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주 여행기

독고철 씰크로드 (서안 - 둔황)

독고철 2024. 5. 2. 00:40

 

씰크로드

(2024.4.16.- 4.25)

 

여행지 순서

서안 난주 무위 장액 가욕관 안서 돈황 서안

 

1일차  인천 - 서안

2일차  맥적산 석굴

3일차  병령사 석굴

4일차  단하 지질국립공원

5일차  가욕관

6일차  막고석굴 명사산

7일차  옥문관, 마귀성

8일차  기차- 서안

9일차  섬서성 성곽 걷기

10일차  서안 인천

 

 

씰크로드

중세 씰크로드는 3가지 경로였는데 흉노 지배하에 있던 중앙아시아 초원을 가로지르는 초원길, 가장 많이 이용된 사막길, AC 100년경 개척된 홍해- 페르시아해- 인도- 베트남- 중국을 잇는 바닷길이 있었다.

 

사막길은 BC 130년 경 한나라 때 서안과 이스탐불, 로마를 연결하는 길이었다.  중국- 중앙아시아-서아시아-유럽을 잇던 고대 동서 교역 루트로 육로 주요 노선의 국가는 중국 서안(장안) 우즈벡스탄 - 아제르바이젠 조지아 동로마제국 이스탐불이다. 주 거래품목은 한나라의 비단, , 도자기와 로마제국의 보석, 직물, , 유리제품 등이었으며 마르코폴로가(1254 -1324) 이 경로를 이용 여행했다고 전해진다.

 

이번 여행길은 씰크로드의 일부분으로 출발점인 고대 중국의 수도 장안(서안)에서 천산 산맥 위 아래로 길이 나뉘는 기점인 둔황까지 왕복 4400km의 여정이었다. 서안을 출발해서 말로만 듣던 끝없는 황토고원을 지나며 왜 황하는 흙탕물이어야 하는지에 대한 이유를 알게 되었고, 고비사막의 잔돌과 모래가 섞인 딱딱한 사막길도 낯익게 경험했다.

 

만리장성의 서쪽 끝도 사막 한가운데 있었다. 사람이 살 수 없는 이런 사막 한가운데까지 군사를 보내 지키고 끝없는 전쟁을 치러 지켜야 했는가? 라는 질문에 현지 가이드는 단 한마디로 이렇게 답했다이곳을 지키지 못하면 흉노족 등 침략자들이 바로 나라 중심부로 쳐들어오기 때문에 만리장성 등으로 방비를 하며, 적의 침공을 봉화 등을 이용 사전에 알리고 사막과 황무지에서 전쟁을 치러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서였다.”라고 말했다.

 

자연탐방 여행이 대부분 그렇지만 끝없이 이동해서 잠시 돌아 볼 자연과 유적들을 보고 또 한 없이 가야 하는 여행길이 고단하다고 할 수 있겠지만 생각하기 나름으로 남들이 쉽게 도전하지 못하는 곳이기에 여행을 마치면 오래도록 여운이 되어 마음에 남는 것도 오지 자연탐방의 매력이라고 생각한다.

 

 

1. 서안 (西安) = 장안 (長安 - 산시성의 수도)

 

3000년 고도인 서안의 옛 이름은 장안이다. 중국 지도에서 보면 국토 중앙부인 관중분지에 위치해 있다. 인구는 약 820만명이며 (2010년 산시성 인구 3,750만명) 한족 91%외 후이족 등이 있다.

 

중국의 6대 도시에(장안, 베이징, 낙양, 난징, 지급, 항저우) 하나이며 고대 중국사로 보면 진나라 진시황, 한나라 유방의 수도였으며, 581년 수나라, 618년 당나라의 수도 등 11개 왕조의 수도였다. 현대사에서는 중국 주석 시진핑의 고향이기도 하며 장안(長安)이란 오래도록 안정된 땅이라는 뜻이고 서안(西安)이란 서쪽에 안정된 땅이라는 뜻이다. 건조한 기후로 벼농사는 되지 않으나, 토지가 비옥하고 넓고 평탄하며 자연조건이 농사에 좋은 관중평원의 중앙에 장안이 (서) 있다.

