼭 하고 자야 된다."
졸지에 "언니엄마"가 되어버린 나에게 다행히 동생들은 큰 불평
없이 따르면서 다들 조금은 긴장한 모습으로 생활을 하고 있었다.
은수와 안암천의 뚝방길로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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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살이 다 되어가는 은수는"엄마" 라는 말과 "맘마" "아빠" 라는
말을 하기 시작 할 때였지만 아무리 가르쳐 주어도 "누나" 라는
말을 하지 못해 그냥 엄마로 통하기로 했다.
올해 49살이신 나의 아빠! 어깨를 잔뜩 늘어뜨리고 뚝방길을 너
무도 느리게 휘적대며 힘없이 걸어오시는 아빠에게 달려가 괜히
이유도 없는 눈물을 흘리며 매달렸다.
"아빠~~ "
아빠는 아무 말씀 없이 그런 나를 조용히 안고서 내가 눈물을 거
둘 때까지 등을 두드려 주시다가 "은수야! 아빠 한테 오렴."하시
며 막내를 받아 안으셨다.
아빠의 팔짱을 깊게 끼고 조금은 진정된 마음으로 언제나 그랬냐
는 듯 버스정류장에서 15분 정도 거리의 집을 향해 뚝방길을 따라
걸었다.
"아빠!"
"응. 말해 보렴."
"수아에게서 전화 왔었어요. 내일 저녁에 초등학교 동창회가 있다
면서 바람 쐬러 나왔다가 가라고 해서 싫다고 했어요. 잘 했지요?“
"우리 은영이가 동창회에 가고 싶은 게로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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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에요. 전 그런 것에 관심 없어요."
"엄마도 그만 하시니 한 번 나가 보렴."
"아니에요. 엄마, 아빠, 동생들 저녁은 어떻게 하구요?"
"은희에게 내가 말 해 볼 테니 다녀오도록 해라."
다음 날 아침부터 부지런을 떨어 일을 마치고 은희에게 은수와
집안일을 맡기고는 7시에 동창회가 열린다는 신설동에 있던 "천
둥과 번개"라는 다방으로 갔다.
당시의 음악다방이 대부분 그랬듯 앞 사람의 얼굴을 겨우 알아
볼 수 있는 어두운 조명 아래 벽면에 있는 테이블들은 의자의 등받
이가 높아 자연스런 철옹성의 칸막이가 되어 있었고, 중앙의 30여
평 공간에는 여러 사람이 모여 이야기 할 수 있도록 등받이가 낮
은 의자들이 삥 둘러 놓여져 있었다.
콩 콩 뛰는 심장을 진정시키며 어둠의 공간으로 들어서는 순간
수아가 멀리서 손짓으로 나를 반겨 주는 것이 보였다.
"은영아! 여기..."
고교 졸업 후 처음으로 아니 난생 처음 아빠 아닌 다른 남자들을
만난다는 목적만으로도 얼굴이 붉어지는데 수아는 주위의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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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창과 이미 친한 사이인 듯 말을 놓고 자연스러운 이야기를 하
고 있었다.
"은영아! 얘들 기억나니? 내가 소개시켜 줄께. 앉아라."
내가 앉아야 할 테이블은 의자가 4개였고, 수아와 2명의 남동(남
자 동창)들이 함께 앉아 있었는데 마지막 의자에 내가 앉게 되었
다.
"인사해라. 이쪽은 외대 불문과 성민우, 성대 철학과 하노빈이고,
이 친구는 나하고 같은 학교, 같은 과인데 엄마가 편찮으셔서 집
안 일을 돌보려고 휴학하고 있는 조은영이야."
얇게 화장을 하고 미니스커트에 진녹색의 반팔 스웨터로 몸을
감싼 수아의 소개가 있었다.
"안녕하세요? 조은영 입니다."
얼떨결에 인사를 마친 나는 고개를 숙인 채 혹시 내 몸에서 냄새
라도 나면 어쩌나 노심초사하며 그저 청바지에 T 한 장을 걸친
내 모습이 수아에 비해 너무 초라해 보이지 않을지? 하는 생각
이 들어 소개 받은 사람들의 얼굴을 쳐다 볼 여력이 없었다.
싸이키 조명이라는 것이 빙글빙글 번쩍번쩍 돌아가며 굉음에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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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운 음악 속에 침침한 낯 설은 분위기는 차츰 시간이 지나면서
어둠과 같이 거쳐지기 시작했다.
동창이라고는 하지만 이성 간에 첫 만남의 남동들이 힐끔 힐끔
훔쳐보는 내 모습을 감추려고 고개를 숙인 채 두 손을 무릎에
모으고 보물이 쥐어 있는 것처럼 시선을 그곳에 고정하고 있었다.
수아와 민우, 노빈은 중학교 때부터 함께 과외공부를 한 사이였
고 나와 수아, 하노빈은 용두동, 성민우는 보문동에 살고 있다는
이야기를 고개 숙여 귀 동냥 하면서 이름을 알만한 하노빈의 얼
굴을 처음으로 바라 볼 수 있었다.
장발이 유행하는 때였지만 길지 않은 머리에 날카로운 눈매,
차분한 미소로 그리 크게 떠벌이지 않던 하노빈은 수아의 말에
간간이 동조를 하고 있었지만 왠지 서늘한 느낌을 전하는 것 같
은 그런 얼굴이었다.
우리 집에서 두 골목 아래 2층 양옥집이 저 친구 집이었다.
초등학교 3학년 다닐 때 엄마와 저 친구 엄마가 기성회간부여서
엄마와 그 집을 몇 번 가 본 일이 있었는데 학교 다닐 때 저 친구
는 나만 보면 쫓아다니며 괴롭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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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무줄 끊어 버리기, 고무풍선에 물을 넣어 벽에 던져서 풍선이
터지도록 해서 물벼락 맞게 하기, 학교 화장실에 볼 일을 보러
가면 어느 새 뒤로 와서 창문으로 물총 쏘기, 의자에 껌 붙여 놓
기....그 때 나는 이유 없이 괴롭히는 저 친구 때문에 학교에 가
지 않겠노라고 떼를 써서 결국 반을 바꾸었다.
이후로 하노빈은 그 짓궂은 장난을 멈추었지만 초등학교를 졸업
할 때까지 그의 따가운 시선이 언제나 내 곁을 맴돌았었다.
그런 하노빈이 내 앞에 앉아 있었다.
내게 눈 한 번 맞춤이 없는 등짝 넓은 듬직한 사내로 잘 생긴 듯
싶었지만 키가 자라다 만 것인지 좀 작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런 하노빈에게 수아는 무슨 말인지를 열심히 하고 있었고 간혹
그의 쓴 미소가 보이곤 했지만 내가 "하노빈"하고 말을 건네지
않았다면 결코 나를 보지 않을 심산인 사람 같았다.
"은영씨! 초등학교 3학년 그러니까 10살~ 음 그러니까 9년만이
네? 그 때도 참 예뻤었는데 오늘은 더 예뻐 보여. 나 알아 보겠
니?"
하노빈은 시키지도 않은 말을 준비 해 온 듯 쏟아내며 벌떡 일어나
그 크고 넙적한 손을 내밀며 악수를 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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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때부터 너를 무지 좋아 했었던 하노빈이다.잘 봐주라!"
얼떨결에 잡은 그의 손에서 저음의 목소리에 깔려 손끝에 전해
오는 전율이 전해졌다.
"아~우 하노빈! 목매 그리던 은영씨와 드디어 만나게 되는 역사
적인 순간이구나. 은영씨 나는 하노빈과 초등학교 4, 5, 6학년
중학교와 고교를 줄기차게 함께 다닌 하노빈의 단짝인 성민우! "
민우와도 그렇게 처음 손을 잡아 보았다.
"얘들 봐라! 질투 나서 못 봐 주겠네. 니들! 은영이 오기 전까지
내 눈치만 살피더니 그렇게 지조 없이 나를 잊어도 되냐?"
수아의 한마디에 순간 웃음으로 긴장들이 풀리며 우리는 오래 전
소꿉동무의 시절로 돌아가 편한 모습으로 시간을 보냈다.
밝은 조명과 함께 그 날 모임을 주관한 김건영의 사회로 동창회
가 결성되었고 이어서 어두운 조명으로 돌아가 그 날 참석 했던
친구들이 단체로 노래도 부르며 간단한 게임들을 했다.
열아홉의 많지 않은 나이에 모두들 웃고 신이 나서 즐기던 친구
들의 모습 속에서 다들 저렇게 밝게 웃으며 사는데 하는 소외된
심정이 되어 있던 나에게 몇 번이고 노빈과 민우가 디스코 춤을
추자고 권했지만 마음과는 달리 조용한 미소로 답하는 용기밖에
없었다.
행운권으로 남녀 한 쌍을 뽑아 선물을 주는 시간을 맞으면서 사
회를 맡은 김건영은 '그 날 뽑힌 커플은 현재 사귀는 사람이 있
으면 당장 끝내 버리고, 무조건 오늘 점 찍힌 이 사람만을 사랑
하고 결혼해야 한다.'는 운명적 계시를 담은 시간과 선물이라
며 입장권 추첨을 하였다.
"우선 여동의 당첨 번호는 168번 !"
여기저기서 자지러지는 비명이 들리고 장난스레 여동들이 마이크
앞으로 나가 자신이라고 하였지만 금새 거짓임이 들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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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크를 잡은 김건영이 마지막을 강조하며 "여동 옆에 있는 남
동들은 다시 한 번 가방, 핸드백, 주머니를 확실히 찾아보라."는
멘트 속에 손가방을 열어 본 순간 아무 생각 없이 넣어 둔 번호표
168번이 내 손가방 속에 들어 있음을 노빈이 발견 했다.
"당첨! 드디어 당첨! 됐습니다."
노빈의 손에 이끌려 마이크 앞으로 나서게 된 나에게 "노빈이와
어떤 사이냐?"고 김건영이 물고 늘어지며 "결국 오늘 헤어져야
하는데 남기고 싶은 말은? 깊은 관계였나요? 네~ 무척 깊은 관
계였다고 은영이가 고백했습니다." 건영의 개구쟁이 입심에 모
임은 웃음바다가 되었다.
"드디어 기다리던 남동의 당첨 번호는 294번!"
어두운 조명 아래 번호를 확인하던 동창들과 내 곁에서 낙심 되
어 번호표를 바라보는 노빈......운명은 그렇게 나에게 게시했던지
낯설지 않은 민우가 환하게 미소 지으며 당첨 번호를 들고 뛰쳐
나왔다.
"운명남군은 운명녀양을 영원히 사랑하겠습니까?"
"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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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녀양은 운명남군을 영원히 사랑하겠습니까?"
