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고철 튀르키에 2부
22.11.23 튀르키에 동남부와 시리아 북부에 강진이 발생하고 현재도 여진이 이 나라에 계속되어 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다쳤다 한다. 애도하는 마음으로 여행 포기를 검토하였으나 80% 경비를 포기해야 한다는 현실에 비행기에 올랐던 여행길이었다. 피해를 입은 분들께 위로의 말씀을 드리며 빠른 일상으로 회복되기를 마음속으로 빌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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튀르키에
13세기 말 오스만터키 제국이 탄생 되었으며, 면적은 한국의 약8배이다. 인구는 약 8582만명이며, 종교는 이슬람교, 우리나라와 시차는 6시간이며, GNP 9864달러로 세계 74위의 나라이다.
대부분의 중저개발 국가와 마찬가지로 빈부의 격차가 심하며 핵심층은 상상초월의 삶들을 사는 것으로 보였으나 소도시나 시골의 서민들은 그다지 여유가 있어 보이지 않았다. 지중해 해안쪽으로는 지중해성 기후속에 넓은 평원의 밀밭이 끝없이 이어져 있다. 해안에서 멀찍이 떨어져 보이는 산맥은 거대한 돌산들로 그리스 산들과 비슷했다.
이 나라 사람들은 한국인에 대해 형제국이라며 좋아한다고 우리나라 메스컴에서 소개하고 있지만 막상 현지에서 한국인이라고 우대 해준다거나 우호적이라는 느낌은 받지 못했다. 대제국의 후손답게 자존감이 있어 보였고, 마음은 좋은지 몰라도 우리나라 사람들처럼 대부분 국민들이 경직된 얼굴들을 하고 말이 없었다.
대부분의 서양인들이 즐겨하는 눈인사나 미소에 인색했으며 친절하다는 느낌은 받지 못했다. 친해지기 전까지 무뚝뚝하고 경계심 많은 우리나라 사람 특성과 비슷했다.
잠시 튀르기에 역사에 대해 검토해 보면 이 나라 사람 조상은 몽골과 중앙아시아에 살았던 훈족의 튀르크족으로 유목민족이다. 튀르크는 힘이 세다는 뜻으로 이 나라 사람들은 자신을 튀르크족이라고 즐겨 말한다.
11세기 이슬람교를 받아들이고 지금의 튀르키에 땅으로 이주하여 셀주크제국을 건설하고 황제를 술탄이라 칭했다. 13세기 셀주크 튀르크족에서 분리되어 나온 오스만족이 셀주크와 동로마제국 사이에 오스만터키을 세웠다.
오스만터키 전성기 때는 헝거리, 루마니아 ,우크라이나, 불가리아, 그리스 포함 발칸반도 전역과 튀르키에, 이라크,메소포타미아, 시리아, 이집트, 모로코 등 아프리카 북부를 석권한 대제국이었으며, 세계1차 대전 패배로 몰락의 길을 걸어 현재의 국경을 가지고 있다.
한국전쟁참전국으로 미국, 영국 다음으로 많은 15000명이 참전했으며 그중 747명이 사망했다. 그리스와 더불어 우리나라가 고마움을 잊어서는 안 될 나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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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튀르기에 주변지역의 고대국가들을 정리해 보았다
페르시아 BC550년- BC330년
기원전 국가로 이란 고지대를 중심으로 서아시아, 중앙아시아, 코카서스 지방을 포함하는 넓은지역을 통치하던 이란의 고대 제국이며 알렉산더에 의해 멸망되었다.
셀주크 터키 1040년 - 1457년
터키와 중앙아시아 이란, 이라크, 시리아를 지배하던 제국이다.
오스만 터키 1299년- 1922년
동로마제국 멸망시키고, 약 600년 동안 러시아, 폴란드, 오스트리아까지, 아프리카는 지중해 연안국들중 서쪽으로 모로코, 동쪽으로 에디오피아까지였으며 아시아쪽으로는 이란과 국경을 맛 댄 대제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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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부터 튀르기에 여행을 떠나보자.