 

중국은 100년의 역사를 보려면 상하이에 가고, 1000년 역사를 보려면 베이징, 3000년 역사를 보려면 서안에 가라라는 말이 있다고 한다. 서안에는 고대 진나라 진시황릉, 수많은 제국의 수도 역사 흔적, 당나라의 문화예술, 명나라 성곽 등이 남아 있으며 고대 한나라 수도 장안(서안)은 당시 세계에서 가장 큰 도시였으며 실크로드의 출발점이었다.

 

 

2 맥적산 석굴

 

절벽에 석굴을 파고 그안에 진흙으로 만든 불상을 만들고 채색된 채 1000년이 넘는 세월을  지켜오고 있다. 화면에 보이는 선들은 관광객들이 걸어서 접근 하여 감상 할 수 있도록 절벽에 잔도를 만들어 놓은 형상이다.

 

잔도 중앙부에 절벽 바위에 거대불상이 조각되어 있다.

 

 

감숙성 천수현에 위치하고 높이 142m 석회암 돌산에 192개의 불교 석굴이 있다. 가장 오래된 것은 502년 북위 것이고 위, 북주, , , , 명대의 석불, 벽화등이 보존 되어 있다.

 

가이드 말로는 산 정상에서 밧줄을 이용 내려와서 절벽에 굴을 팠으며, 그 안에 불상과 보살들은 모셔 놓았다. 불상과 보살은 진흙으로 만들어져 있으며 그 위에 색채를 입힌 상태로 아주 작은 굴에 (사방 1m 정도) 작은 불상이 모셔져 있는가 하면 큰 동굴은 높이 3m. 사방 3-5m 정도의 규모에 큰 불상과 보살들이 모셔져 있다.

 

현재는 동굴을 잇는 가도와 안전난간이 설치되어 있어 절벽통로를 따라 관람할 수 있으며 절벽에 가도이니 중국인다운 발상이다 싶다.

절벽을 가까이서 보면 수직에 가깝다.

 

석굴은  크기가 다양했고 크기에 따라 불상도 크기를 달리했다.

 

 

불상은 진흙으로 만들어지고 겉에 채색을 하고 있었으며 석굴안 벽과 지붕에도 진흙을 바른후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석굴건립 시대에 따라  불상과 보살의 모양도 천장과 벽체의 문양도 제각기 달랐다.

 

 

3. 병령사 석굴

감숙성 영정현에 위치한 소적석산에 있는 불교 석굴군 195개가 있다맥적산과 같이 암석을 파내 크고 작은 굴을 만들고 진흙으로 빚은 부처와 돌로 된 불상이 모셔져 있다. 암벽에는 높이 27m라는 대불상이 조각되어 있고 병령사 법당에는 와불이 (누워 있는 불상) 모셔져 있다.

 

 

황토고원 지대 깊은 산속에 위치해 있고 황하의 상류지대에 속한다, 사진에서도 읽히듯 산들은 바다가 융기되여 퇴적층이 암석화 된 형상을 하고 있다.

 

 

 사찰 입구쪽 황하이다

 

 

절벽에 조각된 거대 불상으로 최근 보수를 하면서 표면처리를 너무 매끈하게 하여 주변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불상과 함께 절벽에 잔도가 설치되어 있고 크고 작은 석굴이 잔재되어 있다.

 

 

이곳으로 오기 위해서 세계 유일한 황토고원을  끝 없이 만날 수 있다. 오래 전 바다였던 이곳이 융기되고 오랜 세월 동안 그 위에 황토가 날아들어 깊이가 20-30m 달하며 비가 거의 오지 않는 이곳은 도로변에 황토로 가파른 경사를 만들어도 흘러내림 없이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황토로 된 사막과 진배없는 산꼭대기까지 농사짓는 이들을 산아래로 이주시키고 그 척박한 땅에 나무를 심고 그곳에 물을 주기 위해 곳곳에 급수라인이 거대한 산 정상들을 향하고 있는 모습은 푸른 환경변화를 염원하는 이곳사람들의 절규인듯 싶었다.

 

띄엄띄엄 있는 집들은 바람이 센 것인지 자로 황토벽을 쌓아 울타리를 두른 탓에 내부를 볼 수 없었으며 100% 황토집이니 집이라기보다는 흙움막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중국 영화에 객잔- - - 하는 영화를 보면 사막과 황토 날리는 황무지에 흙으로 지어진 객잔이야기가 나오는데 실제 와서 보니 영화속 장면이 실존함을 보았다.