건영이 잽싸게 마이크를 걷어 들이며 "네~ 운명녀가 크게 '네'
라고 대답했습니다."라고 외쳤다.
우리 두 사람은 동창회장이 전해주는 선물을 받아 들고 사회자
의 강요에 못 이겨 내용을 공개해야 했는데 민우에게는 아기 기
저귀 한 뭉치와 콘돔 1박스를, 나에게는 흰 고무신 한 짝과 기초
화장품 한 세트가 들어 있었다.
"성민우"
키는 176cm정도 , 미남형의 얼굴에 맑고 깊은 눈을 가진 남자,
밝은 성격으로 주변을 즐겁게 해주는 카리스마를 겸비한 사람,
그런 생각을 하며 괜찮은 친구라는 생각도 잠시, 수아가 세 사
람 사이에 끼어들며 어색한 시간은 끝이 났다.
"민우야! 너 어릴 적부터 나만 좋아한다고 했잖아? 너! 그 새 은
영이와 눈이 맞으면 가만히 두지 않을 거야."
수아가 고양이 발톱 같이 손톱을 세우고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세 사람 사이에 끼어들었고, 노빈은 그저 히죽대며 웃고 있었다.
"응 생각해 봤는데 그 땐 내가 너무 어렸었나 봐. 수아 너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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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적 만남의 은영이가 더 좋아 지려는데 당연한 거지 웬~~~"
수아는 재빠른 동작으로 민우의 팔을 꼬집어 비틀었다.
"악~~ 살려 줘. 다시는 한 눈 안 팔께."
주변에 몰려있던 동창들과 함께 크게 웃었다..
민우가 선물로 받은 콘돔은 친구들에 의해 부풀려져 기다란 막대
로 만들어지고, 그 꽁지에 집게손가락 끝을 밀어 넣었다가 우리
들을 향해 쏘아서 보내거나, 개구쟁이 친구들은 한쪽 끝을 잡고
다가와 무자비하게 우리를 내려치는데 그 때를 기다렸다는 듯
디스크자키는 조명을 더욱 낮추며 볼륨을 높여갔다.
동창들은 민우와 내 주위로 모여들어 난장판이 된 듯한 분위기에
서 부풀려진 콘돔들을 터트리며 열광하기 시작했다.
실로 오랜만에 느껴 보는 해방감속에 그것들이 터질 때마다 나도
모르게 비명을 지르며 아무생각 없이 잠깐 동안이었지만 디스코의
굉음과 어둠, 난장판이 된 무리 속에 섞여 머리와 온 몸을 신나게
흔들었다.
생각지 못한 일이라는 듯 놀란 눈으로 함께 춤을 추고 있던 노빈
과 민우를 향해 입을 삐죽이며 어떨 때는 뒤로 돌아 엉덩이를 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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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었고, 그들의 품에 안길 듯 다가섰다가 혼비백산한 그들에게
혓바닥을 낼름 보이기도 하면서 신나는 시간을 가졌다.
저녁 10시!
아직 파티가 끝난 것은 아니었지만 아빠가 은수를 안고 기다리고
계실 것 같아 친구들 시선을 피해 서둘러 자리를 빠져 나왔다.
"아빠가 좋아하시는 고구마튀김을 사 가야지."
아빠는 고구마를 채 쳐서 기름에 아삭하게 튀겨 낸 것을 무척 좋
아 하셨고, 엄마는 붕어빵을 좋아 하셨다. 현실의 나로 돌아가며
집에서 기다리고 있을 아빠, 엄마, 동생들을 생각하며 고구마 채
튀김과 엄마의 단골 빵 집에 들러 붕어빵을 사 들었다.
"그냥 내가 살면서 하루쯤의 기쁜 날이었다."라고 단정 짓고 어
찌 생각해보면 차라리 이런 세상을 알지 못했던들 지금의 묘한
기분에 빠져 들지 않아도 될 텐데 하는 후회를 하면서 큰 길에서
꺾어들어 안암천변 길로 들어섰다.
당시만 해도 우리나라는 그리 잘 살지 못하던 때여서 가로등은
멀찍이 하나씩 서 있던 터라 불빛에 가까운 곳이 아니면 사람을
식별 할 수 없던 시절에 그저 밤에는 외출을 삼가 하는 것이 당
연하던 시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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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당시 가정에는 비상용 후레쉬와 초가 항상 준비 되어 있
었고 아빠와 은수도 후레쉬를 들고 나와서 기다리고 계실 것이
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당시 여자의 키로서는 몇 안 되는 아주 큰 키였었다.
키 170CM , 몸무게 52KG , 좋아하는 연예인과 옷 스타일은 윤
복희의 미니스커트... 미니스커트차림으로 거리에 나서면 지나
가던 사람들이 넋을 빼고 되돌아보는 날씬한 몸매와 미모를 갖
춘 19살의 순진하고 괜찮은 아가씨였다.
그날 밤 모임은 어둠과 다수의 힘을 빌려서인지 자신도 모르게 흔
들리던 어깨를 멈출 수 없는, 친구들과 디스코라도 한바탕 추고
싶어 하는 열아홉 소녀였음에도 나는 쑥스러움에 다리만 비비꼬고
앉아 내숭을 떨었다.
낯익은 디스코 음악과 어둠의 싸이키 조명, 그리고 신들린 듯 흔
들던 친구들의 모습을 보며 그들과 함께 섞이고 싶다는 마음과는
달리 왜 그리 자신이 없었던지...결국 내숭 아닌 내숭의 모습으로
달아올랐던 기운은 볼륨이 높여지고 어둠이 더욱 짙게 깔리던 마
지막 30분동안 유감없이 나의 몸을 빠져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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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다른 아이들에 비해 머리 하나는 더 컷던 내가 온 몸을 흔들
기 시작하자 친구들이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고 그럴수록 부풀려
진 콘돔 막대기 세례는 더 거세졌다.
뻥~ 그것이 터질 때마다 반은 놀라서 비명을 , 그 나머지 반은 참
았던 외침을 비명으로 내뱉으며, 장난스런 친구들 사이에 노빈과
민우가 나를 감싸듯 보호하고 있음을 볼 수 있었다.
타인으로부터 보호 받아야 한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행복한지는
남을 보호해야만 하는 운명을 가진 사람 입장에서 보면 더없이
신나는 일이었다.
고구마 튀김과 붕어빵 봉지를 하천변 울타리에 기대어 둔 체 두
눈을 감고 입안으로는 노래를 흥얼대며 조금 전까지 정신없이
춤추던 순간들을 회상하면서 가볍게 몸을 흔들었다.
감겨진 눈 안에는 그런대로 멋져보이던 민우와 노빈이 함께 몸을
흔들고 있었고 주변은 우리 세 사람 외에 어둠의 구석으로 아무 것
도 보이질 않았다.
내게도 그런 열정이 있었던지 아니면 숨었던 자아가 고개를 들
었는지, 계단을 헛디딘 노빈의 커다란 손이 가슴에 와 닿던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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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며, 민우가 시상대에 오르며 내 손을 잡아 줄때 온 몸이 떨렸
던 일들을 생각해 내고는 새삼 가슴이 심하게 콩닥거림을 느낄
수 있었다.
"은영아! 괜찮니?"
땀에 흠뻑 젖어 나무에 기대어 서있던 내게 사내의 굵은 목소리와
함께 야릇한 얼굴로 나를 지켜보며 다가오는 그가 하노빈 임을 알
게 된 나는 마치 그에게 보고 싶어 하는 마음을 들켜 버린 것 같은
생각이 들어 부끄러움에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도망치듯 집을
향해 쉼 없이 달렸다.
그가 뒤에서 뭐라고 나를 부르고 있었지만 그 순간 그를 대하고
싶지 않았기에 아무 생각 없이 집으로 내달렸고 아빠를 만날 즈
음 숨이 턱에 차 있었다.
우리 부녀를 향해 달려오는 시커먼 물체에 아빠가 후레쉬를 비
추자 하노빈의 당황한 얼굴이 나타났다.
"뭐하는 젊은이 인가? 야심한 시각에 동네 처녀 뒤나 밟고....."
"어~~저 그게 아니고 저는 저 아래 사는 하노빈이라고 하는데요,
은영이와는 초등학교 동창이고, 오늘 우연히 집에 가다가 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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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보았는데, 과자봉지를 놓고 막 달아나기에 이 걸 전해 주려
고 뛰어 왔습니다." 하며 과자봉지를 내밀었다.
"그 말이 사실이냐?"
과자봉지까지 가져올 정도면 처음부터 나를 지켜보고 있었을 그
에게 보이고 싶지 않은 비밀을 들켜 버린 듯한 나는 "왜 이다지
하노빈과는 악연인가?"라고 반문하며 "네 아빠! 누가 따라오는
것 같아 막 뛰어 왔어요,"라고 대답하고 그가 가져 온 봉지를 빼
앗듯이 낙아 챈 후 아빠의 팔짱을 끼고서 집을 향해 걸었다.
열 시가 조금 넘은 시각이었지만 엄마를 비롯해 동생들이 나를
반갑게 맞이하면서 고구마튀김과 붕어빵으로 잠자리 간식을 먹
었다. 호기심 많은 동생들은 남녀가 모이는 동창회, 미팅이란 것
이 궁금해서 잠시도 나를 가만히 놓아두질 않았다.
"언니! 파트너는 어떻게 정하는 건데?"
"언니파트너는 괜찮았어?"
"또 만나기로 한 거야?"
"어떤 춤을 추어야 하는 거야?
사춘기 아이들이 질문 할 수 있는 이야기들이 쏟아져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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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가 태어나 처음으로 남정네들을 만나고 왔으니 피곤하겠
다. 아무튼 여자는 행동을 잘해야 시집을 잘 갈 수 있단다.
은영이 어서 가서 씻고 자거라."
위기의 순간 엄마 말씀이 약효를 발휘해서 가족들을 뒤로 하고
방으로 돌아 왔다. 잠시만이라도 혼자 있어야 된다는 생각에서
였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어서 몸을 씻고 잠들고 싶어 이불 속
으로 들어가 잠을 청하면서도 "하노빈"이 능글스럽게 바라보는
것 같아 이불을 뒤집어 쓴 채 잠을 청했다.
반복된 생활의 계속이었다. 아침에 일어나 밥과 반찬을 만
들고, 도시락을 싸고, 연탄불을 갈고 나면 앞마당 가운데 더운물
을 길어다가 아빠와 동생들이 씻을 수 있도록 준비를 해 주어야
했고, 안방 마루에 밥상을 차려 놓으면 아침의 바쁜 일은 대충 끝
이 났다.