차낙칼레 1915대교
아시아와 유럽사이에 차낙칼레 1915대교가 있는 곳으로 오스만제국 몰락 후 현재의 튀르키에 공화국 건국 100주년 기념으로 건설한 다리이다. 1915의 의미는 세계1차대전시 튀르키에군이 영국군과의 이곳 전투에서 승리한 것을 기념하는 년도를 의미하며 튀르키에 승리로 끝난 이곳 전투에서 두나라는 약50만 명의 전사자가 났다고 한다.
착공 5년만인 22년1월8일 개통 되었고 시공사는 자랑스럽게도 한국의 대림산업과 SK건설이었다. 총길이 2023m로 세계최장 현수교 다리로 주탑의 높이가 318m나 된다. (참고 서울 아차산 높이286m)이 다리개통으로 해협통과에 1시간30분
소요되던 뱃길이 차량으로 6분이면 가능하다는 이 다리를 통해 튀르키에 내륙으로 들어갔다,
야간에 촬영하여 어둡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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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로이 목마
트로이목마는 고대 그리스 전쟁신화에 대한 이야기로 사실적 근거는 없다. 우리의 거북선을 상상해서 재현 했듯이 트로이목마 역시 현대사람들에 의해 재현되어 전시되어 있다.
트로이성은 1871년 고고학자들에 의해 발굴되었다. 이로써 그리스와 트로이가 전쟁을 벌였던 튀르키에 땅에 실존했던 성이다는 구전은 진실이 되었다. 에게해에서 튀르기에 육지 쪽으로 2-3km 평야지대를 지나면 높이 10m 남짓의 넓은 구릉이 있고 그곳에 트로이성유적이 발견된 성을 여행 할 수 있었다,
성터에는 외곽성과 내부 궁전 등의 유물이 있었고, 그 당시에도 원형극장이 존재 했던 것으로 보아 청동기 시대에도 이곳 사람들은 원형극장에 모여 토론과 가무, 공연등을 즐겼으리라는 추측을 해 보았다. 한편 유적지 개발현장을 보면 이 성은
누구에게나 전략적 요충지여서 트로이성 잔재 위에 그리스가 성을 쌓았고, 그 위에 다시 로마가 성을 쌓았던 자취들이 남아 있었다.
트로이성은 1871년 발굴 되었다
소형 원형극장
트로이성 성터와 궁궐 상상도
트로아 목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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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페소
유네스코 문화유산이다. 에게해의 항구도시이며 고대 그리스 식민도시로 헬레니즘문명과 동로마 비잔틴문명의 자취가 남아있는 현대의 눈으로 보아도 대단한 규모의 예술적도시였다.
25000명의 좌석을 가진 원형경기장을 비롯해서 도서관, 경기장, 교회, 목욕탕 대저택 등이 즐비한 거리 유적을 돌아보며 2000년 이전에 그리스, 로마시대에 번성했던 당시를 상상하며 고대 아나톨리아반도 역사는 그리스, 로마의 지배역사와 밀접한 관계가 있고 대부분 유적지는 그리스와 로마시대의 유물이었다.
한편 튀르그족은 11세기에 이 땅에 이주했으므로 그리스나 로마의 지배를 받지 않았고 역으로 동로마제국을 멸망시킨 오스만 대제국을 세운 민족이며 국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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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물 기둥과 소형 원형 경기장
가운데 붉은 토기관이 급수관이다
도시 전체에 장대 기둥이 산재 된것으로 보아 규모가 큰 건축물이 많았다는 추측이 들었다.
귀족들의 빌라촌
귀족 주택의 현관
도사관 앞 광장으로 도시전체가 잘 조화된, 현대의 눈으로 보아도 규모면에서 화려함에서 대단한 도시라는 생각이 들었다.
귀족 대저택들의 정문
위 건물 처마 정면에 뱀의 머리카락을 가진 무시무시한 메두사가 조각되어 있다. 메두사 머리카락이 소름끼친다.
목욕탕에는 수세식 화장실이 있다.
놀라운 것은 기원전에 이미 이들은 벽돌을 구워 건축재료로 썼다는 사실이다.