 

개인적으로 이번 여행에 가장 의미 있는 곳은 둔황의 석굴이나 만리장성의 서쪽 끝자락 가욕관, 고비사막보다는 2-3일 동안 달려도 끝없이 펼쳐지는 처음 접하는 황토고원의 황량함이요, 황하가 흙빛으로 바다를 향하는 이유가 그곳에 있었다.  얼마나 걸릴지는 몰라도 세월이 흐르면 미국의 그랜드캐니언처럼 변해 갈 것이라는 대자연의 흐름을 상상해보았다.

 

다른 점은 그랜드 캐니언은 융기에 의한 고원평지가 오랜 세월 침식을 거쳐 깍여서 생긴 지형이라면 황토고원은 바다가 융기한 산위에 황토가 20-30m 덮여서 쌓이고 그것들이 세월이 흐르며 비바람에 깍여 계곡을 이루어 간다는 표현이 맞을 것 같다. 평지의 깍임이냐? 산에 덮힌 황토의 깍임이냐? 의 차이라는 말이며 그랜드캐니언에는 사람이 거의 살지 않지만 황토고원에는 곳곳에 흙먼지를 뒤집어쓰고 척박한 땅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이번 여행중 가장 인상적이었던 세계유일의 황토고원 모습이다.

 

 

4. 단하지질국립공원

 

감숙성 장예시 칠채산에 위치한다. 쉽게 말하자면 서로 다른 지하 광물들이 지층을 이룬 상태에서 세월에 깍여 나가 그 단면이 노출되면서 7가지 색을 띄고 있는 대규모 산 지형이다. 가는 비를 오후 내내 맞았다. 한 달에 한 번 온다는 준사막에서의 비는 행운을 가져다주는 기적으로 기쁜 마음으로 영접했다.

 

 

형형색색의 지형이  적지 않은 산채를 덮고 있었다.

 

7가지 색을 띄고 있다고 한다

 

 

 

 

5.가욕관

 

가욕관은 만리장성의 서쪽 끝에 위치한 마지막 성이다. 황토로 벽을 쌓아 만든 성으로 1539년 현재의 모습으로 보강되었다고 한다. 만리잔성의 동쪽 끝에 위치한 성은 산해관이다. 양 성의 거리는 6400km이며 만리장성으로 연결되어 있다.

 

동서 실크로드의 요충지 가운데 하나이고, 서역에서 중원으로, 중원에서 서역으로 가려면 반드시 이 성을 통과해야 하는 곳으로 상인들이 지나다니는 출입국 관리소와 같은 역할을 했다.

 

가욕관은 둘레 733m, 높이 11m의 성벽에 둘러싸여 있으며, 황토로 만든 성벽과 성곽이다. 만년설에 덮힌 기련산맥과 고비사막의 중간에 우뚝 솟은 가욕관 성채는 400여명의 군사가 주둔했고 만리장성 서쪽 끝이 성곽 둘레로 연결되어 있다.

 

한 가지 짚고 넘어갈 사항은 만리장성에 대해서이다. 우리가 기억하는 베이찡 근처 만리장성은 한 눈에 철옹성과 같은  거대한 성벽과 망루가 있으며, 성벽 위는 군사들 이동이 용이한 정도의 넓이를 가진  성 위 도로가 있다.  그러나 고비사막 마지막 성루인 가욕관에 연결된 만리장성의 잔해는 말이 뛰어넘지 못하도록 약 2m 높이의 진흙벽에, 상부 폭은 60cm 전후로 보였으며 감시 망루 같은 것은 아예 없었다. 아무래도 침입이 쉬운 베이찡 쪽은 대규모 군사들이 상주 할 수 있도록 견실하게 성을 쌓았고 고비사막 한가운데 성은 말이 뛰어 넘지 못할 정도의 울타리 개념의 성을 쌓아 마지막 성인 가욕관에 붙여 놓았다.

 

가욕관 정문

 

 

크지 않은 성이었다.

 

 

우측 성벽에 가로로 붙어 있는 허연 부분이 서쪽 만리장성의 끝부분이다.