계속해서 부지런히 도시락을 주~ㄱ 마루에 늘어놓으면 아침식
사를 마친 아빠와 동생들이 각자의 도시락을 챙겨 등굣길을 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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촉했고, 마루 한 곁에 덩그라니 쌓여 있는 설거지통! 그 때부터
엄마와 은수 그리고 내가 식사를 할 차례였다.
식사가 끝나면 엄마가 은수를 돌봐 주시는 동안 불이 나게 설거
지를 해서 광주리에 그릇들을 엎어 놓고 크고 작은 동생들의 빨
래를 하며 박자도 안 맞는 노래에 장단을 맞춰 방망이를 두렸다.
스스로 선택한 길이라며 긍정적인 생각을 가지려고 노력하면서도
그 땐 아직 어려서인지 괜한 슬픔과 심통이 항상 가슴 가득하여
당장이라도 터질 것만 같은 그런 날들이었다.
하지만 불쌍한 아빠에게 투정할 입장은 아니었고, 환자인 엄마에
겐 더더욱 불평을 할 수 없는 처지에, 어린 동생들에게 퍼 부을 수
도 없는 노릇이고 보면 나 홀로 삭여야 하는 절망에 가까운 슬픔을
해결할 방법이 없었다.
그렇게 1년의 세월을 보내고 1976년 새 해를 맞을 즈음 그 정도
의 시간이면 엄마가 건강을 되찾아 우리 가족이 행복해 지리라는
소박한 희망은 현실 앞에 무너져 가고 있었고 엄마의 경과는 더욱
좋아지질 않아 이제는 화장실 출입마저 힘든 지경이 되었다.
학교 복학이 불가능하다는 결론이 나면서 이렇게 살아서는 안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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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고 마음속으로 비명을 지르며 몸부림 쳤지만 아빠를 비롯한
가족 누구를 보더라도 어찌 할 수 없는 것이 더욱 나를 힘들게
했는지도 모른다.
설거지를 하다가도, 빨래를 하다가도 괜스레 한 숨이 나오고 쿡
~하고 쏟아져 흐르는 눈물이 터지기라도 하는 날이면 방구석에
쳐 박혀 콧물과 눈물이 범벅되어 수건을 적시곤 했다.
"아줌마 이거 얼마에요? 너무 비싸다. 조금씩도 팔아요?"
당시 나에게 유일한 숨통은 집과 가족으로부터 해방되는 저녁
시간 장보기였다. 사람들과 우울하지 않은 이야기로 흥정을
하며 서로 인사하는 재미에 빠져 웃을 일이 생기는 시간이기도
했다.
콩나물국을 끓일 콩나물과 두부 ,도시락 찬으로 연뿌리를 조금
사고 멸치와 어묵을 사면서 오랜만에 온 가족이 삼겹살 파티라
도 해야겠다 싶어 배삼겹으로 3근을 사고 상추와 깻잎을 챙겼다.
"뭐니 뭐니 해도 고기는 숯불에 구워야 제 맛이니까"하는 생각에
참숯 2봉지를 종이봉지에 담고서 넘쳐나는 장바구니를 힘겹게
들고 집으로 향하며 동생들이 모처럼 즐거워하는 모습이 보이는
듯 해 기분 좋은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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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도 그럴 것이 그 날은 얼마 전 아빠가 새로 사 주셨던 높은 굽
의 구두와 얕은 녹색 나팔바지에 자킷을 입었던 나에게 거리의
시선이 집중 되는 것을 느끼던 날이었고, 남자들의 머리 돌아가
는 눈길에 얇은 미소로 답하면서 야릇한 흥분에 싸여 콧노래가
나올 지경으로 행복 했었다.
고상한 척 고개를 높이 들고 허리를 꼿꼿이 편 채 미소와 여유를
즐기던 그 날은 평소보다 늦은 시간에 집으로 향하게 되면서 시
장의 혼잡한 거리를 벗어날 때까지 사람들의 시선에 싸여 힘든
줄 몰랐지만, 해가 기울고 기온이 내려가면서 한 겨울 매서운
찬바람에 장바구니를 든 손가락이 얼어 버린 듯 감각이 없어지기
시작하면서 기쁨은 비지땀으로 걱정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설상가상 얼음판에서 미끄러져 나뒹굴게 되면서 당시 유행하던
7cm 정도의 왼쪽 구두굽이 사정없이 부러져 버리는 일을 당하는
날이기도 했다.
유쾌한 기분은 한 순간에 사라지고, 창피스러움에 곤혹스러워 했
지만 오가는 사람들은 도와줄 생각은 아예 없는 듯 그저 바라보
며 재미있어 하는 바람에 서둘러 일어나 흙먼지를 털고는 높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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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다른 구두를 신고 희한한 걸음걸이가 되어, 장바구니와 봉지
들을 품에 안은 채 서둘러 겨울 길을 걸어야 했는데 그런 모습으
로 집까지 가야 한다고 생각하니 엄두가 나질 않았다.
"아가씨! 좀 도와줄까?"
등 뒤에서의 낯 선 사내 음성에 놀라 돌아 본 그 곳에는 얼마 전
동창회에서 만났던 노빈과 민우가 팔짱을 낀 채 거짓처럼 우뚝
서 있었다.
"은영아! 너 많이 보고 싶었어. 나 좀 만나 주면 이런 일이 없었
을 텐데... 그래 다친 곳은 없니?"
노빈은 대꾸 할 틈도 없이 품고 있던 장바구니와 봉지를 내게서
빼앗아 곁에 웃고 서 있던 민우에게 떠 안겼다. 민우는 황당한
표정으로 받지 않으려 했지만 노빈은 민우의 의사와 관계없이
던지듯 장바구니와 봉지를 맡기고는 나의 왼손을 잡아 주었다.
왼손으로 노빈의 어깨를 집고 왼발은 뒷꿈치를 들어 몸에 균형을
유지하며 어정쩡한 모습으로 거리를 걷기 시작하자 말없이 지켜
보던 민우가 드디어 잔소리를 하기 시작했다.
"잘들 놀고 있네. 이 자식은 꼭 내가 하려고 마음먹은 일만 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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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서 선수를 친단 말야. 은영아! 우리는 이미 동창회에서 짝을
맺어 준 운명남, 운명녀라는 것 잊지 않았지?"
그러면서 민우는 가지고 있던 짐들을 노빈의 가슴에 쏟아 붓고는
내 앞에 덥썩 쪼그리고 앉아 "자! 내게 업혀"하고 소리쳤다.
두 친구 사이에는 작은 몸싸움이 일어났고 잠시 동안 난처함에
빠졌던 나는 그들과 함께 주변을 의식하지 않은 채 크게 웃고
있었다.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자기에게 관심을 가져 주는 일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는 것인데 그들의 싸우는 모습을 정릉천변 다리 난간에
기대어 서서 행복인지 모를 희열에 빠져서 즐기다가 결국 "가위
바위 보"로 결론을 내기로 하면서 한 번은 아쉽다며 세 번중 두
번을 이기는 사람을 승자로 하자고 결정을 했다.
그 일이 있은 후 찌그러진 인상에 책가방 둘, 장바구니 하나, 큼
직한 종이봉지 하나를 둘러메고 두 사람의 대화에서 뚝 떨어져
민우가 따르고 있었다.
2월의 저녁시간은 그 새 어둠으로 우리를 감싸고 노빈의 어깨를
빌린 걸음걸이가 시원치 않게 되자 내 의사와 관계없이 나 보다
키가 작던 노빈이 나를 둘러업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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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뭐야~~ 싫어. 나! 내려 줘~~ 얼릉~~"
발버둥을 쳤지만 이해 할 수 없는 야릇한 흥분이 느껴졌다.
"하노빈"
이름만큼이나 아름다운 친구였다. 초등학교 때에 개구쟁이기는
했지만 열아홉의 나이에 그를 만나 받은 느낌은 남을 깊이 사랑
할 줄 알고, 배려 할 줄 아는 사람이며, 긴속눈썹 속에 검은 눈동
자가 유난히도 커서 바라보는 사람이 금새라도 빨려 들어갈 듯한
슬픈 눈을 가진 그였다.
내려 달라던 발버둥도 잠시 그의 등판에서 코끝에 전해오는 비릿
한 남자냄새와 약간의 머리냄새, 그리고 허벅지를 감싸 안은 그
의 커다란 손이 가슴을 설레이게 했고, 걸음을 옮길 때마다 가슴
을 압박해오던 그의 넓은 등짝은 작은 흥분으로 나를 떨게 했다.
"은영아! 너를 꼭 다시 만나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어. 오늘 우
연히 버스 안에서 너를 발견하고 저 아래 정거장에서 내려 민우
와 여기까지 뛰어오면서 얼마나 기뻤는지 몰라.
막상 네 이름을 부르려 하다가 마냥 행복해 보이는 너의 모습을
깨기 싫어 조용히 뒤따르고 있었는데 불행인지 다행인지 하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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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버리지 않아 네가 눈길에 멋지게 나 뒹굴더라. 그래서 내
가 이 순간 은영이를 업고 있게 되었다 이런 말씀이지."
말을 끝내고 노빈이 조용히 웃었다.
"고마워! 그런데 누가 보면 어쩌지?"
"여기는 아직 동네에서 먼 곳이니 가까워지면 걸어 들어가자."
민우와 쌍둥이 마냥 똑 같은 머리모양에 165cm 작은 키의 이
목구비가 또렷한 준수하게 생긴 한 청년!
갑자기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잠재의식적으로 나를 괴롭히던
하노빈을 좋아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철없는 생각
이 들었다.
"이런 제기랄 누구는 포터하고 누구는 재미 보냐? 그리고 왠 걸
음 이 그렇게 소걸음인 거야? 야 임마! 교대 좀 하자."
투덜대는 민우에게 노빈이가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자식이! 진놈은 말이 없어야 하는 거야. 임마!"
갑자기 노빈이 가던 길의 반대 방향으로 나를 업고 뛰기 시작
했다.
나도 놀랐지만 신발이 노빈의 손에 쥐어 진 상태라 어쩔 수 없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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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민우는 놀란 눈으로 우리를 쳐다보다가 드디어 그 많은 짐을
머리로 치켜들고 쫓아오며 외쳤다.
"저놈이 내 색시 훔쳐 간다! 저놈이 내 색시 업어 간다!"
민우의 외침이 가늘게 들릴 때까지 달려갈 즈음 하늘은 참았던
함박눈으로 우리를 감싸기 시작했고, 어느 새 우리는 함박눈에
갇혀 버린 작은 공간 속에 함께 숨쉬고 있었다.
"은영아! 난 네가 좋아! 동창회 이후 너를 잠시도 잊은 적이 없
어. 초등학교 시절부터 아니 아주 먼 옛날 전생에서부터 널 좋
아 했던 것 같아."