셀수스 도서관으로 유네스코 문화유산 등재된 유물이다. 무덤과 도서관이 합쳐진 형태의 에페스를 대표하는 로마
시대 유적이다
가둥으로 보아 대형 건축물의 잔재이다
나는 행복한 사람이다.
원형대극장
소아시아 최대 로마식 원형대극장으로 2000년 이전에 건설된 너비 145m, 높이 30m이며 22계단으로 이루어져 있다. 25000명을 동시 수용하는 거대 규모로 이곳을 사람으로 채울 수 있는 에페소라는 도시규모와 상상초월의 인구수를 상상해 보았다.
이곳에서는 시민회의, 각종공연, 검투사 경기 등이 열렸고 2000년 전 그 시절에 관중에게 공연 모습과 음향, 액션의 소리 까지 객석 전달되도록 설계 건설되었다는 점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없다.
원형경기장 입구도로로 양 옆은 도시의 흔적이 가득 남아있다.
원형경기장이다. 잠실야구장 연상하면 어떨까 싶다. 기원전 상상초월의 규모와 지금까지 파손되지 않은 과학이 담긴 건축물이다.
에페소는 얼마나 화려하고 대단한 도시였을까? 단언 하건데 에페소 하나만으로도 이 나라국민들은 관광객 걱정 안해도 되겠다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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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묵칼레
히에라폴리스
유네스코 문화유산이다. 파묵칼레 언덕 위에 세워진 도시로 기원전 129년 로마인들에게 지배당한 이 도시는 고대 시바여왕이 휴양차 방문 했다는 전설이 있는 온천도시로 귀족들의 대주택 자취와 신전, 2개의 원형경기장, 온천 공동목욕탕, 공동묘지 등 에페소 보다는 유적의 보존 상태가 좋지 못했으나 도시의 규모나 기반시설 만큼은 에페소에 버금가는 대도시였음을 느낄수 있었다.
평지에서 약 200m 정도 솟아 오른 구릉 위에 칼슘성분의 온천수가 솟는데 도시한가운데 귀족을 위한 건축물 안에 노천 온천탕이 있고, 이곳에서 사용된 물이 언덕 아래로 흐르며 석회석 침전물이 흰 빛으로 자연둑을 만들고 언덕을 뒤덮어 우리나라 남해의 다랭이 논 같은 형상을 하고 있었다. 상상초월의 대장관이었다.
히에라포리스 조감도
카파토피아 처럼 파묵칼레에서도 열기구가 뜬다.
이 도시 높은 곳에 위치한 원형경기장규모는 에페소보다 작았지만 2개소가 있었다.
기원전 건설된 도시 중앙에 대형 노천온천탕이있다. 수증기가 나는 곳이 규모 큰 온천탕으로 귀족들이 사용했다고 한다.
칼슘성분의 온천탕이 수천년 흘러 넘쳐 도시 아래로 흘러가면서 언덕에 하얀색으로 두꺼운 카페트를 깔아 놓았다.
설명하기 어려운 장관이 그곳에 있다.
평지에서 바라 본 하얀 석회석 언덕위에 대규모 온천도시 히에라포리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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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탈리아
지중해의 항구도시로 튀르키에 최대휴양도시이다. 안탈리아는 셀주크 터키의 가장 오래 된 유적 도시라고 한다.
항구 중심의 구도시와 달리 신도시는 아파트 등 현대화 된 휴양도시 답게 번화하고 사람들도 활기 찼다.
안탈리아에 있는 튀르키에 올림푸스산 (그리스 북부에도 올림푸스산이 있다)
수천 년전부터 있던 안탈리아 항구...이곳을 통해 그리스, 로마와의 교류, 무역, 전쟁, 지배 등이 일어났다.
하드리아누스문으로 서기 130년 로마황제 히드리아누스가 안탈리아를 방문하는 것을 기념해 만든 대리석 문이다. 이 문을 통해 항구에서 구도심 진입이 가능했다.