 

 

6. 둔황 막고석굴과 명사산

 

막고석굴 

천불동으로도 알려진 막고굴은 둔황시의 남동쪽에 위치하고 있다.  벽화, 석굴, 문화유적 등 수천 년 동안 둔황 불교를 엿볼 수 있다. 석굴은 1000개 이상 있는데 발굴된 것은 492개 뿐이다.  신라의 혜초스님이 쓴 '왕오천축국전'이 발견된 곳인 제17호 동굴이 있으며 현재 왕오천축국전은 프랑스 르브르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고 한다. 중국 3대 석굴은 운강석굴, 용문석굴, 둔황석굴인데 그 중 벽화로 가장 유명한 둔황석굴인 막고굴중 7개소를 구경하는데 약 3시간이 필요했다.

 

유감인 것은 그 먼 길을 마다 않고 달려갔는데 문화재보호 차원에서 사진 촬영 금지라니 충분히 이해가 되면서도 여행을 마치면 남는 것이 사진뿐인데 이번 막고석굴여행도 로마 미켈란젤로 그림처럼 눈과 머리에만 담아야 했다.

 

막고석굴에서 남긴 유일한 사진 

 

 

명사산

 

남북 20Km, 동서가 약 40Km에 이르는 거대한 모래산인 명사산(鳴砂山)에서 회색 사막모래를 만날 수 있었다. 낙타 타고 약 3km쯤 사막을 돌아보는 관광객들이 주류를 이룬다. 특별할 것이 없다.

 

 

명사산 사구

 

명사산  사구

 

 

손님을 기다리는 낙타무리

 

 필자도 낙타에 올랐다

 

 

 

명사산 월아천(月牙泉)은 초생달 모양의 작은 오아시스로서 남북 길이가 약 100m, 폭이 25m 정도다. 현재는 인공적으로 호수를 유지한다고 하니 오아시스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월야천

 

 

 

7. 옥문관 마귀성

 

옥문관은 둔황에서 고비 사막을 달려 북서쪽으로 약 98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서역에서 옥()을 수입할 때 이곳을 통과하였기 때문에 이 이름이 되었다고 한다. 당나라 현장스님이 장안을 출발하여 옥문관을 거쳐 인도로 갔다가 양관으로 귀환하였다고 한다.

 

 

옥문관으로 30-40명의 군사가 주둔하는 요새였다고 한다

 

옥문관에 붙은 만리장성의 잔해로 높이 2m남짓, 성이라기 보다 진흙 울타리라고 해야 할 것 같다. 상단의 폭은 60cm 전후이다.

 

 

지독한 고비사막이다.

 

 

옥문관 군사 주둔지로 7-8명이 상주한 사막의 작은요새이다.

 

 

요새안의 모습으로 진흙으로 켜켜이 요새를 쌓았다.

 

 

마귀성은 고비사막의 모래바람이 사암층을 깍아 만든 자연 조형물들로 규모면에서 대만이나 안데스 유우니 사막에 동 종류의 조형물들에 비해 규모가 크나 상대적으로 모양은 다양하지 못했다.

 

사막의 거센 바람이 사암을 깍아서 만든 조형물들의 군락이 마귀성이었다

 

 

고비사막은 자갈과 모래, 진흙이 어우러져 딱딱한 표면을 가진 끝모를 사막이었다. 

 

 

 

 

 

8. 섬서(산시) 성곽 돌기

 

셤서성은 명나라때 건설 된 성이다. 이제까지 보아왔던 성들과 비교해서 특이점이 있다면 성곽 상단 도로의 폭이 약15m로 매우 넓었으며 안타까운 점은 성내에 궁궐 등은 명나라 궁궐들이 청나라에 멸망하게 되면서 소실 된 것인지 단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엣날 성 내부에는 현대화된 중규모 빌딩만 가득 했고 성 외부는 우리나라로 비교하자면 동탄급 신도시를 연상케 하는 고층빌딩과 아파트들이 즐비했다.

 

동대문이나 남대문을 연상하면 될 것 같다.

 

 

아주 특이한 모습으로 성곽 상단의 도로 폭이 15m로 대규모 병력이나 말들이 달릴수 있는 성이었다.