난생 처음 남자등에 업혀 그로부터 사랑 고백을 듣는다는 것이
우스운 일이었지만, 이 남자는 나에게 이 말을 하려고 벌써 정릉
천 다리를 몇 차례나 왔다 갔다 하면서 집으로 보내 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노빈아! 나를 업고 좀 뛰어 볼래?"
노빈은 대답 대신 눈이 쌓여 가는 거리를 말없이 뛰기 시작했고,
그 때까지 정릉천 다리를 왕복하는 두 사람의 데이트를 우거지상
으로 오돌오돌 떨면서 다리 난간에서 시계추 마냥 지켜보던 민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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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담뱃불을 거칠게 다리 아래로 던지며 큰 소리로 외치면서 뒤를 쫓
아 뛰었다.
"저놈이 내 색시 업어 간다."
안암천 다리가 보일 무렵 우린 점잖은 친구들로 돌아와 있었다.
노빈과 민우가 양 옆에서 나를 부축해 집 앞까지 갈수 있도록 도와
주고 있었고 돌아서는 그들을 붙잡고 싶음이 나의 진실이었지만
"고마왔어"라는 말 밖에는 달리 표현 방법이 없었다.
"야! 조은영! 근 한 시간 동안 니들 재미 보는 동안 눈을 맞으며
기다려 준 이 운명남에게 커피 한잔도 대접 안하고 가라고 하기
냐?"
"야! 임마! 오늘 네가 져서 그런 것을 왜 은영이를 탓 하냐?"
두 친구가 언성을 높이며 문 앞에서 다툼을 벌리는 동안 대문이
열리며 동생들이 문 밖으로 밀려 쓰러졌다.
"이게 무슨 일이야?" 민우가 소리 쳤다.
"으 ~ㅇ 얘들은 내 동생들이야. 우리 집은 1남 7녀 거든. 얘들아!
언니 친구들이야 인사들 해라."
"안녕하세요. 오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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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웬 소란이냐?" 아빠가 나오셨다.
그 날의 이야기를 들으시고 지난번 뚝방길에서 노빈과의 만남을
기억하신 아빠는 두 사람을 집안으로 불러 들이셨다.
노빈과 민우를 가운데 두고 엄마를 제외한 8명의 가족이 그들을
에워싸고, 어쩔 줄 몰라 하며 당황해 하는 그들에게 셋째가 커피
를 대접했다.
"기왕 들어 왔으니 저녁이나 먹고 가거라."
왠지 흐믓해 하시는 아빠의 말씀을 듣고 장을 보아 온 삼겹살로
파티를 하기로 하면서 능청스럽게 노빈과 민우가 숯불을 피운다
며 어색한 자리를 빠져 나와서는 마당 가운데서 불을 피우고 있었
고, 어린 동생들은 이 사내 친구들이 신기하여 그 주변으로 모여
그들의 한 동작 한 동작을 재미있게 바라보았다.
숯불에 구워진 삼겹살과 낮은 음성의 목소리가 집안을 채우며 오
랜만에 여자들만 가득한 우리 집에 웃음꽃이 피었다. 그 자리에서
뻔뻔한 노빈과 민우는 아빠께 "은영이와 사귈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하며 너스레들을 떨었다.
"그것은 말이다. 너희들 노력과 의지에 딸린 것 아니겠니? 동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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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니 친구로서야 문제 될 것이 없고, 배우자로 상대를 대 할 때
는 서로 신중하게 결정을 해야 한다. 허허~ 벌써 은영이가 이런
나이가 되었나? 허허허허"
그 날 아빠는 전에 없이 그 친구들과 과음을 하셨다. 짐작컨대 이
사내 친구들을 보시며 여자만 가득한 집안에 듬직한 남자들의 걸
스러운 목소리와 웃음소리, 그리고 둘째인 내가 이젠 시집가야 할
나이가 되었다는 것이 아빠를 기쁘게 혹은 허전하게 느끼시도록
해 드렸던 모양이다.
집안에는 생기로 가득 했지만 저녁때부터 내린 눈은 쉽게 멈출
것 같지 않았다. 저녁상을 치우고 동생들의 잠자리를 봐주고는
자정이 다되어 내 방으로 들어왔다.
어두운 그림자가 가득한 집안에서 아빠 엄마 동생들 그리고 무엇
보다도 잠시 동안 내가 젊은이로써 살아 있음을 느꼈던 오늘 하
루! 이런 것이 행복이란 것일까? 하는 생각을 했었다.
방안에는 편안한 모습으로 은수가 잠들어 있었고 행여 잠이 깰까
조심스럽게 의자가 없는 낮은 책상의 스텐드를 찾아 빨간 꼬마전
구에 불이 들어오도록 했다.
노빈에게 업혀 다녔던 저녁시간이 자꾸 아른거려 그의 체취가 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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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듯한 옷을 벗어 냄새도 맡아보고 얼굴에 비벼도 보았다. 갓 스
물이던 내게 이성에 대한 호기심이 없다면 거짓이겠고 나도 남들
처럼 가슴에 뺏지를 달고 그들과 함께 어우러져 미팅도 해보고
마음에 드는 남자친구를 사귀고 싶었으며, 영화구경 가서 손도
잡아 보고 골목길에 숨어 도둑 키스도 해 보고 싶은 그런 나이
였다.
초등학교 때부터 좋아 했노라며 사귀어 보자는 그 말을 하기가
어려워 나를 업고 왔던 길을 몇 번이고 오갔던 노빈과 그 등에 업
혀 현실의 내 처지를 잠시라도 잊고 있었던 나!
누군가에게 "당신을 좋아 하노라"하는 고백을 듣는 것은 여자로
태어난 의미를 주는 것 같기도 했고, 그 한마디에 심장이 멈추고
오금이 저려 옴을 느끼며 나도 모르게 그의 목을 꼭 껴안았던 것
같았는데 노빈은 그 느낌을 알아 차렸을까?
"잘들 논다. 잘들 놀아. 운명적 남녀가 약혼식을 이미 하였거늘
시퍼런 초저녁에 년 놈들이 잘들 논다. 에이 더럽다 ! 에~퇴퇴
퇴 ~ "
정능천 다리난간에서 가방과 짐을 잔뜩 들고 우리를 지켜보던
민우의 곱지 않은 눈도 너무 재미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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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들 큰길가에서 그것도 머리에 피도 마르지 않은 것들이 도대
체 무슨 짓들이냐? 은영아! 우메메 동네사람이 지금의 네 모
습을 보면 너는 시집은 다 갔다."
민우는 처음에 노빈과 내가 다리를 장난삼아 왕복하는 것을 알고
두 번째까지는 잘 참고 따라다녔으나 세 번 네 번째로 계속되자
다리 중앙에 아예 짐을 풀고 팔짱을 낀 채 우리 두 사람을 따라
고개만 돌려가며 "인생을 가른 가위 바위 보"라는 둥 "꿈자리가
사나와 못 볼 걸 본다는 둥" 그러다가 열이 나는지 다리 아래로
시선을 돌리고는 담배를 피워 물고 나오지도 않는 가래침을 힘
껏 뱉었다.
허벅지였지만 아빠말고는 처음 남자에게 몸을 허락한 그날이었다.
"빨리 말해. 사귄다고~~ 빨리~~안 그러면 계속 집까지 업고 뛰
어 가 버릴 꺼다.."
노빈이 우리 동네를 향해 뛰면서 내게 말했다.
"야! 임마! 가면 간다고 해야지. 야 이놈아!"
짐을 든 민우도 함께 뛰었다.
노빈의 등에 실린 가슴이 쉴 새 없이 출렁거렸고 나는 필사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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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빈의 목을 끌어안았지만 끝내 노빈과 나는 눈이 쌓여가는 거리
에서 보기 좋게 나뒹굴게 되면서 본의 아니게 그를 밑으로 깔고
내가 그 위를 덮치면서 그의 뒷머리를 받아 버려 동시에 두 사람은
비명을 지르며 머리를 감싸 쥐었고, 그나마 가로수를 한 번 더 힘껏
머리로 받아 버린 노빈의 이마 윗 쪽에서 붉은 피가 흘러 내렸다.
7녀 1남의 집에서 자라난 나는 살면서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 중에
피를 흘리는 모습은 그 날 처음 보는 일이었다.
미간사이로 붉은 피를 흘리는 그의 머리를 엉겁결에 안아 무릎 위
에 누이고 손수건으로 상처를 닦고는 피가 솟구치는 작은 부위를
찾아 손수건을 대고 힘껏 눌렀다.
그런 나를 다 풀린 눈으로 바라보던 그는 두 눈을 감으며 "은영아!
너무 오래 기다렸어. 앞으로도 나는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어.
난! 참을 수 없이 네가 좋아!"하며 노빈이 독백하듯 속삭였지만 그
런 그에게 나는 곱지 않은 눈을 흘기며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이
나질 않았다.
"자식! 너! 똥 폼 잡을 때 형님이 다 알아 봤다. 얼렐레 이마에서
멘스까지 하시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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헐레벌떡 달려 온 민우가 걱정스러워 하면서도 낄낄대며 근처
약국으로 달려가 지혈제와 붕대를 사다가 이마에 큼지막하게
붕대와 반창고를 붙여 주었다.
그 모습으로 우리 집에서 저녁을 함께 먹게 되었던 날이었다.
자꾸 가슴이 뛰고 웃음이 나오는 것을 참으며, 바지를 벗어 내리
다가 시퍼렇게 멍 든 무릎을 쓰다듬어 보기도 하고, 샤츠를 벗다
가 어깨에 멍든 부분이 속상해 어루만지면서 브레지어와 펜티만
을 걸친 거울 속에 풍만하고 탄력 있는 여인의 흥분된 모습을 읽
어 내려갔다.
갸름한 눈썹과 눈매, 작은 쪽박귀와 오똑한 코, 아랫 입술이 약간
도톰한 작은 입술, 목선을 타고 흐르면 몸매에 비해 가냘픈 어깨
가 나오고, 어깨 밑으로 길고 연약해 보이는 팔이 있었다.
나이에 비해 풍만한 가슴이 B컵 브레지어를 꽉 채워 솟아올랐고
그것을 두 손으로 받아 올리면 우유 빛 작은 언덕이 부드러운 엉
덩이처럼 선을 이루고 있었으며 내가 보아도 한 입에 넣고 싶은
가슴살이 터질 듯이 꿈틀거리는 것처럼 보였다.
살포시 브레지어를 위로 들어 올리면 그 곳에는 선분홍 유두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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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선코 같은 탄력 있는 가슴이 있었다. 하지만 두 손으로 가슴을
살포시 치켜 올릴 때 달아오르는 얼굴의 뜨거움으로 거울을 끝
까지 쳐다 볼 수 없었다.