항구 언덕 윗쪽에 안탈리아 구도시골목
안탈리아의 구도심 이블리모스크에 세워진 38m 높이의 모스크 첨탑.
안탈리아의 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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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브룩한
튀르키에에서 지중해를 따라 안틸리아까지 여행하면서 튀르기에는 키 작은 나무가 숲을 이룬 산들과 비옥한 옥토가 넓은 들을 형성하고 있는 넉넉한나라라는 생각을 했다.
드디어 여행의 하이라이트 카파토피아를 향해 가면서 이 나라의 내륙을 구경하게 되었다.
지중해의 온화함은 간곳이 없고 그리스보다 더 심한 돌산으로 된 머리허연 고산들이 즐비한 산맥을 넘어 다음 목적지인 오브룩한까지 5시간 동안 이동했다.
그 길은 옛날 로마로 향하는 실크로드의 길이었으며 40km 마다 상인들의 숙식을 해결 할 수 있는 작지 않은 성 같은 카라반 사라이라는 건축물들이 구간마다 있었다.
산맥을 넘어가자 예상과 달리 해발 600m 정도 고도에 지평선이 보이는 평원이 펼쳐졌고 그곳이 모두 밀밭이라고 하니 이 나라는 정말 신의 축복 받은 초원의 국가였던가?
카라반 사라이라는 소형 성 모양의 건축물로 실크로드 상인들의 여관 같은 곳이었다.
카라반 사라이 뒷편에는 씽크홀로 형성된 지름 1km, 깉이 200m의 자연호수가 있었고 현지인들은 이 물을 끌어 농사에 이용하고 있었다.
이곳 주변은 지평선이 경계인 광활한 밀밭으로 여행 당시 2월로 눈이 덮혀 있었다.
튀르키에는 어딜가나 개와 고양이가 많았다. 개들의 경우 성견의 경우 송아지만 했으나 위협적이지는 않았다. 이 녀석들 관광객이 오면 먹이를 달라고 모여들었다. 도심 뿐 아니라 허허벌판 카라반 사라이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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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린구유 (지하도시)
깊은 우물이라는 뜻을 가진 데린구유를 4층까지 관람했다. 지하 8층까지 개발되었으나 얼마나 깊이, 또 인접 도시와 연결 통로 등 미지의 지하도시에 3만명이 생활 할 수 있는 공간이었다니 신비로울 뿐이었다.
다만 이곳 지형은 인근 화산이 대폭발하면서 화산재가 퇴적되어 형성된 응회암인 점에 미루어 굴착이 용이한 이유로 지하도시를 만들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일설로는 기독교들이 박해를 피해 이곳에 교회 등을 지하에 만들고 피신했다고 하는데 건설시기가 더 오래전이었다는 안내자 말이다. 그래도 그렇지 2천년 이전에 3만 명의 지하도시라니 상상이 되질 않았다. (현대에도 공기, 식량, 물, 생활 공간 등 3만 명의 지하도시 건설은 불가능하다)
식당
광장
학교
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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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파토피아
튀르키에 그러면 연상되는 곳 중 하나가 바로 카파토키아이다. 이곳 역시 인접 화산 대폭발로 쌓인 화산재들이 오랜 기간 지나면 홍수, 비바람 등에 의해 기묘한 모습으로 변화된 곳이다. 애석하게도 바람이 불어 열기구는 타지 못했다. 대신 짚을 타고 구석구석 찾아다니며 아쉬움을 달랬다.
마을 언덕위에 우뚝선 벌집 같은 바위로 부근에서 제일 높은 전망대가 있다. 예전에 사람이 살았던 동굴들이라고 한다.
구멍은 출입문과 창문이다.
마을과 함께 공존해 있다.
두껍게 쌓인 화산재들이 오랜 세월 비바람에 씻겨 형성된 특이환 지형이다.
바위에 굴을 파고 사람이 살았다.
이런 특이한 지형들이 광범위하게 형성되어 있었다.
족히 50년은 되었을 찦을 타고 이동했다.
카파토피아에서 이스탄블까지는 비행기로 이동했다.
2부 끝. (3부에서는 이스탄블입니다)