 

외국인 보다는 자국민 관광객을 위한 번화거리로 노래와 먹거리, 동상등이 있었다. 전통 노래를 부르는 가수 

 

평일임에도 행사거리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9. 여행을 마치며

 

현장에서 보는 중국은 유튜브에서 소개하는 세상과 얼마나 비슷할까? 길거리에서 아이나 어른이나, 신사든 숙녀든 대소변을 사람들의 시선을 무시 한 채 부끄러움 없이 정말 행하고 있을까? 기차나 버스의 통로는 사람들이 버리는 오물로 뒤덮이고, 도로이건 공공시설이든 시민의식이라고는 찾아 볼 수 없는 삶들을 대다수 국민들이 살고 있을까?

 

필자는 중국이 코로나로 인한 빗장을 풀고 여행객을 받아들이기 시작한 20235월 장가계에 이어 20244월에 씰크로드로 다시 중국을 여행하게 되었다. 중국이라는 나라가 인구 14억 명에 천차만별의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고, 땅덩이 또한 상상 초월의 국가이니 지역에 따른 국민의 생활수준이나 교양, 의식 등이 다르다는 전제를 하더라도 단언컨대 중국은 유튜브에 소개되는 형편없는 사람들만 살아가는 곳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 여행지는 중국의 깊은 내륙사막지역으로 바다가 접한 텐진. 상하이, 칭따오, 홍콩, 광동 등 선진국에 가까운 사람들이 살아가는 곳과는 생활수준, 지적수준, 시민의식, 문화수준 등에서 낙후된 덜 개화된 곳이라는 선입견을 가지고 여행을 출발했다.

 

중국의 내륙 변방도시들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지나는 도시마다 골조만 덩그러니 지어져 있는 팔리지 않은 아파트들이었다. 한편 난주 같이 대도시에는 도로에 세계적 명품 브랜드 차량들이 넘쳐나고 이곳이 내륙 도시인가를 의심케 하는 서울인근 신도시와 같은 현대적 도시 모습에 살짝 당황스러움도 있었다.

 

거리를 활보하는 사람들의 옷차림과 모습은 서울거리 사람들과 진배없었고 도로나 식당에서 떼 지어 큰 소리로 떠들거나 도로에서 공중도덕을 지키지 않는 이상한 언행을 하는 사람들은 찾아 볼 수 없었다. 난주는 대도시에 속하니까 사람들이 개화되어 그렇겠지 생각을 하며 황무지와 사막인 황토고원과 고비사막을 향 했었다.

 

이후 여행의 종착도시인 둔황까지 황무지, 사막에 자리한 오아시스에 건설된 우리나라 읍 정도의 규모의 중소도시들을 거치게 되었다. 예상했던 대로 오아시스를 벗어난 도로변 풍경은 녹색의 풀이나 작물이 자라는 토지를 거의 본적이 없다. 인간이 이런 황무지에서 흙집을 짓고 무엇을 먹으며,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까 싶을 정도의 열악한 삶에 환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그럼에도 이곳에 집을 짓고 가정을 이루고 사는 사람들이 있는 것은 인구대국 중국만이 가능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아시스에 있는 중소도시들도 대도시와 마찬가지로 거리에 노인들이 없었다. 우리나라의 경우 도로에서나 공원을 산책하는 많은 노인들을 볼 수 있는데 반하여 어떤 이유인지 대부분 중국의 도시에서는 노인을 볼 수 없었다. 중국은 노인이 없는 나라일까? 아니면 노인 강제 수용소라도 운영하고 있는 걸까?

 

또 다른 변화는 중국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외국인들에게 눈길을 주는 중국인을 본적이 없다. 행여 필자만 그런 생각을 했을까 싶어 동행한 분들에게 물어도 한결같은 결론의 대답이었다. 우리나라만 해도 외국인 그룹이 지나가면 한 번쯤 쳐다보는 것인데, 만사에 관심이 많은 중국 사람들이 약속이나 한 듯 씰크로드 10일 동안 유일한 여행팀이며 외국인인 우리팀을 쳐다보는 중국인은 단 한명도 없었다. 국민에게  마법을 걸거나 법으로 금지 시켜 놓은 것인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둔황에서 대형 슈퍼마켓을 돌아 볼 기회가 있었다. 그곳에 전시된 물품들은 서울의 것들에 비해 5년쯤 뒤쳐졌을까? 적어도 대형슈퍼에서 판매되는 물품은 맛은 모르겠지만 위생상 의심으로 구매를 망설이는 문제는 없었다. 상품의 포장에서 전시방법까지 꼭 우리나라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게다가 넘쳐나는 상품들은 중국도 돈만 있으면 우리나라 정도의 풍요로운 삶을 살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꼭 짚고 넘어가야 할 이야기가 있다. 한 번쯤 보안검사에 대해 상상해보시기 바란다. 공항에서 내리면 중국인들은 그다지 기다림 없이 순조롭게 입국절차를 마쳤다. 그러나 세계가 인정하는 1등 국가인 한국인 관광객은 한쪽에 줄을 세우고 출입국 창구 수를 늘리면 좋을 텐데 굳이 벌 세우 듯 한 두 사람으로 입국 심사를 한다. 시간이 많이 걸리는 것은 당연하고 고의성이 짙다는 상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대형 공항 입국장임에도 외국인 관광객이라고는 한국인 밖에 없었다.