두 손은 가슴에서 잘록한 허리와 배꼽사이를 간지럽히며 숨어서
즐기듯 더듬어 나가다가 두 눈을 감으며 어느 새 주체 할 수 없는
충격에 빠졌고, 그의 큼직한 두 손이 다았던 허벅지에 이르러서는
전신에 경련이 일어나며 온 몸이 비틀렸다.
"엄마! 엄마! 쉬이~"
두 눈을 비비며 은수가 소변이 마렵다며 잠을 깼다.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고 다리가 후들거렸지만 재빠르게 잠옷
을 걸치고 은수가 소변을 볼 수 있도록 해주면서 창피한 생각이
들어 이불을 머리까지 뒤집어쓰고도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았다.
겉옷을 껴입고 어둠과 고요만이 가득한 자정이 넘은 시각에 마
당으로 나와 손이 시리도록 차가운 깊고 하얀 밤의 싸늘함에 부
르르 떨었다.
사는 것이 너무 재미없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이렇게 사는 것
이 내가 꿈꿔왔던 인생이 아닌데 싶다가도 아빠와 엄마 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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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생들을 떠 올리며 배부른 투정이다 싶어 얼른 두 손으로 눈과
귀를 막아 버렸다.
술에 취한 기분이 되보고 싶다는 생각에 냉장고에서 소주를 꺼
내 병 채로 물을 마시듯 반병을 순식간에 입속으로 털어 넣자
목구멍에서 쓴 물이 올라오며 토 할 것만 같았지만, 잠깐 동안에
온 몸이 달아 옴을 느꼈다.
팔짱을 끼고 어둠만이 가득한 하늘을 보다가 또다시 두 눈을
감고 눈 쌓인 마당을 맴돌면서 괜한 눈물이 났지만 해답 없는
현실을 비켜 갈 방법이 없다는 점에서 절망 아닌 절망에 힘들어
했다.
"치~익"
성냥불을 그어 민우가 놓고 간 것으로 보이는 담배를 피워 물
며 남들 하는 폼대로 난생처음 연기를 쭈~욱 들이마셨다.
"케~케~켁 켁 켁“
오기가 나서 몇 번이고 다시 해 보았지만 결과는 같았다.
"은영이니?"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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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늦었다. 그만 들어가 자거라."
뭐하느냐고 물으시고 답변을 해 드려야 했지만 아빠나 나나 말
을 하지 않아도 서로의 마음을 이해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다음날은 평소보다 조금 늦은 오후에 장보기를 나섰다.
하루 차이지만 오늘은 어제보다 한결 세상이 밝아 보였는데
하얗게 눈 쌓인 거리가 그랬고, 안암천 스케이트장에서 놀고
있는 아이들이 그랬다.
전 날의 생각없는 행복감에 젖어 시장으로 향하는 내게 큼지막
한 버드나무 뒤에 숨어있던 노빈과 민우가 갑자기 소리를 지르
며 나타나 길을 막아서자 화들짝 놀란 나는 그만 그 자리에 주저
앉고 말았다.
"어이 아가씨! 나 여기서 얼어 죽는 줄 알았다."
"은영씨 나~~! 운명남 민우!"
"안녕! 이마 괜찮아?"
"어이구 복장이야. 오늘 아무래도 내가 이마를 댓 바늘 꿰매야 할
까 보다. 인간적으로 이거 너무 하는구만. 은영아! 얘-하노빈 바
람둥이야. 하도 많아서 같이 고개를 들고 다닐 수가 없어. 여자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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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득이는 전문 기술을 갖춘 꾼이란 말이야. 인간아! 너 오늘 여자
친구 몇 명 만났냐? 게다가 저 친구는 사생활이 아주 복잡해."
노빈이 히죽대며 웃고 있었다.
"사돈 남 말 하네."
작지만 내게 안개꽃 같은 행복이 찾아 들었다. 화려하지도 청조
하지도 아름답지도 않은 안개꽃과 같은 차분하고 조용한 행복.....
그 날부터 두 사내를 앞세우고 다니는 장보기가 시작 되었다.
먼저 셋이 만나면 두 사내가 "가위 바위 보"를 하고 진 사람은 변함
없는 그 날의 몸종으로 주인 왼쪽에 다섯 발자국 뒤에 서서 모든 짐
을 지어 나르고 이름도 돌쇠가 되었다.
"얘 돌쇠야 ! 어서 짐을 챙겨 들지 않고 무엇 하느냐?"
호령하는 사람은 나와 팔짱을 끼고 다정스럽게 데이트를 집 앞까
지 즐겼데, 하루마다 어떨 때는 이 삼일마다 바뀌는 돌쇠 덕에
우리 셋은 경동시장의 명물이 되었다.
시장이라는 것이 다니다 보면 단골이 생기게 마련으로 처음에는
단골가게 주인들이 이 희한한 젊은이들을 두고 부인 한 명에 신
랑이 둘이라는 둥 여자가 아주 절묘한 부분을 가졌다는 둥 수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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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며 이상한 눈길을 주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주인과 머슴이 바
뀌는 사연을 알고부터는 고단한 삶 속에서 우리와 함께 머슴놀이
를 하며 무척 즐거워했었다.
"응~오늘은 말라깽이 돌쇠구나! 그러니까 가위바위보를 잘 해야지."
그러면 돌쇠들도 숙달이 되어서 좀더 재미있게 즐기려는지 진지
하게 비굴한 표정으로 "안녕 하셨시유? 하루 동안 아줌마 무지
하게 예뻐지셨네. 좋은 걸로 주세유."하고 인사를 건넸다.
우리가 시장에 나서면 "돌쇠야! 오늘은 이것 좀 사거라. 죽인다.
죽여." 하는 외침에 묻혀 시장 바닥은 금새 웃음꽃이 폈다.
어쩌다 한 사람과 시장을 보게 되면 두말없이 나는 마님이 되는
날이고 그 친구는 돌쇠가 되었는데 두 사람이 모두 나타나지 않
는 날이면 어깨에 힘이 빠지고, 다리가 풀린 그야말로 풀 죽은
마님이 되어 시장을 보아야 했다. 그런 날이면 상인들이 먼저
위로의 말을 아끼지 않았고 그들의 빈 공간은 동생들에게도 큰
아쉬움으로 남았다.
엄마가 앓기 시작하면서부터 우리 집에는 웃음소리가 사라졌었다.
그러나 이 친구들이 나타나고부터 일주일에 한두 번은 가족 모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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밝은 웃음을 크게 소리 내어 웃을 수 있었고, 동생들은 너무 쉽게
노빈과 민우를 친 오빠처럼 잘 따랐다.
그들도 많은 여동생이 한꺼번에 생기고, 정이 들어서인지 장보기
가 끝나고 대문 앞에 오면 그냥가기를 마냥 서운해 하며 “마님!
커피 한 잔 안 될까?" 하고는 내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집으로
들어서기 일 수였다.
동생들은 장을 보고 돌아 올 시간이 되면 의례 대문밖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우리들을 기다리곤 하는 등 남자라고는 아빠와 세살박
이 은수가 전부인 우리 집에 그들은 삶의 생기를 불어 넣어 주는
존재들이 되어 갔다.
어느 날 초등학교 6학년이던 여섯째 은미가 다들 모여 앉은 자리
에서 민우에게 무척 심각한 표정으로 이런 말을 했었다.
"오빠! 나! 오빠한테 시집가면 안돼요?"
당사자인 민우나 우리 모두 황당한 모습으로 바라보면서 은미의
당당한 질문에 어이없어 했지만은 언니들 틈에 자라 사춘기가
빨리 왔다 싶던 은미의 이 한마디에 나와 가족들, 친구들은 어찌
할 바를 몰라 전전긍긍 했던 적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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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은미는 내가 그렇게 좋으니? 그럼 그러자. 은미하고 나하고
이 다음에 결혼하자,"
민우가 시원스럽게 답을 하는 통에 어색한 분위기를 피할 수 있었
지만, 그 때 은미의 그 환한 얼굴은 그 때까지 지켜 본 은미 얼굴
중 가장 행복한 얼굴이었다.
노빈이가 끼어 들었다.
"은미야! 나는 안되니?"
"오빤 안돼! 언니가 좋아 하니까."
평소 말이 별로 없던 은미의 심각한 그 한마디에 그 날의 모임은
웃음보따리가 터져 버렸고, 나와 노빈 그리고 민우는 답변을 잃
고 넋 나간 표정이 되어 있었다.
"돌쇠면 같은 돌쇠냐? 형님 돌쇠에게 절 한 번 해 봐라."
노빈의 빈정거림에 성격이 좋기만 했던 민우가 성깔 있게 받아
넘겼다.
"그래 형님 돌쇠놈아! 벽에 똥칠할 때까지 잘 먹고 잘 살아라."
방학이 끝나면서 일주일에 두 친구가 우리 집을 찾는 일은 한두
번이었지만 그들이 한 동안 안 보이면 동생들의 성화에 하는 수
없이 내가 십자가를 매고 그들에게 전화를 해야 했다.
"얘! 노빈아! 나 은영이야. 오늘 저녁시간이 어찌 되니?"
그러면 열일을 제쳐 두고 저녁 시간을 우리와 함께 해주는 두
친구를 나와 동생들은 언젠가부터 기다리며 보고 싶어 하는 처지
가 되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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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쾅~쾅~쾅"
그 날은 동생들과 내가 앞마당 수돗가에서 유행하던 핫펜츠 차림
으로 더위도 식힐 겸 셔츠의 아래 단추2개를 풀어 앞으로 질끈 묶
은 채 커다란 플라스틱통에 여름 이불들을 동생들과 물장난을 겸
해서 발로 밟으며 빨래를 하고 있었다.
"누구세요?"
"쾅~쾅~쾅"
다시 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우리 집은 옛 한옥식 대문으
로 밖이 내다보이는 것이 아니고 음성으로 상대를 확인하고 빗장
을 열어야 했는데, 은미에게 나가 보라고 하고서 우리들은 물장
난을 계속하고 있었다. 드디어 함께 물통에서 여름을 즐기던 은수
가 주황색 플라스틱 바가지로 물을 떠서 내게 흠뻑 던져 버렸다.
"아이고 은수야 ! 누나 졌다. 그만! 그만!"
은수는 신이 나서 계속해서 물세레를 퍼부었지만 여름 날 그것
도 오후 3시경이어서 샤워하는 셈치면 그만이었다.
"정말 재미있겠네! 야 멋있다."