 

어렵사리 입국절차가 끝나고 함양공항에서 서안까지 지하철을 타게 되었다. 지하철 표를 사는데 여권을 스캔해야 하고 공항 보안 검사 같이 짐 검사와 몸 검사를 한다. 지하철을 내려 서안에서 고속철도로 바꾸어 타고 난주시로 향하게 되었다. 다시 표를 사기 위해 여권을 스캔하고 입장 시 얼굴인식 사진을 찍힌 다음 공항보안 검사와 똑 같은 절차를 거쳐 기차에 오를 수 있다. 물론 중국인들도 보안 검사를 하지만 얼굴인식 검사는 하지 않았다.

 

매번 관광지에서 입장표를 구매하며 참았던 분노가 폭발 할 것 같았다. 중국인은 자유롭게 출입을 하는데 어느 곳을 막론하고 외국인관광객은 여지없이 여권 확인 후 입장권을 살 수 있고 얼굴인식 사진을 찍히고서야 입장이 가능했다. 이런 제도화 된 외국인 차별 관리는 자유롭게 살던 사람들에게 크게 성가신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당연히 간첩죄마저 신설한 중국을 외국인 관광객들이 외면하는 것은 당연한 결과 아닐까?

 

필자는 소형 망원경을 가지고 갔었다. 현지 가이드가 슬며시 다가와 선생님 그거 보시다가 공안원이 잠깐 보자고 하면 곤란해 질 수 있습니다.”라는 말을 했다. 이후 필자는 망원경을 가방 속에 깊숙이 넣어 두어야 했다. 20234월 중국이 코로나로 인한 해외 빗장을 풀었을 때부터 호텔내에서는 와이파이가 연결되었지만 중국 이외의 소통은 불가 하도록 조치 된 듯 했다. 이번 여행기간에도 소통 불가결과는 똑 같았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은 중국은 유튜브 등에 알려진 만큼 공중도덕이 무너진 나라는 아니었다. 국민의식 변화는 100년 교육이 필요하다고들 하는데 중국은 약 30년의 짧은 시간 안에,  선진국 수준의 해안가 도시보다는 못하지만 생활수준, 지적수준, 공공의식, 문화수준 등 사고방식 면에서 중진국 수준의 삶을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 다시 중국을 여행하고 싶은가?라고 묻는 다면  글쎄 적어도 당분간은 가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는다. 차마고도와 우즈베키스탄으로 이어지는 씰크로도를 생각하고 있지만 통제나 감시당하는 느낌에서 편안한 여행길이 보장되지 않는 한 그리 반가운 일은 아닐 것 같다. 한편 황토고원과 일부 사막에서 어렵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는 점.... 어느 나라이건, 어떤 이념이든 있는 자와 없는 자, 모두가 잘 사는 지상낙원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되새기게 된다. /.

 

 

여분의 사진

 

평아지대인 서안에서 서북쪽 황토고원지대와 고비사막으로 진행하게 된다.

 

이번 여정의 중간 도시들

 

 

인천공항에서 공항철도로 서울역 가듯이 함양공항에서 지하철을 타고 서안으로 이동 했다. 좌석 배치가 우리와 다르고 근대에 건설되어서인지 시설이나 전동차 모두 새것이었다.

 

 

서안역이다. 중국인 스케일 답게 커도 너무 크다.

 

 

이번 여행은 4성급 이상 호텔에서 호텔식 식사로 숙박에 대한 만족도는 높았다.

 

 

맥적산 석굴 내부로 당시 진흙으로 만들고 채색된 불상과 석실이 천년의 유물이라고 믿어지지 않았다. 

 

 

병령사 입구 황하와 비바람이 씻겨 낸 황토고원의  장중한 모습 

 

 

청동기 유물로 안내 내용처럼 34.5cm의 높이에 길이 45cm 무게 7.15kg의 청동작품이다.

 

 

이곳은 당시 세력가의 무덤 내실로 청동 작품들이 이렇게 출토되었고  지금은 모형이 그자리에 전시되어 있다.

 

 

청동 작품들을 기반으로 실물크기로 대형화 하여 전시되어 있다. 

 

 

당시 출토된 청동기 대표작품

 

 

사막 가운데 허물어져 가는 흙담이 보인다. 그 옛날에 만리장성의 잔해이다.

 

 

한 줄의 흙으로 된 담은 만리장성의 잔해이다.

 

 

칠채산

 

 

가욕관,,,,

 

 

가욕관 성루에서

 

 

이번 여행을 심도있게 안내해준 심형철 교수... 뒤로 기련산맥의 설산이 보인다.

 

 

우측은 높이 11m의 가욕관 성곽이고 , 사진 가운데 줄문이 흙담이 만리장성이다.  이곳 만리장성 높이는 2-3m를 넘지 않으며 본성 바깥에 둘러져 있고 상단 성의 두께는 60cm를 넘지 않는 것으로 보였다. 

 

 

가욕관 본성 성곽에서

 

 

성내부로 사막평야지대에  11m의 성곽 높이가 위압적이다

 

 

둔황이 가까운 고비사막에 중국내 유명하다는 예술가 들이 스케일이 큰 예술품들을 사막 한가운데 전시해 놓았다. 

 

 

대표적 작품이라고 하는데 커다란 벽돌들을 구워 조립하듯 완성한 작품이다.

 

 

중국역사에  한 획을 그은 한무제 흉상이다. 

 

 

황토고원과 고비사막이 겹치는 곳 같다.  산과 들은 높고 끝없는데 세상은 어찌 흙빛으로만 덮혔을까?

 

 

이번 여행의 하이라이트 막고석굴이다.  눈으로만 담을 수 있었다.

 

 

석굴에는 콘크리트로 구조물을 해달고 육중한 문에 자물쇠까지 채워져 있었다. 한국어를 하는 전문 가이드가 열쇠를 열어주고 내부로 안내하여 설명하는 식으로 우리팀에게 선정된 단 7개만의 석굴만을 볼 수 있었다

 

 

둔황까지의 여정이 끝났다.  돌아가는 길은 고속철도 있겠지만 낭만적으로 옛날식 디젤기차를 타게 되었다.  이 사막 한가운데 철도고객이 얼마나 된다고  배포도 크게, 아니면 허황되게 상상 초월 기차역을 건설해 놓았다.    

 

 

열차에 붙은 안내판

 

 

우리팀은 특실ㅊ에 탔다.  우리가 여행해 왔던 길을 되돌아 무려 27시간 기차를 타게 되고 가격은 우리돈으로 125000원이라고 한다.

 

 

특실 침대칸으로 한쪽으로 2층으로 침대가 2개 있는 4인 침대실이 있고 통로와 접하는 곳이 칸막이로 되어 있어 안의 사정을 볼 수 없다.  침실 반대쪽에 통로가 있으며 공동 화장실, 세면실이 있고 끓는물이 무제한 제공 된다.

 

1등 침대칸이다. 통로쪽으로 칸막이 없이 노출된 상태이고 3층 침대가  6인 기준으로 한칸에 2개씩 놓여 있다.  3층 여객은 잠잘때를 제외하고는 올라가지 못할 좁은 공간처럼 보였다. 이외에 보통실이 있는데 일반 객차처럼 의자로 되어 있으며 침대칸으로 통행 할수 없도록 되어 있다.

 

여행을 마치고 서안 관광객 거리에서 한참 동안이나 넋을 빼게 만든 천상의 목소리로 노래하는 가수의 모습이다.

 

 

상당한 값을 치루어야 맛볼 수 있다는 통 양 바베큐로 고단한 여행 마무리 시간을 가졌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