낯선 사내의 목소리에 놀라 돌아 본 곳에는 저녁시장을 함께 보
자고 전화해둔 노빈이가 은미와 함께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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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ㅇ 노빈이 왔구나! 점심 먹었니?"라고 물었지만 노빈은 대답
대신 따가운 시선으로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왜 그래~? 뭐 잘못 되었어?"
그의 시선을 쫓다가 나는 그만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물에 젖어 셔츠 겉으로 선명한 돌기가 노출된 채 가슴이 반쯤
그대로 노출 되어 있었고, 질끈 동여맨 셔츠 밑으로 배꼽이 드
러나 있었다.
"악~~ "
두 손으로 가슴과 배꼽을 가리고 방으로 달아나자 비명소리에 놀
란 엄마가 마루까지 나오셨다.
"은영아! 은영아! 왜 그러니? 누군데 그래?"
멋 적은 모습으로 인사를 하던 노빈을 바라보며 동생들의 설명에
엄마와 동생들이 한 짝이 되어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오빠 그런데 질문이 있어요."
"뭔데 해 봐."
"오빠! 우리 언니랑 결혼 할꺼지요?"
"글쎄 언니랑 오빠는 친구이지, 지금은 결혼을 한다, 안 한다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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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할 수 없는 것이란다. 나중에 결혼하게 되면 너희들 한테 먼
저 허락을 받도록 할께. 너희들은 오빠랑 언니가 결혼하면 좋겠
니?"
동생들은 일제히 "네"하고 대답하고 있었다.
"지금이 몇 신데 이렇게 예고 없이 불쑥 찾아오면 어떻게 해? "
"근사하더라. 나 보다 키도 크지, 나 보다 앞뒤로 살도 많이 붙
어 있지. 얼굴도 배꼽도 예쁘고, 마음까지 천사표니 누가 데려
갈지 정말 좋겠다."
"뭐라고? 너 어디서 어디까지 봤어 어~ㅇ?"
빨래 방망이를 들고 마당에서 함박웃음과 함께 능글거리는 노빈
을 쫓아 나서자 마루에 앉아 있던 엄마부터 물장난에 여념 없는
막내까지 웃음보따리를 활짝 풀어 헤치고 우리 모두 함께 즐겁
게 웃을 수 있었다.
그 날 결국 노빈은 허락 없이 처녀의 몸을 훔쳐 본 죄를 사하는
대신 빨래를 동생들과 책임지기로 했다. 그가 런닝 바람으로 바
지를 허벅지까지 걷어붙이고는 마당 한가운데서 빨래를 밟으면
은수는 여전히 바가지로 물을 퍼서 노빈에게 끼얹는 장난을 계속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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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수업은 어떻게 하고?"
은수의 물세레를 피해가며 그가 답했다.
"으~ㅇ 마님이 오라고 해서 친구에게 출석을 부탁하고 그냥 와
버렸다. 하마터면 그런 끝내 주는 구경거리를 놓칠 뻔 했잖아. "
"야! 너 자꾸 그런 말 하려면 니네 집에 가."
"아 아냐 아냐. 얘는 무슨 말을 못해요. 무조건 가라고 하면 다냐?
오늘 빨래도 하고 했으니 삼겹살이라도 저녁에 먹어야 되는 것
아니니?"
"네가 어디가 예쁘다고 고기를 먹이니?"
"마님이 아랫것들 챙겨야지 아랫것이 마님 챙기냐?"
밉지 않은 그를 지켜보며 며칠간 못 보았던 그가 보고 싶었던 것
은 아니었던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동생들이 하나 둘 학교에서
돌아오면서 조용하던 집안이 시끌벅적 해졌다.
"언니 오빠랑 시장 가야지."
은미가 조르듯 우리를 떠밀어 평상시보다 늦은 오후 6시가 조금
넘은 시간에 장바구니를 들고 시장으로 향했다.
"오늘 저녁 먹고 갈꺼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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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가면 네가 섭섭할 테니까 먹고 갈란다."
"너는 애인도 없냐? 수아 봐라. 그 기집애 애인 생기더니 매일
어디를 그렇게 싸돌아다니는지 전화 한 번 없지 않니! 숫기가
없어서이니? 아니면 키가 너무 작아서 그러니?"
그는 초등학교 시절 큰 아이들 편에 속했었지만 중학교 2학년을
끝으로 성장이 멈춰 버렸고 이래저래 남자로서는 작은 키로 인해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다.
"내가 좀 작은 것에 네가 보태 준 것 있냐? 키가 안 자라나는 것
은 내 잘못이 아니고, 키가 작으면 있을 것이 없다든? 아니면
군대를 못 간다고 하든? "
1년여 동안 그를 만나서 화내는 것을 본적이 없었는데 벌겋게
달아 오른 그의 얼굴을 보며 사태의 심각성이 느꼈지만 염려 했
던 대로 그는 화를 참지 못하고 자기보다 키가 큰 나를 길거리에
세워 놓고 한참 동안 노려보다가 장바구니를 내팽게치듯 던지며
오던 길을 되돌아갔다.
"노빈아! 에이 장난인데~~ 노빈아! 내가 잘못했어. 에이 노빈아
~ 마님 체면 좀 생각해 주라~. 으~응."
가까스로 그의 앞에 버티고 서서 빌다시피 달랜 후 다시 시장 가
는 길로 나섰지만 노빈은 그 날따라 차갑게 굳어만 있었다.
"내가 팔짱 껴 줄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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싫다는 그의 팔짱을 강제로 끼면서
"네가 좋아서 그래. 그렇지만 내가 너를 좋아 한다고 착각은 하지마."
키는 작았지만 넓은 어깨를 가지고 있던 그는 그 날도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가슴을 뒤로 제끼고, 고개는 화 난 독사 마냥 바싹 치
켜든 채 눈 길 한번 주지 않고 빠른 걸음으로 시장을 향해 걸어가
고 있었다.
왠지 마음이 다급해진 나는 그의 뒤를 종종 걸음으로 따르다가
오랜 연습을 해온 사람마냥 아무렇지도 않게 그의 팔짱을 끼고는
고개를 앞으로 쭉 빼고 “노빈아 다시는 그런 말 안할께. 화 풀어
라. 으~ㅇ"을 반복하며 응석을 부리고 있었다.
사실 노빈과 민우는 당시 나의 유일한 친구였으며 애인이었고
위안이었다. 작년 초 그를 만나고 난 후 처음으로 화를 내고 있는
그를 보며 이제까지 마님과 머슴으로 장난스럽게 지내왔던 시간
있었다면 그 날은 왕과 하녀만이 있는 어처구니없는 시간이었다.
"노빈아! 나 좀 봐 줘라!"
종종 걸음을 치며 그의 곁에 매달려 가는 나 자신이 재미있다는
생각도 들었고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사내의 팔에 매달려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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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자체가 흥미 있는 사건으로 부끄러움에 얼굴이 달아올랐지만
이미 어둑해진 거리는 꺼부정한 키 큰 여인이 숨어들기에 안성마
춤인 듯싶었다.
"너 어디 아프니?"
"아~~니 안 아파!"
갑작스럽게 걸음을 멈추고 진지하게 묻고 있는 그를 보기가 민망
하여 고개 숙인 채 땅을 보다가 팔짱을 빼고는 시장바구니를 그에
게 던지고 시장 쪽으로 달려갔다.
그 날 우리는 장을 보며 필요한 말 외에는 하지 않았다.
아줌마들이 돌쇠를 반겼지만 그저 인사치레뿐 평상시 밝고 명랑
한 노빈이 아니었고, 그날따라 우리는 특별히 장을 볼 일이 없으
면서도 서로에게 숨긴 눈빛만을 가끔씩 들키며 야채시장에서 건
어물 시장으로 다시 생선가게를 지나 정육점으로 빙빙 돌고 있었
다.
장바구니엔 참외 약간과 고등어 자반, 두부, 콩나물, 시금치가 조
금 들어 있을 뿐이었고 7시가 넘어서면서 켜지기 시작한 상점의
전구들이 어둡고 질펀한 시장바닥을 밝게 비춰주고 있었다.
"노빈아! 너 아직도 화가 났니?"
눈치만 살피다가 용기를 내어 물었지만 그는 대답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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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빈아! 노빈아!"
볼 부은 모습으로 홀로 걷는 그를 쫓아 함께 집으로 향했다.
우리 집은 경동시장에서 정릉천 다리를 건너 용두동 쪽으로 올라
와서 동대문상고를 끼고 흐르는 안암천 변에 있었지만 앞서 노빈
이 걷는 길은 정릉천을 타고 마장동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를 불러 세웠지만 못들은 것인지, 그냥 가고 있는 것인지, 그런
그를 한 참 동안 지켜보다가 혼자의 짐이 되어 버린 장바구니를
들고 집으로 향했지만 왠지 석연치 않은 그를 그냥 보내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발길을 돌려 그에게 달려갔다.
"왜 그~래?"
어둠이 내려 가끔씩 서 있는 가로등을 제하고는 인적이 드문 하천
뚝 방에서 달빛에 흐르는 노빈의 슬픈 옆모습을 보며 심상치 않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지만 돌아서는가 싶던 그는 대답대신 순간적
으로 나를 으스러지게 끌어안으며 젖을 찾는 아이가 엄마의 품을
파고 들 듯 가슴에 얼굴을 파묻고는 작은 떨림과 함께 마구 얼굴을
비벼댔다.
당황스러운 순간이었지만 어쩌면 오래 전부터 기다리고 있던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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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럼 대수로운 일이 아닌 것 마냥 그 날 나는 그의 머리를 가슴에
품고 잔잔히 등을 어루만지며 머리카락을 한 손으로 쓰다듬다가,
영화에서처럼 우리 둘은 점점 깊은 포옹을 하게 되었다.
"야~아 아 노빈아! 왜......읍 허어~억"
그의 육탄 공격을 받으며 냉정한 나를 찾아보려고 애를 썼지만
거부하기보다는 그의 강렬한 몸짓이 더욱 나를 뜨겁게 달구었고
나와는 전혀 상관없던 일로 느껴졌던 사내의 입술을 느끼게 되
면서 나는 온 몸을 떨면서도 그를 강하게 밀쳐내지 못했다.
"이러면 안돼. 노빈! 그러지마."
간간이 그의 입술을 피하며 속삭이듯 외쳤지만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나의 말문은 닫혀야 했고, 엉덩이를 뒤로 빼며 도망치고 싶었
지만 그의 완력 앞에 무기력하게 떨고 있었다.
"안돼. 안~돼. 으~응. 너! 우리 아빠한테 이른다. 저리가~"
그의 입술을 피하려고 고개를 돌리면서도, 싫지 않은 그의 얼굴을
손으로 밀치면서도 간간이 달콤한 그의 입술로 전해오는 뜨거운
입김에 움찔움찔 온몸에 전기가 이는 듯 했다.
그는 거칠게 나를 뚝방 위에 쓰러뜨리고 다리 사이에 자신에 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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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어넣고는 일정한 리듬으로 집요하게 자신의 아랫부분을 밀착시
켜 왔다.
"뭐하는 거야. 야! 하노빈 너 뭐하는 거야? 나! 싫어."
그는 입술로 말문을 막고 성이 난 사람처럼 겁에 질려있는 나를
노려보다가, 갑자기 아프도록 가슴을 움켜쥐면서 숨이 넘어 갈듯
한 거친 호흡과 함께 브레지어를 가슴 위로 올려붙이고 상상할
수 없던 일이었지만 거칠게 바지를 벗기려 들었다.
필사의 몸싸움이 있었다.
"은영아! 이대로 나를 받아 줄 수 없겠니?"
그가 머쓱이 물러 앉아 측은한 눈빛이 되어 내게 던진 말이었다.
"난 네가 싫어졌어. 다시는 내 앞 에 나타나지마."
허둥거리며 옷매무새를 고치고 장바구니를 챙겨 왔던 길로 되돌
아섰다. 그와의 시간이 싫지만은 않았지만 그 정도에서 그와의
일들을 멈춰야겠다고 생각하며 어서 그 자리를 벗어나고 싶었다.
"은영아! 나! 내일 군대가."
뒤돌아 걷던 내게 노빈의 짧고 날카로운 외침이 들렸다.
"뭐? 군대를 간다구? 군대를 간단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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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 생각 없이 멍청한 모습으로 그의 말을 되 뇌이며 계속 걷다
가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절망감을 느끼며 나도 모르게 돌아 서
서 엉엉 소리 내어 울면서 소리쳤다.
"뭐라고 군대를 간다고? 나쁜 자식아! 나한테 허락도 안 받고
누구 마음대로 군대를 가? 나는 이제부터 어떻게 살라구?
이 나쁜 놈아! 네 맘대로 군대가? 이 나쁜 놈아! 내일 간다구?
나 더러 어떻게 하라는 거야! "
장바구니를 내던 버리고 그에게 달려가 가슴을 주먹으로 두들
기며 1년 반이 넘도록 잘 참았던 눈물이 서러움과 함께 한꺼번
에 쏟아져 나오는 듯 싶었다.
"나쁜 놈! 나쁜 놈아!"
또 다시 세상에 혼자여야 한다는 두려움과 친구이며 애인이던 그를
보내야 한다는 허전함, 희망과 꿈이 사라져 가던 자신에 대한 서러
움에 그 날 나는 소리 내어 엉엉 울고 말았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두 사람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구석
진 뚝방 한 귀퉁이에 무릎을 양손으로 깍지 낀 채 앉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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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같이 왜 이렇게 짧은 시간을 남겨 두고 말하는 거야? 내가 해
줄 수 있는 것이라고는 네게 따뜻한 밥 한 끼 해 먹이는 것 밖에
없는데 너는 그것마저도 내게서 빼앗아 버렸어. 참 우습다. 네가
군에 간다는데 내가 왜 이렇게 힘들지?"
"은영아! 난 어려서부터 네가 너무 좋았어. 커가면서 하얀 교복을
입고 단발머리의 정말 큰 키의 여고생이던 너를 멀리서라도 보는
날이면 그 날밤 나는 잠을 이룰 수 없었어. 너는 자신을 잘 모를
꺼야. 네가 얼마나 아름답고 예쁘고 당당한 여자인지를......
어떤 날은 너를 보려고 옥상에 올라가 망원경으로 몇 시간이고 네
가 올 거리를 지켜보기도 했고, 촛불을 켜 놓고 너와 결혼 할 수 있
도록 간절히 빌기도 했어. 정말 우습지? 난 어쩌면 네게 미쳐 버렸는
지도 몰라.“
무슨 생각을 해야 하는지 아니면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도 느끼
지 못했지만 아주 작은 소리로 혼자서 말을 잇는 그가 불쌍하게
보였다.
“은영아! 내 사랑을 받아 줄 수 있겠니? 나는 너에게 언제나 기쁨
되고 싶었고, 잠시라도 네게 그늘이 되어주고 싶어. 하지만 오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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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를 보지 못하면 영원히 후회 할 것만 같아 순결하고 아름다운
너에게 친구 아닌 이성으로 사랑했노라고 고백하고 싶었어.“
그는 내게 진실을 말하고 있었다.
사실 나는 그의 애틋한 정을 오래 전부터 느껴 왔었다. 지난 1년
반 동안 그가 있었기에 끝이 없는 방황... 이성으로부터의 외로
움.. 젊음으로부터의 소외감까지도 참아 낼 수 있었지만, 이제 그와
얼마간 떨어져 있어야 된다고 생각하니 혼자서 쌓았다고 해도
좋을 예쁜 모래성을 파도에 맡겨 버리는 내 심정을 그는 알기나
했을까?
두 눈 가득히 고인 눈물을 담은 노빈의 얼굴을 두 손으로 받쳐
들고 그에게 뜻 모를 감사의 키스를 했다. 그 순간 모든 것을 허
락해도 좋다는 마음으로 그가 원하는 대로 나는 파도치는 바다
한가운데에서 조각배를 타는 듯한 시간을 그와 함께 보냈다.
그 날은 장보기가 늦어져 8시가 다 되어 집에 도착 할 수 있
었다. 아빠와 동생들이 집 앞까지 마중을 나와 있었고 언니의 늦
은 귀가는 생각에 꼬리를 물었지만 노빈과 함께 장바구니를 들고
들어서자 다들 환한 웃음으로 맞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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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녀간의 일은 지나고 보면 다 그런 것이지만 언제 무슨 일이 있
었냐는 듯 앙큼을 떨며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뻔뻔스럽게 가족
들과 함께 집안으로 들어갔다.
"아빠! 노빈이가 내일 군대 간대요. 저녁 함께 하면 어떨까요?"
"어~ 그래? 좋지. 노빈아! 어서 들어오너라. 나하고 이별주나 한
잔 하자꾸나."
하시며 아빠가 가끔 드시는 소주를 새것으로 꺼내 놓으셨고 나는
부엌으로 들어가 부지런히 안주를 마련했다. 다행이 고교 1년생인
넷째 은경이가 밥을 다 해 놓은 상태여서 안주로 두부부침과 계란
말이를 부지런히 준비해서 늦은 저녁상을 차렸다.
"노빈이가 벌써 군대를 가는 구나. 한 잔 받아라."
노빈이 무릎을 꿇고 돌아 앉아 단숨에 술잔을 들이키고는 아빠께
잔을 드렸다.
"잘 다녀오겠습니다."
"무엇들 하니? 어서 식사들 하지 않고?"
밥상을 받은 동생들은 여느 때와 달리 즐거운 식사를 하지 못하고
노빈과의 이별이 아쉬운 듯 눈치만을 살피며 서운함이 역역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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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사가 끝이 나자 노빈이 일어서며 아빠께 절을 드리겠다고 했다.
"절은 무슨 절... 그래 몸조심하고 잘 다녀오너라."
아빠가 지갑에서 얼마인가를 세어 노빈에게 주셨고, 그가 우리 집
을 떠나 갈 때 결국 은경이가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문을 나서던 노빈도 동생들을 하나하나 안아 주며 예고된 아쉬움
에 눈물을 글썽거렸고 나와는 굳은 악수로 이별을 해야 했다.
그렇게 나와 동생들은 우리 집 대문 앞에서 그를 보내야 했고 나
는 이미 20살 처녀가 아닌 동생들의 언니엄마로 돌아와 있었다.
"잘 다녀와 노빈!"
마른 눈물을 머금고 그의 뒷모습을 보며 어둠으로 보이지 않을 때
까지 동생들과 함께 손을 흔들었다.
다음날 거울 속에 요괴인간의 모습이 나타났다. 요괴인간은 TV
만화 영화였는데 아침에 본 거울 속에는 '베라'의 두꺼운 입술을
연상케 하는 내가 들어 앉아 있었다.
지난 밤 노빈과 함께 서로 처음 해 보는 키스를 하면서 근 한시간
동안 무조건 세차게 상대의 입술을 빨기만 하면 되는 줄 안 두 사
람의 집요한 키스 놀이로 내 입술은 누렇게 부르터 부풀러 올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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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틀이 지나서는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아야 하는 후유증을 앓아
야 했다.
의사 선생님은 아는지 모르는지 "무엇에 힘껏 빨렸었나요? 입술
에 피가 몰려 멍이 들었고 곪아 버렸네요. 당분간 자극성 음식은
삼가 하시고 입술의 껍질이 벗겨지더라도 손으로 잡아 뜯지 마세
요." 라며 누렇게 곯은 내 입술에 바를 연고와 엉덩이 주사를 처
방해 주었다.
노빈이 떠난 지 한 달이 되었지만 그 해 따라 늦더위가 기승을
부리고 있었다. 민우마저 소식이 끊기자 나도 그랬지만 동생들도
생기를 잃었고 우리 집은 엄마의 신음소리만 남아 있는 숨이 막히
는 분위기로 되돌려져 있었다.
"저 민우씨 집이지요? 저는 은영이라고 하는데 민우씨를 부탁합
니다."
생각다 못해 동생들을 위해서라도 그가 한 번 집을 방문해 주었으
면 하는 마음으로 전화를 했었다.
"민우 지금 없는데.... 아가씨는 우리 민우와 어떤 사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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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저는 조은영이라고 민우, 노빈과 함께 초등학교 동창입니다."
"음 그래요? 나는 민우 엄마에요. 가끔 용두동에서 노빈이와 함께
만난다는 그 친구이구나. 그나저나 어쩌나 민우가 방학 동안에
봉사를 한다고 제부도에 갔는데... 전화 오면 은영이에게서 전화
왔었다고 전해 줄께."
8월말 드디어 '성민우' 그가 나타났다. 자기가 진 죄를 아는 듯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전화부터 왔다.
"여보세요? 조은영씨 부탁드립니다."
다 알면서도 능청을 떠는 그에게
"누구세요? 저는 은영이 이모인데....."
"아~예 저는 은영이랑 초동이구요, 은영이에게 돌쇠한테 전화 왔
다고 하면 알 겁니다. 좀 바꿔주십시오."
"초동이 뭐하는 거예요?"
"아예 초등학교 동창을 뜻합니다."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리도 못가서 발 병 난다. 라고 했는데
마님 버리고 간 돌쇠는 볼일 없다."
"우~아 은영이 삐졌구나? 그러지 마라. 노빈이도 군에 가고 나 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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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더 있냐? 화는 나중에 내고 내가 너희 집에 5분 안으로 도착
할테니 마중 좀 나와라."
시꺼멓게 그을린 얼굴로 비닐봉지에 무엇인가를 가득 담아들고
제 집 인양 의기양양하게 대문을 들어서던 민우에게 동생들이
달려들어 온 몸을 마구 꼬집어 뜯었다.
오랜만에 나타나는 민우를 반기는 어린 동생들의 환영방법에 민
우는 앞마당이 좁아라 도망 다니며 "아이고~ 에구 에구구~ "하고
엄살을 부렸고, 그럴수록 동생들은 신이 나서 민우를 집요하게
쫓아가며 꼬집어 뜯었다. 잠시였지만 웃음꽃이 우리 집을 가득
채웠고 밝은 동생들의 얼굴은 마냥 행복해 보였다.
"얘들아! 오빠 그러다가 까무러치겠다."
"아이고 요것들! 오빠한테 그렇게 모기떼처럼 붙어 꼬집어 뜯어도
되냐? 아이고 따가와라."
여전히 민우는 능청스러운 구석이 있었다.
"마님! 마당에 숯불을 펴도 될까요?"
대답이 필요 없는 듯 제 집 마냥 숯과 화로가 있는 곳으로 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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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숙한 솜씨로 꺼내 들고는 마당 가운데로 나섰다. 오랜만에 동생
들이 밝게 웃으며 여름날 뙤악볕 화로 주변에 옹기종기 모여 앉았다.
고3인 은희를 제외한 동생들 다섯이 병아리 마냥 민우를 둘러싸고
앉았고, 나는 그런 정스러운 모습이 보기 좋아 미소를 띠며 팔짱을
낀 채 툇마루에 앉아 있었다.
"자! 지금부터 이 오빠가 제부도 갯벌에서 직접 잡아가지고 온 싱
싱한 대합 숯불구이 요리를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얘들아! 박
수 쳐야지?"
"짝~짝~짝~짝"
숯불에 석쇠를 올려놓고 대합을 그 위에 적당히 깔던 민우가 부엌
으로 서둘러 가자 동생들이 쪼르르 함께 따르고 과도를 꺼내 들고
화로로 돌아오자 무슨 큰일이나 있는 것처럼 동생들도 서둘러 돌
아와 쪼그리고 앉았다.
그 사이 대합은 큰 입을 가로로 쩍 벌리고 조갯살을 들어 낸 채
익어 갔고, 민우는 과도로 조개껍질에 붙은 조갯살을 떼어 내고
있었다.
"은미야! 가서 쟁반하고 접시 하나 가져와라. 먼저 제일 큰놈으로
잘 익은 것을 골라 엄마께 드리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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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우가 그 중 하나를 골라 접시에 담아 나에게 주었다.
"귀여운 친구! 고맙기도 해라."
엄마께 접시를 들고 들어갔다. 아무리 밝게 해 드리려고 노력
하고 매일 깨끗이 씻겨 드리고 있었지만 엄마가 계신 안방은 언제
나 사람이 살고 있지 않는 듯한 음습함이 가득차 있었고 아랫목
쪽에 이제는 뼈만 앙상하게 남으신 엄마가 누워 계셨다.
"엄마! 민우가 조개를 잡아 왔어요. 좀 드셔 보세요."
엄마를 일으켜 앉혀 드리고 안방 유리문을 통해 민우와 동생들이
놀고 있는 마당을 보시도록 했다.
"애들이 무척 밝게 웃는구나."
엄마가 나의 손을 꼭 잡으셨다.
"은영아! 네게 너무 못 할 짓을 시키는 것 같아 엄마는 그저 미안
할 뿐이다. 너한테만 희생을 하라고 해서는 안 되는 것 이었는데
......"
말씀을 잇지 못하고 눈물을 주르륵 흘리셨다.
"내가 죽거든 화장을 해 다오. 살아서 네게 이다지 못할 짓을 시
키고 죽어서 무슨 낯으로 제삿밥을 얻어먹겠니. 화장을 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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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씨 문중 선산이 아닌 언젠가 너와 함께 갔던 미사리쯤에 강이
보이는 양지 바른 동산에 재를 뿌려 다오."
"무슨 말씀이세요? 엄마가 힘든 것은 방사선 치료 후유증 때문이
래요. 조금만 지나면 괜찮아 질 거라고 의사 선생님이 그랬어요.
괜한 말씀마시고 이 조개나 조금 드셔 보세요."
주르륵 흐르는 눈물을 안 보이려고 급하게 팔소매를 눈 위로 올
려 붙였다.
8월의 더위는 이겨내기 어려운 고통이었는지 엄마의 상태는 더욱
악화되어 거의 식사를 전폐하는 상태가 되었고 급기야 혼수상태
에 빠지기도 했다. 아빠와 함께 찾은 병원에서는 더 이상의 방법
이 없으니 준비를 하는 것이 좋겠다는 통보도 이미 받았었다.
내 나이 20! 셋째 은희가 18, 넷재 은경이가 16, 다섯째 은애 13
여섯째 은미가 12, 일곱째 은정이가 9살, 막내가 3살이던 해였다.
1년만 참으면 꿈 많은 대학생활을 하겠거니 기대도 해 보았지만
그 새 1년이 훨씬 지나 민우, 수아 모두 내년이면 3학년이 되는
데 내게 남은 것이라고는 거칠게 부르튼 두 손과 관리치 못한 퉁
퉁한 몸매, 거치른 손마디와 피부, 촌색시 같은 어색한 얼굴과
남들보다 머리하나 정도 더 큰 키만 어설프게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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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을 위한, 아니 적어도 나라는 존재를 느낄 수 있는 그런 삶을
살고 싶다고 생각하던 시절에 어쩔 수 없는 현실을 받아들여 아무
생각 없이 집안 살림에 매달리며 살아왔지만 노빈이 떠난 후 여
름이 깊어갈수록 참기 어려운 번뇌가 신경성 소화불량으로 나타
나던 때이기도 했다.
"은영아! 잘 먹었다고 전해주렴."
접시를 들고 동생들 곁으로 돌아 왔다.
그 새 은애가 고른 조개에서 바알갛게 익은 아주 작은 꽃게 새끼
가 발견 되었는데, 막내에게 꽃게를 먹이려 들자 은수는 기겁을
하고 달아나 민우 뒤에 숨어 버렸고 동생들은 좋아라 쫓아가며
은수를 놀리면서 때 묻지 않은 작고 행복한 웃음들을 웃고 있었다.
저녁을 맞으면서 민우와 오랜만에 시장 길을 나섰다. 얼마 전
처럼 노빈이 웃으며 골목길에서 뛰쳐나올 것만 같아 몇 번이고 그
의 집을 돌아다보며 무척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은영이 너! 노빈이 생각하는구나. 편지도 한 장 없든?"
"으~ㅇ"
"자식! 나한테만 그러는 줄 알았더니 네게도 그랬구나! 그 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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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너무 자기감정을 절제하고 숨기는 것이 탈이야. 너무 정확해
서 친구간에도 정을 서로 주고받기가 까다로운 친구로 자존심이
라도 건드리는 날이면 한 번은 몰라도 두 번은 용서하지 못하는
매정한 사람이야. 대신에 그 놈은 자신이 친구라고 생각하면 진
짜 간을 빼 줄 만큼 철저하게 배려 할 줄 아는 친구이기도 해."
민우가 나를 위해 괜한 너스레를 떨고 있었지만 나는 노빈을 그
리워 하며 헤어지던 날 뚝방에서의 시간 속에 빠져 들고 있었다.
군에 간다는 그의 고백을 듣고 한참 동안 어떻게 해야 할지
망서리던 나는 뒤돌아 달려가서 그의 가슴을 마구 때리다가 쓰러
질 듯 품에 안기고는 거침없이 그의 입술을 찾았었다.
그에게 모든 것을 허락한 것처럼 눈을 감고 잠시 동안이었지만
그의 거친 호흡 속에 그가 원하는 대로 모든 것을 내버려두었다.
청바지가 허벅지를 타고 무릎 아래로 내려지면서 왠지 모를 설음
에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흐느끼던 나는, 그의 손이 속옷에
닿자 거의 발작적으로 그를 밀쳐내며 달빛 어둠 속에 괴로워하는
그의 일그러진 얼굴을 노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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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영아! 너를 사랑해. 난 너를 완전하게 갖고 싶어."
.......
"야! 임마! 너 어디 가는 거야?"
민우는 혼이 빠져 버린 듯한 나를 곁에서 조용히 따랐지만 시장
사거리에서 신호를 무시한 채 건널목으로 생각 없이 뛰어든 나
로 인해 택시가 급정지를 하게 되면서, 민우가 다급하게 나를
잡아 세운 것이다.
"야! 너 죽고 싶어 환장 했냐? 에이 재수 없어."
민우가 곁에서 연신 고개를 조아렸지만 나는 그 이유를 알고 싶
지 않았다. 단지 1달이 지나도록 소식마저 없는 노빈이 너무 보
고 싶어 미칠 것 같다는 생각뿐이었다.
그 때쯤 엄마와의 이별연습에 부쩍 힘들어하시는 아빠는
거의 매일 술을 드셨다. 시장을 다녀오는 민우를 보시자 반갑게
저녁을 함께 하자고 하셨고 이 때다 싶은 능청스런 민우는 아빠
곁에 기세 좋게 눌러 앉아 4홉들이 소주를 2병째 비우고 있었다.
"아버님! 제가 주말에 그러니까 내일과 모레 동안 은영이 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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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쏘여주게 해주십시요. 저 요즈음 대학 친구들과 제부도라는
섬에 가서 농사일도 돕고 염전 일도 도우며 아이들 공부도 가르
치고 있습니다. 물론 여학생들이 있으니 잠은 그 친구들과 자면
되고 제가 봉사팀의 팀장이니 허락만 해주시면 안전하게 바람
쐬어서 돌려보내겠습니다."
"진짜 여학생들이 함께 간 곳이냐?"
"그럼요. 지금 전화해 보시면 그 곳 산마루라는 교회에 머무는 친
구들과 목사님과도 연락이 될 겁니다."
지겨운 저 자신감! 능글맞아 진실성이 없어 보이는 민우는 결코
내가 좋아 할 타입이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동생들이 방학기간이
고 곧 개학이 되면 당분간 내게는 불가능한 여행일 것 같아 아빠
의 물음에 함께 가겠노라고 대답했었다.
"은영아! 내일 아침 7시에 너희 집으로 올께."
"뭐 준비 할 것은 없니?"
"마님은 그저 편한 옷에 모자 정도와 차비만 준비 하면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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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